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트겐슈타인에게서 하나님에 대한 단어는 지고하고 완전한 하나님에 대한 그림 언어일 수가 있다. 단어는 수단이며, 어떤 맥락에서 사용되는 가에 달려있다. 하나님은 단어나 개념의 쇠창살에 갇히지 않는다. 언어는 공적으로 다양한 사용과 활동에서 의미를 맥락에 따라 산출한다.
언어게임은 삶의 형식의 한 부분이 되며, 이것은 규칙에 의해 지배되는 언어의 발화행위이다. 모든 인간의 언어게임과 활동에 공동적인 본질은 존재하지 않는다 (<탐구> 65). 오히려 다양한 삶의 형식에는 가족의 유사관계가 존재한다. 언어 사용에서 우리는 동일한 단어가 복잡한 네트워크에서 유사성, 중첩, 또는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고 되돌아오는 반복을 본다 (<탐구>, 66).
가족 유사성은 메타포적인 표현이며 이것은 규칙과 문법에 의해 규제되는 언어게임의 활동성을 말한다. 언어 게임에서 단어들은 다양한 삶의 형식들의 경계를 넘어서며 동일한 단어가 다르게 사용된다. 가족 유사성은 플라톤적인 형상이나 또는 모든 것을 포함하는 일반성이나 보편성을 거절한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언어는 동일성이나 다름 아니라 유비로 표현된다. 비트겐슈타인에게 동일한 단어는 본질적이거나 대상을 재현(상응)하기 보다는 언어의 그믈망에서 가족의 유사성처럼 중첩 되면서 사용된다.
일반구조나 보편성은 넒은 의미에서 삶의 형식이나 전거 시스템 또는 문화의 에피스테메로 이행된다. 언어는 하이데거 처럼 존재의 집이 아니라, 삶의 형식에 관련되며 게임의 규칙과 문법을 쫒으며 소통의 네트워크에서 공적인 의미를 갖는다. 이것은 문화적 합리성을 지적하며 언어게임과 공적실천에서 삶의 형식은 두텁게 기술된다. 문법으로서 신학을 정의할 때 본질은 삶의 할동을 지배하는 규칙준수와 문법에서 표현된다 (<탐구>, 371-3).
비트겐슈타인에게서 신학은 하나님의 말씀의 문법이며, 삶의 자리와 맥락을 무시하는 무시간적 교리주의 체계가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언어의 사용과 사건에서, 다시말해 인간의 활동적 실천과 삶의 맥락에서 본질러 드러난다. 이것은 살아있는 하나님의 음성에 대한 삶의 상황을 기초로한 문법적 인식론이며, 하나님의 말씀은 종교적인 삶의 실천과 형식에서 생활세계가 된다.
삶의 상황과 더불어 동반되는 문법적 인식론은 생활세계에 관여되며 하나님의 말씀은 두터운 기술이 되어야한다. 이것은 개별성-보편성의 구조에서 움직이며 이른바 포스트모던 관점주의 (니체)나 해체주의 (데리다)와는 다르다.
언어놀이는 비교리주의적이며, 개별적인 삶의 형식과 맥락에 근거하며, 철학과 신학의 형이상학적 편견과 독단적인 언어의 남용 그리고 지식의 질병을 치유하는 역할을 한다.
예를들면 어거스틴의 수사학에서 사랑의 단어가 에로스에서, 우정에서 그리고 신적인 사람에서 다르게 사용되고 서로 다른 의미를 갖는 것을 알고 있다. 그리고 사랑의 단어가 갖는 가족 유사성이 인식된다. 언어의 복잡한 그믈망에서 사랑의 단어는 다른 의미와 중첩되기도 하고 또한 유사관계로 나타난다. 그것은 한 영역에서 다른 영역으로 여행하며 또한 반복적으로 되돌아오기도 한다. 존재가 아니라 단어가 살아서 움직이며 영원 회귀한다.
그러나 어거스틴의 현상학에서 종교의 언어는 그림언어가 아니라 메타포리컬하며 인격적이며 실재적이다. 종교상징의 언어는 실재에 참여한다. 모든 경험적인 것들은 내안에서 의미를 형성하지만 그것은 기억을 초월하여 진리와 행복의 근원이신 하나님과 친교로 나간다 (<고백록> 10:17). 하나님은 기억의 세계를 넘어서서 나를 각성하고 새로운 존재로 살아가게한다.
어거스틴에게 종교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문법이며 루터는 이러한 신학의 문법을 살아있는 하나님의 음성으로 개념화했다. 이것은 말씀선포로 나타나지만 교회 울타리를 넘어서서 자연의 세계와 소통한다. 창조는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무대(칼빈)이며 또한 하나님의 마스크(루터)이다. 이러한 신학적 언어는 어거스틴에게서 기인한다. 창조란 우주의 시로 나타나며 만물의 창조주 하나님을 향해 노래하고 나무는 기쁨으로 바람과 함께 흔들거며 춤을 춘다.
