반유대주의 유형들과 해명들
아렌트는 자신의 반유대주의 분석을 위해 알렉시스 토크빌의 입장을 수용한다. 토크빌에 의하면, 프랑스의 귀족들은 사법과 재판에서 권력을 가지고 있었고 존중을 받았다. 귀족들이 특권을 상실할 때, 이들은 나라를 다스리는데 아무런 실제적 기능을 하지 못하는 기생충처럼 여겨졌다. 억압과 착취가 아니라 신분적 특권의 상실이 증오의 대상이 되었다.
마찬가지로 반유대주의 또한 유대인들이 공적기능과 영향력을 상실하고 경제적인 부만 남겨졌을 때 정점에 달했다. 히틀러가 정권을 장악하기 전, 유대인들은 이미 한 세기 이상이나 금융계에서 주요한 역할을 했다. 이들은 사회적 신분과 수적인 성장을 했지만, 히틀러의 정권에서 거의 멸절 당했다.
프랑스에서 알프레드 드레퓌스사건도 제 2제국에서 발생한 것이 아니다. 이 시기에 유대인 사회는 번영과 사회적 영향력으로 정점에 달했다. 드레퓌스 사건은 1894년 12월 제 3공화국에서 발생했고 이 시기에 유대인들은 주요한 지위에서 거의 다 사라지다 시피했다. 드레퓌스는 유대인 출신 대위였다. 그는 필적이 비슷한 편지로 인해 독일과의 스파이 혐의로 투옥되고 비밀 군사 재판에서 무기형으로 판결되었다.
1897년 11월 의회에서 드레퓌스 사건에 대한 재심이 요구되고 한달 후 에밀 졸라는 <나는 고발한다>를 신문에 개재하면서 프랑스는 지지파와 반대파로 나뉘어 들끓기 시작했다. 프랑스의 사회주의자들은 드레퓌스 사건을 지지하는 카톨릭세력에 저항하여 드레퓌스에 연대했다. 결국 드레퓌스의 필적은 상관의 직시로 위조된 것으로 드러났다. 1899년 6월 법원은 1894년 내려진 원심의 판결을 취소했다. 1906년 7월 프랑스 법정은 드레퓌스를 모든 기소로부터 방면했다 (The Origins, 89-90).
그러나 드레퓌스는 길거리에서 공격을 당했고 파리법정은 이들을 훈방처리했다. 1935년 그가 사망했을 때 언론은 그의 기사를 다루려고 하지 않았다. 유대인 출신 대위 드레퓌스 사건은 19세기 프랑스의 반유대주의적 성격을 단적으로 드러낸다.
오스트리아의 반유대주의 또한 나폴레옹 패배이후 복고적 정통주의를 표방했던 메테르니히 수상 체제가 아니라 전후 오스트리아 공화국에서 유대인들의 사회적 역할과 영향력이 사라지던 시기에 일어났다. 아렌트는 토크빌의 사회학적 분석을 수용하고, 서유럽과 중부유럽에서 반유대주의는 유대인들이 특권과 힘을 상실한 시기에 사회적인 박해로부터 온다고 본다.
이러한 입장은 유대인들을 속죄양으로 보는 견해와는 다르다. 다른 인종들도 유대인처럼 속죄양이 될 수 있다. 이러한 속죄양 이론은 희생자들의 완전한 흠없음을 부각시키지만, 이들에게 죄에 대한 비난과 처벌할 때 순전한 희생자 개념은 사라진다. 이러한 이론은 도피주의에 가깝다. (ibid., 4-5) 왜냐하면 이것은 희생자를 비난하는 태도로 일관하기 때문이다.
아렌트에 의하면 근대의 독재와 과거의 다른 전제지배의 근본차이는 테러에 있다. 테러는 대중을 복종시키고 죄없는 사람들을 지배하기위한 수단으로 사용된다. 이러한 테러는 나치 독일에서 유대인들에게 자행되었다. 볼세비키 체제에서도 죄 없는 시민들이 비밀경찰테러에 의해 희생 당했다. 근대의 테러정치는 속죄양의 이론의 특징을 보이지만, 테러는 특별한 이데올로기를 수행하는 수단으로 즉 전체주의 지배의 기초가 된다 (ibid., 6) 속죄양이론은 반유대주의의 심각성을 회피하는 주요수단이 되기도 한다.
