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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미나 강의: 한나 아렌트 (2)

content6462 2026. 1. 9. 00:36

어거스틴의 <신의 도성>처럼 아렌트의 <전체주의 기원>은 유럽 후기 근대성의 대재난의 역사를 검토한다. 여기에는 제국주의와 반유대주의 그리고 전체주의가 이데올로기적 파라다임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아렌트는 리버럴 민주주의에서 토마스 홉즈의 <리바이어던>의 전통에서 칼 슈미트의 히틀러 전체주의 국가론으로 이어지는 소유 개인주의 (로크)와 파시즘정치를 강력히 비판했다.

 

그러나 아렌트는 칸트를 통한 루소의 의미를 재해석하고 어거스틴의 카리타스와 큐피디타스의 변증법을 정치이론화했다. 그녀는 로마의 리비도의 지배의 데카당스와 팍스 로마나를 20세기 파시즘의 허무주의에서 재발되는 것을 보았다. 아랜트의 정치이론에는 포스트콜로니얼의 조건을 반성하며 트랜스 모더니티의 차원을 재구성한다. 그녀에게 이론과 실천의 분리는 없다. 인간은 실천하려는 것을 사유한다.

 

아렌트와 어거스틴: 카리타스와 큐피디타스

 

아렌트에게 자유란 예견하지 못한 것을 새롭게 산출하는 능력이며, 활동은 자유의 실현을 말한다. 이것은 새로운 시작을 말하며 세계안에 진기함을 가져온다. 노동과 일과 행위는 출생성(natality)에 따라 판단되지만, 이중에서도 정치적 활동은 새로움을 창출해내는 가장 중요한 특징에 속한다. 인간이 태어났다는 것은 인간의 새로운 시작이며 창조적 가능성을 보여준다. 매 순간마다 우리는 활동을 통해 항상 예기치않는 새로운 것과 더불어 시작한다--Initium ut esset homo creatus est (Origins, 479).

 

이것은 아렌트가 어거스틴의 <신의 도성>에서 반성한 출생성과 자유의 개념을 세상에 대한 사랑 즉 카리타스 실천을 철학화한다. 어거스틴은 로마의 최초의 의지의 철학자로 아렌트에 의해 설정된다. 하나님의 영원성은 그리스도의 부할을 통해 현재로 흐르고 현재에서 신의 영원성은 나의 기억안에서 과거를 만난다.

 

이것은 어거스틴의 프로렙시스적 시간성 개념이다. 현재는 체험된 삶의 경험과 반성의 공간 (아남네시스)으로 사유된다. 여기서 아렌트는 어거스틴과 카리타스와 큐피디타스의 안티노미에 주목하고 어거스틴의 카리타스안에 에로스적 사랑에서 amor mundi를 발전시킨다 (Love and Saint Augustine, 41).

 

이 점에서 아렌트는 어거스틴이 카리타스 개념을 아가페가 아니라 amor mundi로 사용하는 것을 정확히 파악했다. 다시말해 어거스틴은 아가페와 카리타스를 구분하고 인간의 카리타스를 심지어 자신의 구원론의 사건과 과정의 틀에서 성화에 적용했다. 성화는 과정으로서 칭의사 건과 구분되지 않는다.

 

아렌트의 1928년 학위논문은 야스퍼스의 지도로 실존주의 영향을 보이지만 1960년 미국 수정판에서 실존주의 개념은 뒷전으로 밀려나고 오히려 어거스틴의 출생성과 다원성, 공동체와 악의 개념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그것은 어거스틴의 의지의 현상학다.

 

다시말해 appetitive 욕망과는 다른 큐피디타스 (세상의 욕망)가 인간의지에 어떻게 침전되며 이러한 하비투스가 선의 부재라는 악으로 일상의 삶에서 츌현한다. 큐피디타스는 인간을 시기와 오만에 가두고 죽음충동으로 몰아간다. 큐피디타스 담화는 아렌트의 전거의 틀에 속하며 정신 분석학적인 차원을 갖는다.

 

하이데거의 존재론이 파시즘에 순응한 것에 대한 깊은 실망을 보여준다. 아렌트의 하이데거 철학에 대한 세밀한 독해는 참담한 정도이다. <존재와 시간>에서 현존재가 양심의의 부름을 듣고 진정한 존재로 살아가는 그런 결단은 후기 <아낙시만더 단편, 1947>에서 모든 오류에 빠져버리는 현존재로 나타난다.