이 지점에서 비트겐슈타인은 <논리-철학논고>와는 달리 신학은 신비한 것 또는 말할 수 없는 신에 관한 영혼의 관조로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신학은 하나님의 말씀의 문법으로 정의된다. 종교는 언어게임을 넘어서는 영이다. 여기에 비트겐슈타인과 어거스틴의 공명이있다.
신학은 종교의 다양한 실천에서 어떻게 언어를 사용할 것인지를 배울 필요가 있다. 공공신학은 공론장의 다양한 영역들에서 나타나는 언어게임과 실천을 어떻게 사회학적으로 분석하고 두텁게 기술하는 가에서 그 진정성이 드러난다.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적 탐구는 편견과 형이상학의 유혹을 치유하는 윤리적이며 정치 비판적 성격을 갖는다. 일상의 삶에서 규칙을 준수하는 언어의 활동과 소통의 삶은 윤리적이다. 인간의 삶은 역사의 영향과 문화의 침전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사회적인 조건 안에서 상호주관적 소통은 필수적이다. 인간의 합리성은 문법에 기초하며 전통의 편견과 불명료함 그리고 억압의 구조를 비판하면서 윤리적 삶을 살아간다.
종교는 그림언어
비트겐슈타인의 "문법으로서의 신학" (<탐구>, sec. 37 3)이 새로운 종교적인 삶의 형식으로 출현할 때, 그의 발생론적 접근은 어거스틴의 종교적 삶의 현상학과 먼 거리에 있지 않다. 한편에서 언어의 기능과 사용은 상호주관적 소통에서 의견의 일치에 있다. 다른 한편 언어의 의미는 삶의 형식 즉 삶의 세계에 의해 둘러싸여있다.
이것은 삶의 맥락과 문화, 역사, 전통을 인간에게 공동적인 배경으로 수용한다. 삶의 문법적 전거는 인간행동을 공유하는 인식적인 시스템으로 기능하며. 이것에 입각해 우리는 심지어 모르는 외국어를 해석하기도 한다 (<탐구> 206).
그러나 이것은 단순히 해석학적이 아니라 가족 유사성과 단어의 반복성을 문제틀하고 두터운 기술을 한다. 예를들어 파시스트적인 삶의 형식은 한 영역에서 다른 영역으로 이동하고 반복되지만 히틀러의 전체주의와 무소리니의 파시즘과 일본의 신토 파시즘을 일반화하는 시도는 비판적인 문제틀로 들어오고 두텁게 기술 되어야한다.
비트겐슈타인에게서 신학은 단순히 단어들의 형식을 넘어서서 의미론적인 종교의 세계를 구성한다. 그러나 그의 입장은 양가적이다. 그는 신학의 문법을 철학의 영역에서 거절하지만 (<탐구>sec. 126. 128), 그렇다고해서 대립 시키지도 않았다.
하나님은 누구인가?ㅡ아마 비트겐슈타인은 기독교적인 맥락에서 인격성으로 언급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그림언어이다. 종교적 언어게임을 언급할때 그는 종교의 본질이 아니라 다양한 종교들에서 나타나는 언어게임과 사용 그리고 실천형식들에 주목할 것이다.
뷸교의 슌야타(공)는 기독교의 케노시스 (그리스도의 자기비움)과는 삶의 맥락과 언어사용에서 다르다. 단어가 사용되는 언어의 규칙과 그림의 배경 그리고 삶의 형식이 서로 다르다. 동일한 단어 신앙(기독교) 또는 신심( 불교의 정토진종)에서 의미를 결정하는 것은 언어게임의 네트워크에서 규칙과 문법이다. 비교의 관점에서 볼때 가족 유사성이 존재하지만 여전히 서로 다른 종교적 삶의 형식과 문법으로 인해 불가공약성을 넘지 못한다. 단지 착각할 뿐이다. 비트겐슈타인의 관심은 삶의 형식의 다름을 지적하고 불가공약성을 문제틀한다. 모든 다양한 종교들의 본질을 초월성에서 추론해서 상대화하는 것은 결국 신도그마주의로 전락한다( <탐구> sec. 131).
비트겐슈타인은 동양의 음양사상을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과 비교하거나, 불교와 기독교의 대화를 거절하지 않는다. 그가 문제틀하는 것은 서로 다른 언어게임과 규칙의 불가공약성이며, 비교연구에서 학자들이 범하는 신도그마주의나 엘리트주의에 있다. 이들은 다름을 다름으로 인정하로 존중지 못한다. 쉽게 우열을 가르려는 병리현상에 빠지거나 아니면 종교의 다름을 서로 습합시켜 심리주의화 하려고 한다.
신도그마주의에서 나타나는 거대담론의 지배나 심리주의 보편현상은 특수한 종교적 삶의 형식에서 나타나는 언어사용과 문법 그리고 의미에 기초한 문화 파라다임과 생활세계를 이해할 수 없다. 축구시합에서 야구시합을 할 수가 없다.