그런가하면 “영원한 반유대주의” 담론도 존재한다. 유대인 증오는 정상적이고 자연적인 반응이며, 유대인은 2천년동안 살해당해왔다. 유대인살해는 흔한 것이며 논쟁의 여지가 없다. 이러한 입장은 전문적인 반유대주의자들에게서 볼 수가 있는데, 유대인 증오의 이러한 자연적 귀결은 영원한 것이며 모든 공포와 살해에 대한 최상의 알리바이가 된다.
이러한 입장은 심지어 편견이 없는 많은 역사학자들이나 심지어 유대인들에 의해서도 수용된다. 영원한 반유대주의는 이스라엘의 선택과 메시야 희망에 대한 믿음으로 인해 유대인 존재의 영원한 보장을 한다고 착각한다. 이것은 오랜 세기동안 유대인들이 기독교의 증오를 경험하면서 강화된 것이다. (ibid., 7). 그러나 영원한 반유대주의는 매우 위험한 생각이며, 반 유대주의는 결코 유대인들의 생존을 보장하는 것이 아니다.
유대인의 해방과 반유대주의
프랑스 혁명에서 봉건제가 몰락하면서 혁명정부에서 평등개념은 1792년 칙령을 통해 유대인은 정치적으로 그리고 법적으로 해방이 선언되었다. 이전 절대 군주제에서 유대인 은행가들은 왕과 귀족들에게 재정을 지원하고 이들의 보호를 받았고, 국가의 금융과 재정에 관여했다. 이들의 생활조건은 유럽의 중산층 이상이었다. 특권층의 유대인들은 프랑스와 바바리아, 오스트리아 그리고 프러시아에서 귀족의 칭호를 얻었고 부유한 사람들 이상의 신분을 누렸다. (ibid., 17)
프랑스 혁명을 거치면서 인종주의는 일차적으로 아르트르 고비노 (1816-1882)에게서 나타난다. 고비노는 영국의 자유방임주이나 사회진화론과는 상관없이, 혁명에서 귀족제가 무너지는 것을 목격 하면서 아리안 인종의 우위성을 강조했다. 그의 아리안주의는 바그너를 통해 독일의 나치즘에 수용되었다. 고비노는 프랑스 혁명이후 <인종 불평등의 기원에 관한 에세이, 1853>에서 귀족이 평민보다 더 우수하다고 말한다. 귀족은 저급한 인종들과 결혼을 하지 않기 때문에 아리안 유전자의 특질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인종이론의 기준이 되었다.
고비노는 유럽에서 발흥하는 민주주의 운동과 민족국가에 투쟁했고 귀족제를 위한 인종정치지배를 확립 하려고 했다. 그것은 엘리트인종을 통해 귀족의 지배를 대신하는 것이었다. 고비노는 프랑스 민족의 기원에 대한 18세기의 교리를 문자대로 수용했다: “부르주아지는 고올-로마 노예들의 후예이며, 귀족은 독일인종들이다.”(ibid., 172)
프랑스의 귀족은 혈통상 독일의 아리안 계통이며, 식민주의는 인도주의적인 문명선교의 관점에서 정당화된다. 그러나 토크빌은 고비노에 대한 답장에서, 그의 인종 이론은 잘못된 것이며 대단히 해로운 것으로 비판했다. 인종적 사고는 서구의 세계에서 지배 계급의 존엄과 중요성을 유지해주는 중요한 정신적 기여에 속한다. (ibid., 158)
그러나 이제 “국가안의 국가”라는 유대인의 특권과 제한은 더 이상 허용되지 않았다. 아렌트에 의하면 프랑스 혁명에서 자코뱅이 이해한 평등조건은 미국에서 현실이 되었지만, 유럽대륙에서 그것은 법앞에서 형식적인 평등에 불과했다. 법앞에서 정치적인 평등과 계급체제의 사회적 불평등간의 근본적 대립은 새로운 정치적 위계질서를 산출했다. (ibid., 13)
민족정부와 유대인의 친밀한 관계는 투자와 수익에 관심한 부르주와지들이 정치일반과 국가 특별재정에 대한 무관심에 근거했지만, 이러한 관계는 19세기 말엽 제국주의 발흥으로 인해 종언을 고했다. 자본주의 비즈니스와 팽창은 국가의 정치적 지원 없이는 가능하지가 않다.