 

세계에 던져진 현존재는 이제 오류에 찬 현존재로서 존재의 진리를 아주 드물게 시적인 언어와 인간의 사유에서만 한 순간 드러내고 사라진다ㅡ하이데거의 허무주의에 가까운 염세주의가 나타난다. 진리의 역사는 없다. 존재질문과 존재망각을 넘어서기 위해 서구 형이상학의 전통을 해체시도한 하이데거는 더 이상 진리를 믿지 못하는 존재로 빠져버린다.

 

유대인 출신 한스 요나스의 경험 역시 비슷하다. 요나스는 <영지주의 종교>를 마르부르크 대학에서 하이데거와 루돌프 불트만의 지도로 박사학위를 맏쳤다. 그는 <영지주의 종교>에서 하이데거의 세계로 던져짐의 개념과 근대성에 대한 극단적 해체가 바로 영지주의 신화론에 기초한다고 해명했다.

 

아렌트의 미국 수정판 어거스틴의 카라타스 논문과 한스 요나스의 <영지주의 종교>는 고고학적 해명을 요구하며 하이데거와 불트만의 실존주의 철학이 얼마나 영지주의와 파시즘적 사고의 접합에 가까웠는 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오늘날도 대한민국의 유트브의 공론장을 수 놓는 사람들 가운데 여전히 영지주의와 피시즘을 어떻게 존재론이라는 이름으로 교묘하게 민족 쇼비니즘으로 선동하는 지 보게 된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아렌트의 생활세계론에서 공간적인 의미는 시민들의 다수성과 상호작용 그리고 소통행위를 통해 공론장에서 현상형식으로 파악되며, 이러한 실천개념은 아리스토텔레스보다는 마르크스의 비판적-혁명적인 활동에 가깝다. 마르크스는 아렌트의 실천개념과 출생성 그리고 자유의 틀에서 재구성된다.

 

마르크스는 실천하는 인간을 자연과의 노동에서 일면적으로 파악하고 경제적 영역에서 소외된 노동을 해방 시키기위한 칸트의 정언명법을 혁명적 실천으로 개념화한다. 노동소외를 경험하는 노동계급이 프로렐타리아트 이념형으로 만들어지고 혁명주체로 등장한다. 그러나 아렌트는 시민사회안에서 실천개념을 시민의 정치주체로 확대시킨다.

 

다른 한편 생활세계의 시간적인 의미는 인간의 출생성에 기초하며 이것은 새로운 시작의 가능성을 의미하고, 예기치 않은 것들의 산출될 수가 있다. 개인과 그룹간의 상호작용 안에서 생활세계는 공간적인 영역 (공론장)과 역사적 시간(출생성) 안에 설정되고 사회화가된다. 이런 점에서 아렌트는 역사를 계급투쟁과 사간의 단선적인 발전을 통해 나가는 스탈린의 기계론적 삼단계 사적유물론을 거절하고 로자 룩셈부르크의 정치이론을 수용한다.

 

생활세계의 실천지평

 

이런 점에서 아렌트의 정치이론은 실천개념을 통해 생활세계의 사회학에 대한 통찰을 열어준다. 정치영역안에서 평등과 정당성이 기원을 갖는다. 그러나 사회적 영역에서 차별이 존재하는데, 이러한 차별은 공공교육에서 인종의 구분을 포함한다. 이러한 인종구분은 사회적 권리에 속하며, 이것은 결사의 자유에 기초하며, 평등은 오로지 정치적 권리에 속한다. (Arendt, “Reflections on Little Rock.” 50-51)

 

이러한 아렌트의 구분은 인종차별적 담론이라기보다는 사회문화적 관습에 기인하며, 그녀의 활동적인 삶의 카테고리에 기초된다. 이것은 당대 생물학적인 삶의 권리를 추구하는 블랙파워 운동과는 다른 방향을 지적한다. 물론 아렌트는 식민지화된 인종의 저항을 간과하지 않았지만 정치영역에서 힘과 폭력을 구분하고 비폭력의 차원을 지지했다. 폭력이 일상화되거나 정당성울 획득할 때 불랙 파우어 운동에서 필연적 흑백중오와 국가안에서 시민사회의 역동성은 실종된다.

