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학적 도전: 언어게임
비트겐슈타인의 미학이론에서 아름다움의 단어는 미의 본질이나 이데아를 포함하지 않는다. 실존주의 미학에서 존재가 본질에 선행하지만, 예술의 미학적 경험은 미의 본질에 선행하지 않는다. 비트겐슈타인에게 실존주의적 지름길은 없다. "미학적 질문은 심리학적 실험과는 상관이 없다." (Wittgenstein. Culture and Conversations, II. 36).
언어상자 안에는 다양한 단어의 도구들이 있다. 이러한 다른 기능들의 결합은 놀이를 하는 언어게임처럼 나타나며, 미학은 아름다움에 대한 언어적인 사용과 단어들의 연관기능에 주목한다(ibid., I.4). 이것은 미학에서 태도변경을 말한다.
아름다운 대상에 대한 지각이나 경험과 상상력은 이제 언어활동의 네트워크에서 의미구성과 진리사건으로 나타난다. 어떤 복잡성의 관계와 담론적인 전거체계에서 아름다움의 단어가 파악되는가? 단어들은 미학의 규칙을 준수하면서 아름다움의 의미를 구성하고 예술적 삶의 형식을 산출한다.
이 지점에서 나는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표상으로 세계에 공명하는 비트겐슈타인을 본다. 나의 모든 지식은 이 세계에 대한 직관 다시말해 표상에 관련된다. 세계는 '나"의 세계다. 나의 세계는 나의 의지다. 세계의 외부에 존재하는 물자체는 의지와 표상의 세계와 등치된다. 충분한 이성의 원리를 통해 경험적인 표상의 세계는 인과율의 네트워크에 엮어지고 지각을 통해 이해된다. 나의 모든 표상의 세계는 다른 사람들의 표상의 세계에 연결되어있다. 물자체 같은 일차원인(causa sui)은 없다.
비트겐슈타인은 <철학논고>에서 주체는 세계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의 한계로 말한다. 내가 책을써서 세계를 발견했다고 말할 수 없다. 나의 시력으로 나의 눈을 볼 수 없다. 철학에서 우리는 비심리학적인 '나'를 말할 수 있다. 철학에서 세계는 나의 세계이다 (5.641). 비트겐슈타인에게 인과율은 네트워크이며(6.36), 쇼펜하우어의 충분한 이성원리처럼 세상을 파악한다.
비트겐슈타인에게 칸트의 물자체는 없다. 지각되는 표상의 세계는 언어적으로 의미와 진리가 구성된다. 쇼펜하우어의 미학적 지각은 예술작품에서 미의 이념형에 주목한다. 비트겐슈타인은 보다 큰 전거의 틀에서 한 예술가의 작품을 다른 예술작품들과 비교하거나 또한 다른 예술가의 작품들과 병립시켜 본다.
중세기의 케임브리지에서 미학과 20세기 뉴옥의 갤러리에서 미학적 취향과 판단은 달라질 수 밖에 없다. 시대의 에피스테메가 전거시스템으로 작동하며 예술적 취향과 규칙을 부여하며, 예술작품에 대한 시대의 미학적인 감정과 취미와 판단에 영향을 미친다 (Ibid., I. 8).
시를 읽을때 나는 시의 리듬과 구조에 시인하는 제스처나 얼굴의 표정을 할 수가 있다. 그러나 내가 시의 의미를 전적으로 다르게 읽을 때 시자체에서 표현되는 아름답다는 형용사는 별다른 역할을 하지 않는다. 미학은 나의 삶의 자리에서 재구성되는 차원을 갖는다 (Ibid., I. 12). 미학의 텍스트 (문학작품이나 시)는 해석학적이지만 언어게임의 차원에서 문제틀이 되고 담론화되면서 재구성된다.
현상학적으로 볼때 시인은 시를 쓰면서 미학적 지향성을 표현한다. 시적 지향성은 시작품 안에서 의미와 자신의 생활세계의 존재를 표현한다. 화가는 화폭에 자신의 지향성을 담고 화폭의 대상들과 자신의 관계성을 표현한다. 이미 존재는 예술작품에 담져져 있고 이러한 미학적 존재는 침묵되는 것이 아니라 시를 읽거나 그림을 보는 사람에 의해 재구성되면서 언어놀이에서 예술적 삶의 실천과 형식으로 전개된다.