로스차일드 가문
로스차일드 가문은 비엔나의 황제의 권위아래 유대인 은행업자로 시작했다. 이 가문은 중세의 유대적인 특권신분과 당대 황제의 비호를 연결하고 다른 유대인 은행가들와는 달리 귀족들이나 다른 로컬 정부의 권력에 크게 의존하지 않았다. 1760년대 은행업을 시작하면서 로스차일드는 그의 다섯 아들을 통해 인터네셔날 은행업을 설립했다.
이들은 신성로마제국과 영국에서 귀족신분을 얻었고 19세기 초부터 로스차일드 가문의 부와 명성은 잘 알려져 있었다. 이들은 나폴레옹 전쟁 마지막 해 1811부터 1816년 사이에 거대한 비즈니스에 관여했고 유럽대륙의 권력은 이들의 손을 거쳐나갔다.
나폴레옹 몰락 후 유럽대륙은 국가기구를 재조직하고, 영국은행의 모델에 따라 재정구조를 설립하기 위해 강력한 국가재정을 요구했다. 로스차일드는 국가채무를 거의 독점하다 시피했고 신성동맹의 주요 재정관이었다. 그러나 로스차일드 가문은 특별한 정치권력이나 특정 국가에 줄을 대지 않았고 인테내셔날 조직을 가지고 있었다. 리버럴 공화제보다는 군주제를 선호했다. (ibid., 25)
그러나 유대인들은 바이마르 공화국 말년에 미래에 대한 위협과 염려로 인해 정치에 관여했고, 중산층의 정당인 국가당을 설립했다. 이들은 당대 불어닥친 반유대주의를 적절하게 평가하지 못했고 사회적 차별이 정치논쟁으로 비화되는 것을 인식하지 못했다. 백년 이상 반유대주의는 서서히 모든 유럽의 국가들의 사회계층에 들어와 있었다. 사회의 특정 계급이 국가와의 갈등을 일으킬 때, 이러한 계급은 당대 국가를 옹호했던 유대인들을 적대했다.
18세기 유대인 해방이후 국가에 대한 결정적인 변화가 나타나고 이것은 로스차일드 가문에서도 볼 수가 있다. 이들은 다른 나라들의 유대인 은행가들과의 국제관계를 통해 더 이상 특정 개인 왕이나 정부에 봉사하려고 하지 않았다. 오히려 독일, 프랑스, 영국, 이탈리아 그리고 오스트리아에 재정적으로 관여했지만 또한 경쟁관계에 있었다.
이러한 전략에서 로스차일드는 유대인 해방과 형식적인 정치적 평등의 위험성을 보고있었다. 유럽의 개별국가에 속한 유대인 공동체의 통합으로 인해 이전 유대인 은행가들이 누리던 특권에 대한 위협을 직시했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가문의 창립자인 마이어 로스차일드는 유럽대륙에서 금융업과 제정 자문관으로 누리던 유대인의 신분이 더 이상 안전하지 않은 것을 알고 인터내셔날 네트워크로 발전 시켰다. 그의 다섯 아들의 금융기관은 유럽의 다섯 금융수도인 프랑크푸르트, 파리, 런던, 나폴리 그리고 비엔나에 있었는데 이러한 전략은 유대인 해방의 위험으로부터 탈출하는 시도로 볼 수 있다.
이들이 프랑크푸르트에 거주한 이유는 이 도시에 유대인들이 결코 추방당한 적이 없었으며 19세기에 이들은 도시인구의 거의 10퍼센트를 차지할 정도였다 (ibid., 26). 로스차일드 가문에 대한 아렌트의 분석에서 근대의 서구와 중부 유럽에서 반유대주의는 단순히 경제적이라기보다는 정치적 요소가 강했다.