 

내가 보기에 사회적인 것의 출현에서 자본주의 질서가 이러한 구분을 위협 한다면, 생활세계의 지평은 이러한 자본주의의 획일화에 저항한다. 학교교육의 현장에서 소통과 배움은 새로운 문화와 정치실천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영역이 된다. 이런 점에서 아렌트의 인종구분을 사회적인 권리나 문화적인 관습이 아니라 생활세계의 차원에서 다원성과 다름에 대한 인정으로 파악될 필요가 있다.

 

정치적 영역에서 소통과 토론을 기초로 민주주의적인 정당성과 시민의 정치적인 힘을 추구하는 것은 원칙적으로 자유에 속하며, 비강압적이며 폭력과는 상관이 없다. 그러나 사회적 영역에서 지배질서나 억압에 대한 저항에서 폭력은 상황적으로 그리고 상대적으로 나타나지만, 일반화될 수는 없다. 아렌트에게서 정부와 법과 질서는 시민의 힘에 근거한 정치적인 구현이며, 시민들이 이러한 정치적 제도나 질서를 지지하지 않을 때 경화되고 부식될 수 밖에 없다. (“On Violence,” 40-1)

 

아렌트의 그리스의 도시국가의 모델은 정치영역에서 국가의 강압적 힘을 입법의 질서나 군사적 폭력에서 배제한다. 정치영역에서 자유와 힘을 부각시키는 아렌트의 입장은 벤야민과는 다르다. 벤야민에게 정치적 제도나 법적 질서는 위로부터 오는 폭력의 영역에 속한다. 이러한 위로부터의 헤게모니와 폭력에 메시야 정치는 지금 여기서 틈새를 열고 들어온다.

 

아렌트와 벤야민: 니체

 

벤야민은 <역사철학 테제>에서 니체의 계보학과 유효한 역사를 고려한다. 니체의 <시기에 맞지않는 성찰>에 수록된 <생을 위한 역사의 유용성과 남용>을 벤야민은 희생자들의 삶을 회복하려고 한다. 보편 진보역사는 정지되어야 하고 과거에 진보란 이름으로 희생자들 자들의 역사를 지금시간(Jetztzeit)에서 기억의 위험성에서 불러낸다. 아렌트는 벤야민의 로자 룩셈부르크 해석에 많은 부분에서 같이 가지만, 니체에 대한 이해에서 갈라진다.

 

니체와 하이데거는 근대성의 복잡성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근대성의 진보와 식민지 사회진화론에 저항하는 트랜스 모더니티 전통이 있다. 니체는 고대 그리스의 비극의 전통으로 퇴행했다.

 

아렌트 역시 <정신의 삶>에서 벤야민이 언급한 동일한 니체의 텍스트를 검토한다. 니체에 의하면 역사적 감수성의 결여는 모든 철학의 본래적인 오류임을 말한다. 우리는 속지 말아야 한다. 시간은 진보한다. 모든 것이 시간과 더불어 진보한다고 착각한다. 그러나 인류는 진보하지 않는다. 인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은 니체의 허무주의에 대한 사고실험이다 (The Life of Mind, 259-60).

 

아렌트가 주목하는 것은 니체가 의지를 쇼펜하우어의 의지개념 (삶의 충동과 집착과 투쟁)과 달리 명령으로 보는데 있다. 의지는 명령하는 사유이다. 명령의지는 남을 지배하는 것으로 나타나는데, 명령과 복종은 마음 안에서 일어난다.

 

<선악을 넘어서>19절에서 니체는 의지를 명령과 복종으로 규정한다. 명령을 하는 의지의 자유는 복종하는 의지에 대해 우위성을 갖는다. 명령/복종의 의지의 이중성에서 니체는 주체의 느낌에 우위성을 부여했다. "나는 할 수있다"ㅡ이것은 쾌락을 동반하며 의지자체안에 있다. 이것은 수행을 통해서 오는 일에대한 쾌락과는 다르다 (ibid , 161).