불교를 이해하려면 불교의 생활세계안에서 살아야하고 지혜와 실천과 언어의 사용에서 드러나는 의미에 헌신해야한다. 그래야 불교인으로서 기독교의 다름을 인정하고 존중할 수 있다. 그 역도 마찬가지다.
비트겐슈타인의 언어게임과 종교는 종교 엘리트들의 신도그마주의나 습합주의자들에게 날카로운 도전을 의미한다. 다양한 종교를 인위적인 선택과 품질 개량을 통해 하나로 손쉽게 통합하려는 시도는 비트겐슈타인에게 서구 근대성의 식민주의 병리현상의 재발일 수가 있다.
비트겐슈타인의 입장은 달라이 라마의 말을 연상한다. " 아, 당신은 장미의 종교에서 왔군요 (장미는 루터가 종교개혁을 하면서 장미안에 십자가를 그려놓고 사용한 상징이다. 헤겔은 장미/이성과 십자가/신앙을 통해 그의 인정철학을 완성했다). 나는 로투스로부터 왔습니다. 장미와 로투스는 하나도 아니지만 둘도 아니지요." 자기 종교를 사랑하고 헌신하지 못하는 자는 타종교를 사랑하고 존중하지 못한다.
영원성의 관점: 종교와 윤리
비트겐슈타인에 의하면, 만일 하나님을 인격성의 단어로 사용한다면 하나님은 나를 보고 인도하며 보응하신다. 종교적인 삶의 맥락에서 봄의 차원은 다른 영역에서 사용되는 시각적인 봄으로 일반화 할 수 없다. 이것은 종교적 경험의 특수성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사랑이나 다른 성품들은 말씀의 문법에 속하며 종교적 고백에 속한다. 이러한 신앙고백이 기도와 예배 그리고 삶의 다른 독특한 실천에 깔려있으며, 종교인은 여기에 참여한다. 믿음은 철학적이거나 일반 정보지식과는 구분된다 (Brenner, Wittgenstein's Philosophical Investigations, 141). 이것은 타종교에서도 다를 바가 없다.
어거스틴의 언어사건은 하나님을 모든 존재의 근거와 생명으로 파악하기 때문에 신앙고백의 특수성을 존중한다. 또한 정치, 경제, 문화 전반에 걸쳐 <신의 도성>을 향해 참여를 요구한다. 하나님은 철학을 통해 그리고 창조의 아름다움을 통해 그리고 세속의 영역들을 통해 말씀하신다.
종교적 삶의 현상학에서 "사태자체로"는 이전의 이해와 편견과 경험의 침전에 순응하는 실존적인 현존재의 심리적인 배려와는 다르다 (하이데거). 기억과 인정의 존재로서 나는 종교적 삶의 여정에서 타자와 자연과 더불어 신의 도성을 말씀의 문법을 통해 지상에서 실천하는 존재가 된다.
마찬가지로 비트겐슈타인에게 종교는 비판적 이성과 분리되지 않으며 교리체계의 편견과 억압적 영역을 문제틀하고 합리적인 설득을 통해 갱신한다 (Brenner, ibid., 142). 기존질서에 순응하는 파시즘적 태도는 거절된다. 생활세계의 파시즘화에대한 저항은 비트겐슈타인의 윤리와 미학의 접합에 담겨있다.
1929년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행한 <윤리강연>에서 비트겐슈타인은 윤리를 선함에 대한 일반적 탐구로 간주하지 않았다. 윤리는 미학의 본질적인 부분이며 삶의 의미와 가치에 관한 탐구이다. 무엇이 삶을 가치있게 만드는가? 윤리는 초자연적인 차원을 지적하고 인간의 언어는 이러한 사실을 표현한다.
예를들어 종교적 경험 ㅡ하나님의 손에 있는 절대적 안전감정ㅡ은 삶의 의미를 가치있게 만드는 윤리적 차원을 담는다. 이것은 반야의 세계안에 있는 불자의 여여함과 육바라밀을 실천하는 윤리적 삶과 다르지 않다. 윤리는 초월적 가치에 근거하는 역설이있다. 과학의 세계에서 기적이 거절되지만 종교와 윤리의 삶에서 세계에 대한 경이로운 경험은 은총이나 기적으로 기술된다.
종교와 윤리는 언어의 테이블에서 경계를 짖는 다양한 삶의 형식들과 경계들을 넘어선다. 윤리는 선함에 대한 일반이론이 아니라 삶의 궁극적인 의미와 절대 선과 가치에 대해 어떤 중요한 것을 말하려는 의지의 욕구에서 출현한다. 윤리는 인간의 마음에 담겨있는 궁극적 선함과 가치를 행한 영적, 도덕적 열망이다. 종교에서 도덕이 분리될 경우 종교는 사멸한다. 그렇게 히틀러 시대의 독일 기독교나 무솔리니 시대의 카톨릭 그리고 일제의 신토는 사람을 잡어먹는 몰록으로 출현했다. 오늘은 인간의 신성화란 이름으로 종교는 습합의 괴물로 등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