독일과 반유대주의
반유대주의는 1807년 프러시아가 나폴레옹에게 패배하면서 정치구조가 바뀌면서 드러났다. 귀족들은 특권을 상실하고 중산층들은 자유를 획득했다. 나폴레옹에 의한 “위로부터의 혁명”에서 프로시아의 계몽군주의 독재에 기초된 봉건구조의 절반이 개혁이 되고 근대의 민족국가로 변형되기 시작되었다.
최종 단계는 1871 독일 제국의 형성으로 볼 수 있다. 당대 베를린에서 은행업자들은 대부분 유대인들이었지만, 프러시아의 개혁은 이들로부터 괄목할 만한 재정지원을 요구하지 않았다. 개혁은 모든 시민들의 새로운 평등을 기초로 유대인 해방을 옹호했고 군주제에서 누리던 이전의 유대인의 특권은 철폐되고 자유무역이 도입되었다 (ibid., 29).
1812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 기간 독일에서 유대인 해방령은 이후 프러시아 기독교 국가에서 반 유대주의 차별을 경험했다. 이것은 프러시아의 대왕 프리드리히 2세 (1740-1772)가 유대인들의 집단개종을 들었을 때 한 언급과는 다르다. "나는 이들이 그런 엄청난 악한 일을 하지 않을 것으로 바란다!” (ibid.,30) 대왕은 유대인 개종에 심한 우려를 표시했다. 유대인의 존재는 살아계신 하나님에대한 자연적 증거이기 때문이다
1871년 독일의 근대국가설립에서 비스마르크는 실제적인 창립자였고, 빌헬름 1세의 수상으로서 유대인들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했다. 오히려 80년대 비스마르크는 궁정설교자 스퇴커의 반유대주의 선동으로 인해 유대인들을 보호하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사실 초기 마르크스의 저작에서 당대 급진주의자들의 반유대주의적 태도를 보는 것은 어렵지가 않다. 마르크스 (1818-1883)는 유대인으로서 유대인들의 경제적 태도를 비판하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후 마르크스는 유대인 문제를 언급하지 않았다. 마르크스의 관심은 자본주의 생산과 소외 노동으로 인해 사회안에서 일어나는 계급투쟁의 현실에 있었고, 유대인들은 자본주의 경제질서에 깊은 관여가 없었고, 정치문제를 외면했다.
독일의 노동운동에 미친 마르크스의 영향은 반유대주의 정서를 드러내지도 않았으며ㅡ유대인들은 당대 이런 사회투쟁에서 중요하지도 않았다. 이런 점에서 아렌트는 마르크스를 반유대주의로 고발하는 것은 정당하지가 않다고 본다 (ibid., 34).
프리드리히 엥겔스는 당대 반유대주의 운동의 선봉장을 귀족계급에게서 보았고 이들은 부띠 브루즈와의 군중들과 코드를 맞추었다. 이것은 독일뿐 만 아니라 오스트리아와 프랑스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귀족계급은 반유대주의 운동에서 지유주의와의 투쟁이란 이름으로 보수적인 카톨릭 교회와 독일의 개신교와 제휴했다.
근대의 반유대주의가 19세기 후반에서 출현했다면 18 84-1914년 사이 “아프리카 분할정책”이 비스마르크 주도아래 베를린 컨프런스에서 기획되었고 범민족 운동이 출현했다. 1차 세계대전은 20세기의 출발을 알렸다. 이것은 유럽의 제국주의 시기이며, 전체주의 현상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며 등장했다. 이 시기는 부르주와지의 정치해방과 경제적 부상과 맞물려있고 연방국가의 지배로 특징된다. 식민지 국가에서 일어난 유럽중심적 사고와 인종주의는 엄청난 것이었다.