 

니체에게 노예의 원한감정이 없이는 명령하는 의지는 자신의 힘을 알 수가 없다. 의지의 자유는 명령하는 의지자에게 쾌락을 주는 조건이다. 명령을 집행함으로써 그는 저항하는 자에 대한 승리감을 누린다. 여기서 의지는 승리감을 누리는 명령의 '나'와 또한 명령에 저항하는 '나' 가 의지의 힘의 근원이 된다. 쾌락과 불만족이 의지를 다루는 주요원리가 된다.

 

의지의 모든 행동 (의지의 지향성)에는 느낌의 다수성이 있으며 그리고 사유가 나온다. 의지의 지향성에 명령하는 사고가 있으며 사고는 의지의 모든 행동과 구분되지 않는다. 명령의 감정이 나타난다. 의지의 자유는 복종하는 자에 대해 우월성을 느끼는 감정이다. 나는 자유롭고 그는 복종한다. 의식은 의지안에 놓여있다. 모든의지의 지향성은 힘 (명령)을 대상으로 가지며, 우리 모두는 명령과 복종이라는 의지의 지향성을 갖는다. 의지는 명령하는데서 힘의 느낌에서 증강을 향유한다. L'effect, c'est1 moi.

 

여기서 니체는 고대철학의 쾌락주의를 쫒아간다. 즐거움은 필요와 욕망과 무관하며, 또한 쾌락은 살아있는 몸의 감각적 욕망이 된다. 즐거움은 고통과 욕망에서 자유로울 때 경험될 수있다. 이러한 주이상스는 디오니소스 원리에서 넘쳐나는 충만함이다. 디오니소스의 원리는 생의 충만함을 말하지만 감각적 욕망과 집착에서 파괴로 나간다. 생에대한 무조건적 긍정은 최고의 가치로 고양되며, 여기에 따라 모든 다른 것들이 평가된다.

 

이것은 니체의 의지-영원성이며, 영원회귀안에서 살아가는 초인을 만들어낸다. 영원회귀는 모든 생성과 변화의 과정의 덧없음과 죄없음 그리고 책임과 죄책으로 부터의 자유를 선포한다. 우리는 세상에 던져진 존재들이다 (하이데거). 도덕적 사실은 존재하지 않는다. 기독교의 도덕적 세계관은 생성의 죄없음에 침해하고 죄와 처벌로 전염시켰다.

 

기독교 비판을 통해 니체는 과거로 퇴행하지 않고 미래의 신화로 나간다. 바다가 물결을 즐기듯이 인간의 의지는 의지라는 것 자체를 즐긴다. 그러나 니체에게 의지와 물결은 동일하다. 현상의 세계는 내적인 의지의 경험에 대한 단순한 상징이 된다. 의지하는 나와 현상계의 구별은 붕괴된다. 물질, 원자 눙력, 압박 그리고 스트레스는 물자체가 아니라 심리적 픽션에 의한 해석에 불과하다.

 

여기서 아렌트는 <권력에 의지>는 "의지와 물결"로 교정되어야 한다고 본다. 니체의 영원회귀는 사유실험이며, 의지개념과 대립되지만 생이 출생을 가능하게 한다. 생의 영원회귀에서 안과율은 없으며 아렌트는 니체를 데이비드 흄의 제자로 본다.

 

인과율은 문화적 습관과 많은 다른 변경에 의해 만을어 진 것이다. 그러나 나-의지의 경험은 효과를 산출하며, 인간은 행동하기 전에 산출하는 대행자이다. 아무 것도 의미를 갖지 않는다. 모든 의미는 의도성에 있으며 의도성이 없으면 의미도 없다. 의지는 뒤로 갈 수 없으며 시간의 수레바퀴를 멈출 수가 없다 (ibid , 164).

 

이러한 의지의 무능함에서 모든 인간의 악ㅡ보복과 원한과 처벌 ㅡ이 나타난다. 인간의 정의는 의지의 무능함으로 인해 타자를 처볼하고 지배하는 권력욕망이다. 아렌트는 <도덕의 계보학>에 의지의 무능을 첨부한다. 이러한 의지의 무능함으로 인해 니체는 뒤를 돌아보고 기억하고 생각하길 원한다. 미래를 향한 의지를 거절함으로써 인간은 책임성에서 해방된다. 의지와 과거의 충돌에서 니체는 영원회귀를 사고실험으로 시도한다.