이러한 미학적 태도와 삶의 방식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비극의 플롯구성에서 작가의 상상력에서 나타나는 재구성과 창조성에서도 볼 수 있다. 비극작가의 지향성은 독자에게 말을 걸고 영감을 주며 삶의 비극을 경험하게 한다. 그리고 관객이나 평론가는 작품을 만나면서 카타르시스를 체험하고 자기실현을 향해 두 세계의 지평을 열어간다. 비극은 나를 운명이나 비극의 삶으로 내모는 것이 아니라 절제와 중용의 미덕을 가르친다.
비트겐슈타인의 미학의 언어게임은 흑인이나 백인의 다양한 교육수준과 경제적 신분에 따라 예술적 삶의 형식을 사정하고 선택하고 평가한다. 여기서 미학의 비판적 반응 (불만족)은 서로 다르게 나타난다 (Ibid., I. 28). 백인의 예술적 세계가 흑인의 미학에 규준이 되지 않는다. 예속된 자들의 눈에서 그리스도는 전혀 다르게 보인다 (폴 고갱의 황색의 그리스도). 그림의 네러티브는 사회의 불의와 폭력을 비판한다 (피카소의 게르니카).
다양한 문화적 취향이 예술의 세계에 존재하며 이미 물질적 이해와 권력관계가 깔려있다. 평론가는 문화적 취향과 예술작품에 대해 비판적 사정과 선택 그리고 평가의 과정에서 작품의 의미를 재구성한다. 예술작품은 예술의 세계에서 다양한 규칙들을 준수하면서 작품을 만들며 의미를 획득한다.
의미획득을 넘어서서 예술작품의 지향성 (진리내용)은 의미와 진리사건으로 나의 경험을 각성하며 새로운 존재로 변형시킨다. 그러나 이러한 예술작품안에 내재한 떨림의 경험은 비트겐슈타인에게서 충분히 고려되지 않는다 (Ibid., I. 23). 두려움과 떨림의 경험은 종교의 세계로 이전된다.
비트겐슈타인은 미학적 담론을 복잡성의 그물망에 설정하고 미학적 실천을 문화의 콘텍스트에서 구현한다. 문화적 취향을 기초로 문화에 연관된 미학의 언어게임은 두텁게 기술되어야한다. 비트겐슈타인의 미학적 언어게임은 어거스틴의 아름다움의 경험을 보다 큰 전거의 틀에 설정하도록 도울 수 있다.
어거스틴과 마찬가지로 비트겐슈타인 역시 감각의 보고 듣는 차원에 연관된 상상력의 중요성을 경험의 중심으로 놓았다. 아름다움의 이해에서 나는 삶의 궁극적 삶의 가치와 의미로 안내되며 공감과 연민을 기초로 선한 삶으로 인도된다. 윤리는 미학의 본질적 부분에 속한다. 또한 미학적 경험은 언어의 놀이와 할동안에서 아름다움에 대한 감탄사로 나타난다 (Ibid., I. 5).
"언어게임에 속한 것은 문화전반이다." (Ibid., 26) 문화는 언어적인 다양한 활동과 규칙을 쫒아 나타나는 삶의 형식의 총계를 의미한다. 이것은 문화ㅡ언어적 모델을 말하는데 여기서 전거시스템 즉 문화적 에피스테메가 아름다움의 의미를 산출하는 근원이 된다. 이것은 문화의 에피스테메에 기초한 시스템 미학이론을 말한다.
비트겐슈타인의 반란
<철학적 탐구>에서 비트겐슈타인은 어거스틴의 언어 기호론을 비판하면서 시작한다. 어거스틴은 <고백록>에서 언어습득에서 사람들이 이름을 사물에 부치는 것을 말한다. 이름부여는 언어의 토대이며, 목적이다 (<탐구>, 56). 여기서 모든 단어는 상응하는 의미를 가지며, 단어는 대변하는 것과 상호관계를 이룬다. 이것은 철학적인 그림언어이며, 단어의 기호가 의미와 개념을 만들어낸다.