제국주의 팽창원리와 더불어 히틀러주의는 인종주의와 인터내셔날 차원에서 분석될 필요가 있다. 1921년 바이마르 정부의 외무상 발터 라텐나우는 독일의 리버럴 민주주의의 대변가였지만, 1917년 그는 여전히 유대인의 역사적 배경과 역할을 근거로 군주제적인 신념을 선언하기도 했다. 사실, 18세기 유럽의 정치에서 자코뱅의 혁명정부나 메트리니히의 중앙유럽의 반동정부나 비스마르크 정책에 한 가지 공통점은 이들은 힘의 균형을 유지했고 이웃국가들을 제거하는 전제권력을 독점하지 않았다. (ibid., 23)
전체주의 운동과 신체살해 정치학
독일연방 Politische Bildung은 시민교육과 민주주의 정치에 헌신한다. 최근 "어떻게 홀로코스트는 TV 방영 시리즈로 왔는가" (2019)에서 1979년 미국의 방영시리즈에 대한 토론을 소개한다. 대멸절을 의미하는 홀로코스트는 미국에서 유럽으로 소개된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학계는 대재난이란 쇼아로 표현하고 자신들이 번제물처럼 대멸절을 당하길 원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독일에서 지속적인 방영을 금지시키기위해 코블렌즈와 뮌스터의 신나치주의자들은 방송국에 협박을 하기도 했다. 독일 연방의 politische Bildung은 공개적으로 입장을 다음처럼 밝혔다. 수백만의 독일 시청자들은 홀로코스트 시리즈를 보면서 자신들의 어두운 역사의 챕터를 대면하고 도덕적인 용기와 비판적인 이해를 통해 기회로 받아들여야한다. 여기서부터 미래는 새로운 가능성으로 열린다.
미디어는 역사를 기술한다. 그러나 반유대주의와 살해정치는 두터운 기술을 요구한다. 아렌트의 해석은 이런 측면에서 중요성을 갖는다. 나치즘을 무소리니의 파시즘으로 구분짖는 것은 인종적 사고에 있다. 나치즘과 파시즘은 여러가지 면에서 유사하지만, 이탈리아 파시즘에서 인종증오나 아리안적인 우월주의도 나치즘에 비하면 별다른 중요성을 갖지 않는다.
무소리니는 엉토팽창과 해외정복에 관심했지만 이탈리아를 순수 인종국가로 정화하려고 하지 않았다. 1938년 무소리는 이탈리아인들이 아리안의 후예로 선언하고 반유대주의 법을 도입했지만, 유대인들을 노동수용소에 감금했지만 죽음의 공장으로 보내지 않았다.
그러나 전체주의 운동인 나치즘에서 인종살해법은 폭력적인 권력을 행사하며 모든 인간들은 여기에 복종해야한다. 실정법과 인권은 테러정치에 의해 전복되며 운동의 법이 자연의 법의 자리에 등장한다. 테러는 전체주의적으로 사회전반에 침투하고 국민의 의식에 내면화된다. "무법이 독재의 본질이라면, 테러는 전체주의 본질이다." (The Origins, 464)
로마시대의 호모 사케르(아감벤)는 나치즘과 스탈린체제에서 인종 이데올로기 즉 다윈의 생물학과 마르크스의 계급투쟁의 기묘한 결합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전체주의 운동은 스탈린의 당 관료 중심주의와 집단 농장화에서 대살해로 나타난다. 20세기 전체주의 운동에서 그 특징은 원자화되고 개인화된 대중의 조건에서 출현한다. 전체주의 모든 법은 인종대중 운동에 기초하며, 나치의 인종원리에는 다윈의 생물학적 사고가 깔려있다. 이것은 볼세비즘의 계급투쟁에서도 볼수 있다.