 

"힘에의 의지"는 불필요하다. 의지는 의지함으로써 힘을 산출한다. 겸손의 의지나 지배의지는 힘의 차원에서 다를 바가 없다. 의지자체가 이미 가능성의 행동이다. 의지의 진정한 목표는 주어진 세계를 초월하고 생의 충만함에 있다. 의지의 자유는 생자체의 충만함에 상응하는 강함에 대한 잉여의 느낌이다.

 

비로소 삶의 모든 것은 힘에의 의지로 이해된다. 생이있는 곳에 의지가 있다. 이것은 생의 의지가 아니라 힘에의 의지이다. 생의 충만함으로 인해 자기극복은 가능해지며 이러한 활동성은 창조성이며 보복욕망을 극복한다.

 

이러한 생의 충만함으로 인해 의지는 과거와 현재룰 넘어서서 미래를 개방한다. 초인은 자기를 초월하고 극복할 수 있는 존재이다. 모든 과거의 것을 "나는 그것을 원했다"로 재창조하는 것ㅡ이것을 니체는 구원으로 부른다. 내가 생의 충만한 진정한 세계를 선악을 통해 판단하는 순간 허무주의가 된다. 허무주의를 극복하기위해 가치를 전도하고 현상계를 유일한 세계로 보는 것을 거절해야한다. 세계와 인간을 변혁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와 인간은 평가하는 방식과 가치를 전도5시킨다.

 

일차 원인이 제거 된다면 인간은 되돌아갈 원인이 없다. 인과율이 제거 된다면 시간의 구조와 계열도 의미가 없다. 모든 것은 사라진다. 모든 과거를 삼켜버리는 시간으로부터의 해방은 다음을 확인한다: 사라진 것은 회귀한다. 되어감은 궁극적 상태를 목표로 하지 않는다. 되어감은 단지 현상의 상태가 아니다. 존재자들의 세계가 단순한 현상이다. 되어감은 매 순간 동일한 가치를 갖는다.

 

모든 것은 사라지며, 시간의 법 (크로노스)은 자신의 자녀둘을 잡아 먹는다. 이것이 정의다. 모든 과거들은 단편이며 의지는 해방자이다. 왜냐하면 내가 그렇게 의지했고 현재도 의지하며 앞으로도 의지하기 때문이다. 힘에의 의지는 시간과의 화해보더 더 고결하다.

 

세계의 모든 가치는 평가될 수가 없다ㅡ헤라클레이토스의 생성의 변증법이 니체의 중심원리로 작동한다. 원인과 결과가 없다면 의지도 거절된다. 초인은 생성의 과정에서 모든 오류와 이분법을 극복하고 이러한 동요로 부터 구원된 사람이다. 남겨진 것은 존재하는 모든 것들을 축복하고 긍정을 말하는 것이다 (ibid., 171-2).

 

니체는 과거에 대해 의지의 무력함을 말하지만 현재의 구원 의미를 언급한다. <짜라투스트라> pt. 2. "구원에 관하여"에서 매우 중요한 내용을 제시한다. 불구자들이 짜라투스트라를 찾아와서 자신들의 질병을 고치주면 믿겠다고 말한다. 그러나 눈먼 자를 고치면 그는 세상의 너무도 나쁜 것들을 보고 치료해준 사람을 저주할 것이다. 짜라투스트라는 너무나 많은 것을 결여하고 하나만 지나치게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전도된 불구자로 부른다. 이들은 눈의 탐욕과 남을 함담하는 커다란 입과 모든 것을 배속에 삼켜버리는 큐파디타스로 인해 많은 것을 갖지 못한다. 니체의 구원은 큐파디타스에 빠져있는 불구자들을 구원하는 휴머니즘 전통에 서 있다.

 

그러나 니체의 <권력에의 의지>862-3절은 하이데거에 의해 "파시즘"적 인종주의자로 공격 당했다. 니체는 말한다. "강자는 강화되며 이 세상에서 기진맥진 한 자들은 무력해지고 파멸하는 것이다. ...<강한 인간과 약한 인간의 개념>이라는 개념은 강한 인간의 경우에는 많은 힘이 유전되어있다데 환원된다...인간의 경우에는 그 유전이 부족한 것이다."