30년대 초기 비트겐슈타인은 어거스틴과 철학적인 그림(상응)언어에 매료되어 있었다. 가리키는 손가락은 그림 즉 의미를 만들어낸다. 그러나 <탐구>에서 비트겐슈타인은 반란을 일으킨다. 그렇다고 해서 비트겐슈타인이 유아기에서 제스처를 통해 언어습득을 거절하는 것은 아니다.
언어사용은 다른 상황에서 볼 때 피아노를 가르치는 것처럼 습득되는 것이 아니다 (<탐구>, 54). 언어학습과는 달리 언어사용과 실천은 마치 건축가가 집을 지을 때 조력자에게 명령을 하고 복종하는 것과 같다.
비트겐슈타인은 일상적인 언어사용에 엮어진 단어의 문법과 기능과 놀이를 검토한다. 그는 일상적의 용례에서 단어의 의미를 추구한다. 언어는 존재의 집처럼 인간의 삶을 가두어 버리는 쇠창살과 같은 것이 아니라 여전히 한계를 갖는다 (Wittgenstein and the Vienna Circle, 117).
그것은 삶의 문법에서 의미가 결정되는 특수한 성격을 가지며 여기서 언어는 살아간다. 살아있는 언어는 일반화하고 추상적인 죽은 언어 (문법이 없는 거대담론과 선동체계)에 대립한다.
언어는 인간의 삶에서 공적활동, 예를들면 명령, 지시, 인사, 질의 등과 분리되지 않는다. 인간은 이러한 활동에 참여하면서 언어를 배운다. 이것은 단어의 형식 (기호)과 삶의 형식 (실천)을 문법의 의미론에 포함한다. 비트겐슈타인의 언어철학은 공적으로 소통되는 언어와 담론의 활동과 실천행위를 부각시킨다.
언어의 살아있음을 개별적인 삶의 규칙과 놀이에서 찾는다. 농구게임과 바둑놀이나 야구게임이나 서커스놀이나 연극 드라마 등 모든 것을 게임이나 놀이라는 하나의 본질적인 개념이념으로 환원하는 것은 병리현상을 가져온다. 개별놀이의 특수성과 다름을 파괴하는 거대 선동담론은 사회적 삶의 형식을 파괴한다. 모든 위험과 부패는 일반화나 거대담론 체계에 숙주처럼 기생한다.
예를들면 국회의원은 국민을 대표 한다고 입버릇처럼 말한다. 국민을 대표한다는 말은 어떤 사회적 맥락에서 사용되는가? 국민은 시민의 삶에 기초되며, 시민은 정치주체가 된다. 이러한 시민의 삶은 정치의 문법이며 국회의원이 대변하는 것이 아니라, 그는 이러한 문법을 준수해야한다.
국회의원이 정치사회의 문법에 의해 움직이지 않고, 국민을 거대선동 담론으로 일반화하고 정치당략에 의해 선동 언어가 사용될 때, 권력의 쇠창살에 갇혀버린 정치 귀족들의 민낯이 드러난다.
철학은 탐구의 과정이며 비트겐슈타인은 언어를 --많은 구역을 가지고 있는--오래된 도시에 비교한다. 만일 종교가 언어의 도시에서 자신의 구역을 갖는다면, <논리-철학 논고>에서 그것은 신비한 것이며 말할 수가 없다.
그러나 <탐구>에서 종교가 언어의 도시로 들어온다면 그것은 예배에서 나타나는 예전이나 고백이나 기도와 감사로 나타난다. 아니면 바른 교리와 삶을 가르치는 문법으로 표현될 것이다.
언어사건과 삶의 실천
흔히 비트겐슈타인은 플라톤의 흉상의 목을 잘랐다고 말해진다. 아니 플라톤 정도가 아니라 병든 언어를 사용하는 인문학이나 종교나 철학의 목을 내리쳤다. 플라톤의 가장 취약점은 언어철학에 있고 이데아의 세계를 신화론적인 측면에서 알레고리로 파악한데있다.