물론 마크스의 사적유물론과 다윈의 자연주의적 사고에는 근본적이 차이가 있다. 마르크스는 사회구성이론을 자연과학의 발전과 기술합리성에 근거해 생산력 과정에서 혁명을 보았고 변화된 사회구성과 계층분석은 두 계급이론을 넘어서는 유연한 사고를 보인다. 사회구성은 비판이론으로서 계급투쟁에 함몰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르크스는 다윈의 이론에 적극적인 관심을 가졌고 엥겔스는 마르크스의 업적를 "역사의 다윈"으로 불렀다. 다윈에게서 자연의 진보는 생존투쟁과 적자생존을 통해 역사의 영역으로 진입하며, 마찬가지로 마르크스의 계급투쟁은 역사의 추동력이다. 생산력은 인간의 노동력에 기초하며 이것은 자연적이며 생물학적인 능력을 말한다. 이러한 엥겔스의 진화론적 마르크스 해석에서 아렌트는 나치즘과 스탈린체제안에 공유하는 인종주의적 성격을 매우 날카롭게 주목한다. 이것은 신체정치학에 대한 아렌트의 통찰인데 비적합한 자들은 사회에 해로우며 국가의 소멸과 더불어 이들 또한 전체주의 지도자들의 손에 의해 소멸되어야 한다.
레닌은 내전이후 신경제정책 (NEP)에서 새로운 증산충의 출현을 묵인했고, 민족의식을 고취했다. 레닌은 마르크스주의적이 아니라 서구의 자본주의 방식을 도입하고 정치지도력을 발휘했다. 그러나 당관료제로 인해 레닌의 사회주의 정책--소비에트 시스템 플러스 전력화--은 전체주의로 나가지 않았다.
레닌의 사후 스탈린은 혁명독재를 전체주의 지배로 전환시키면서 당중앙 관료주의와 집단화 과정를 통해 인위적으로 원자화된 사회와 군중을 창출했다. 이러한 원자화된 사회는 독일의 역사적 상황에서 나치즘과 비슷하다. 또한 1930년 중산층의 농부들은 제거되었고 스탈린의 러시아 민족중심화는 이전 차르의 지배와 별로 다르지 않았다. 이 시기에 채택된 스타카노프 시스템은 노동자들간의 모든 연대와 계급의식을 부셔버리고, 잔인한 경제활동에 기초한 스타카노프 귀족제를 강화했다. 노동생산의 효율성을 빠른 시간에 증대하는 노동자들은 일반 노동자에 비해 혜택을 누렸다. 이러한 노동 생산성 증대과정은 1938년 완성되고, 러시아의 노동계급을 강요된 노동력으로 변형시켰다(ibid., 318-9). 이후 부농(쿨락)을 몰수하고 집단화 이주는 수 많은 농부들의 때 죽음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테러와 숙청작업으로 인해 스탈린체제는 원자화된 대중사회를 창출했다.
아렌트 테제의 역설
아렌트의 테제에 의하면, 전체주의 운동은 원자화되고 소외된 개인들의 대중조직에 기초한다 이것은 개인들에게 전체적이며, 무제한적이며, 변경될 수 없는 충성을 요구한다. 전체지배에 대한 사회심리학적 관점에서 볼 때, 이러한 충성심은 완전히 소외된 인간, 다시말해 가족이나 친구들 또는 동료들 심지어 친분관계에 있는 사람들에 대한 사회적 관계가 실종하는 데서 예견된다.(ibid., 323 -4)
이러한 사회 심리학적 기반에서 아렌트는 나치즘과 스탈린체제에서 드러나는 당에대한 충성심을 전체주의의 공통점으로 특징짖는다. 하인리히 히믈러는 나치 친위대의 구호를 다음처럼 표현했다: "나의 명예는 나의 충성심이다." (ibid., 324) 이러한 절대 충성심은 인종우월주의와 자도자주의에 기초하며, 군중선동정치와 테러로 조직화된다. 이것은 세계정복을 아리안주의화하기위해 전쟁으로 나타난다. 국가는 이러한 우월인정이 사는 삶의 공간이지, 무소리니처럼 이상적인 이념이 아니다. 열등인종은 제거되어야하며 독일인종은 다시 거듭나야한다.
여기서 근대성은 전면적으로 부인된다. 유럽의 근대에서 출현한 반유대주의가 파시즘에서 근대성과 부르주와 사회에 대한 거절로 나타나지만, 여전히 부즈주아 인종이론의 핵심인 사회진화론이 나치즘에서 작동되는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