 

보다 좋은 인간유형으로 교배시킨다는 니체의 생각은 우생학적 교배와 연약한 자들의 절멸이라는 파시즘의 인종정책과 사회 진화론의 우생학적 백인 우월주의로 귀결된다. 이렌트는 하이데거의 비판을 피해간다.

 

아렌트와 아히이만

 

아렌트는 투키디데스를 인용하면서 정치적인 것은 비폭력적이라 한다고 말한다. 이러한 경계를 넘어설 때, 강자는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을 하지만, 약자는 감내해야만하는 것으로 인해 고통당한다. (On Revolution, 12) 그녀의 시온주의 입장 역시 이스라엘 국가설립보다는 아랍과의 협력을 기초로 모든 테러리스트 그룹들의 제거를 요구한다. 로컬 자치정부와 유대인과 아랍의 공동 시의회와 지방 협의체들이 필요하다. (The Portable Hannah Arendt, xvi)

 

그러나 아렌트가 나치 친위대 중령 아히이만을 악의 진부함 내지 평범성으로 파악하고 전체주의에의해 길들여진 관료로 분석한 것은 여전히 문제로 남는다. 어거스틴에게서 악은 선의 부재로 나타나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자기애와 탐심이다. 자기애와 집착은 칸트의 급진적인 악과 먼거리에 있지 않다. 아이히만의 범죄행위에는 사고능력의 상실이나 또는 국법과 명령체제에 따른 공무원이 아니라, 전체주의적 사고의 교만과 유대인 살해에 대한 정당성과 신념이 존재한다. 그는 자기세계에 갇혀 전혀 헤어나오지 못하는 전형적인 주인담화를 말하는 homo incurvatus in se로 분석된다.

 

<악의 평범성>은 아렌트가 칸트의 도덕적 틀에서 어거스틴의 큐피디타스 개념을 통해 현상학적 심리학으로 분석한 것이다. 아렌트가 주목한 것은 아히이만의 히툴러에 대한 진술이다. 히틀러의 오류에도 불구하고 한가지 분명한 것은 하틀러는 사회전반에 걸쳐 카리스마적으로 자신의 지도력을 책임적으로 수행했다. 그의 성공적 지도력에 나는 복종해야만 했다 (Eichmann in Jerusalem, 126).

 

칸트의 초자아의 양심은 아히이만이 히틀러의 카라스마지배와 동일시되고, 문화의 침전과 하비투스를 통해 나르시즘이 지배하는 상징계 (라캉)에서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다. 이히이만의 큐피디타스는 정치이념과 물질적인 이익 그리고 권력의 네트워크 안에서 이데올로기 정당성을갖는다. 인식/오인의 안티노미가 걷히고 하나가 되는 동일성의 판타지가 나타난다. 평범한 인간도 파시즘 체제안에서 길들여지고 인지장애와 나르시즘에 갇힐때 아이히만의 운명을 답습한다. 인간은 자기애를 향해 구부러진 존재이다.

 

니체적인 의미에서 구원은 유대인 희생자들이 원한과 보복을 넘어서서 과거의 트라우마가 살아있는 사람을 유령처럼 따라다니고 희생자들의 유효한 역사가 권력욕망에 의해 상품처럼 남용이 돠서는 안된다. 파시즘의 유령은 이스라엘 안에서도 나타날 수 있다. 인간은 꾾임없는 자기 극복의 존재다.

 

1964년 게하르트 숄렘은 아렌트에게 보낸 편지에서 아렌트가 "유대백성의 딸의 입장에서" 아이히만을 보지 못했다고 비판했다. 그러나 아렌트의 답변에서 자신의 사유를 미리 결정하는 유대 민족성은 중요하지 않다고 답변했다 (The Portable Hannah Arendt, 3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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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성과 문화의 침전으로 부터의 해방은 카리타스를 향한 선한 열망에서 비로소 출생성과 자유의 선물의 의미가 나타난다. 유대인 민족안에도 언제든지 큐파디타스와 이데올로기 판타지가 작동될 수 있다. 악은 진부하게 출현하지만 그것은 급잔성에 뿌리를 두고있다. 아렌트를 향한 모든 비판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사회 심리학적 분석은 여전히 중요한 통찰을 담고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