과연, 비트겐슈타인의 언어의 문법과 삶의 형식은 어거스틴의 기호학과 신학의 목을 내려쳤는가? <고백록>에서 언어는 기호이며 대상을 표현하지만, 소통과 논쟁을 통해 사회적인 맥락에서 의미를 구현한다. 어거스틴의 기호학은 대화와 소통 그리고 논쟁의 사회적 성격안에 있으며, 인간은 소통하는 말의 기호를 통해 사회적 의미의 세계로 들어간다 (1.8).
유아기의 언어 기호학에는 이미 부모나 주변의 사람들의 삶의 형식과 의미부여를 담고있다. 사회화 과정을 통해 인간은 일상의 세계에서 소통과 논쟁과 사회적 담론을 통해 언어를 비판적으로 반성하고 공적의미를 만들어간다. 언어는 습득되기 전 이미 주어진 부모의 삶의 세계로부터 온다.
어거스틴의 탁월한 수사학은 언어의 종교적 의미와 문화구성과 진리의 성격을 갖는다. 언어를 통해 기억의 이성(아남네시스)은 타자와 다름을 인정하는 존재가 되며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실천으로 펼쳐진다. 성서의 문법과 네러티브는 다양한 삶의 형식들(창조, 하나님의 인격적 행동, 마니교와의 논쟁, 미학적 경험, 동료들과의 친교, 세속도시의 정치비판 등)에서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고 일상의 세계와 소통한다.
이러한 어거스틴의 수사학은 비트겐슈타인의 언어게임과 삶의 형식에 멀리 있지 않다. 언어를 배운다는 것은 인간의 생활세계로 들어가는 것이며, 이름을 부르고 회의에서 보고하며, 선택을 하며, 수를 계산하고 길이를 측정하며 시간을 말하는 등의 네트워크에 엮어진다.
언어게임은 다양한 삶의 형식에서 문법과 규칙을 준수하면서 상황과 맥락에 따라 의미와 진리를 산출한다. 단어의 의미는 각각의 다른 영역들에서 행해지는 언어의 사용과 놀이 그리고 규칙준수와 문법에서 결정된다 (<탐구> sec. 23b. 43).
언어게임은 규칙에 의해 의미가 규정된다. 단어는 자체상 본질적인 의미를 갖는 것이 아니라 사용되는 콘텍스트에서 마치 가족 구성원들이 비슷한 것처럼 파악된다. 개별적인 삶의 형식은 다른 삶의 형식과 비교할 때 불가공약성과 유사성이 나타난다. 언어는 다양한 삶의 형식들을 만들어내지만, 모든 삶의 형식들을 하나로 아우르는 보편적인 거대담론은 없다.
예를 들면 뉴턴의 수학의 언어는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언어와 불가 공약성이 존재한다. 그러나 뉴턴의 담론과 적용되는 삶의 형식이 제거되는 것은 아니다. 과학 공동체의 파라다임은 개별 리서치 프로그램의 콘텍스트와 규칙 그리고 언어사용에 영향을 미친다. 과학에 대한 문화적 구성은 개별 리서치 프로그램의 합리성을 약화시키지 않고 생활세계처럼 인식론적 배경을 구성한다.
언어의 공적사용은 사회문화적 실재를 구성한다. 다양한 생활세계에 속하는 유럽의 문화나 라틴 아메리카 그리고 아시아와 아프리카 등에서 종교나 지식체계나 문화적 표현 등은 서로 다르게 나타난다.
이러한 문화적 상대주의를 조야한 도덕적 관점주의 (니체)나 카발라 신비주의나 영지주의적 해체(데리다)로부터 방어하는 것은 생활세계의 일반구조이다. 물론 니체는 데리다와는 달리 고결한 초인의 윤리를 가지고 있다.
언어의 공적놀이와 활동에서 이미 전거체계 (문화의 에피스테메)는 의미와 도덕의 근원으로 작용한다. 언어게임은 어거스틴적으로 표현하면 말씀의 인격성을 통해 의미사건으로 드러나며, 회심과 통회와 기쁨의 감정으로 넘치는 각성 즉 전인적 카타르시스를 동반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