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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캉ㅡ 푸코와 들뢰즈의 해체

content6462 2026. 1. 7. 02:24

라캉의 정신 분석학은 폭이 넓으며 철학적으로 절충적인 방식으로 나타난다. 프로이드와 헤겔의 접합과 더불어 라깡은 칸트를 자신의 실재계를 위해 호출한다. 실재계는 언어를 통해 접근하지만 실재계의 결핍 또는 부재로 인해 구멍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라캉은 인간주체에 대한 페시미즘적 견해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의 제자 쥴리아 크리스테바는 정신분석의 모성에 기초해 사랑의 윤리를 제기하고 진리와 치유의 문제를 밝힌다.

 

라캉의 실재계

 

라캉은 욕망과 충동을 구분한다. 욕망은 한계를 넘어서는 과도한 충동으로부터 방어를 한다. 라캉은 모든 충동을 죽음의 충동으로 파악하고, 프로이드의 에로스 (생의 욕망)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는다. 물 (La chose, das Ding)은 유아기에서 경험한 원초적인 어머니의 몸이며, 거울단계에서 자아는 소외와 분열을 통해 나르시즘적 자기동일화를 경험한다.

 

소외된 자아는 상징계로 진입하면서 주체에 이러한 자아의 분열이 각인되며 상징계의 대타자의 지배와 잉여 주이상스를 대리만족으로 갖는다. 파편처럼 남아있는 유아기의 자아의 objet petite a는 실재계로 전이되며 주체의 의식에 구멍을 뚫고 들어와 신경증세로 교란시킨다.

 

그러나 상징계에서 나타나는 성적관계는 물과는 달리 허용된 대상과의 교환에서 잉여향유로 나타나고. 조그만 대상 a를 만족시키지 못하는 파생적이다. 이것은 상징계의 기표가 생산해내는 성적 향유이지만 잉여분에 속하며 대리만족이다. 잉여주이상스는 진정한 의미에서 원초적으로 유아기에 느꼈던 쾌락과는 전혀 다르다. 성관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원초적 주이상스는 어머니의 몸과 유아의 관계에 근거된다.

 

실재계는 언어로 파악하기 어려운 칸트의 물자체와도 같다. 실재계에는 원초적인 어머니의 몸이나 완벽한 충동향유 (주이상스) 또는 objet petite a (잃어버린 거세된 대상)이나 무의식적인 환상을 포함한다. 라깡은 실재계를 주이상스의 언어적 기재 (시니피앙과 담화유형)를 분석하면서 접근한다 (Lacan, 55). 유아기에서 억압되고 거세된 성충동은 나에게 반복되어 나타난다.

 

자아는 주이상스를 지배하지 못하며 주이상스의 결핍은 실재계, 심지어 프로이드적인 초자아 안에도 남는다. 그것은 상상계와 상징계의 영토에서 분리되면서 거세되지만 파편처럼 실재계에 남아 있으면서 구멍과 흠집을 내면서 드러난다.

 

성관계는 없다

 

라캉에게 인간주체는 단편화되고 사회화된 무의식의 언어 (랑그) 즉 타자의 담화와 권위와 만족에 의해 지배 당한다. 이러한 사회구조의 무의식으로 인해 프로이드와는 달리 라캉은 자아가 현실원리를 통해 이드를 조절하지 못한다고 본다. 프로이트는 사물표상과 언어표상을 전의식(무의식)과 의식에서 구분 짖지만, 라캉은 우리가 살아있는 모든 세계가 상징적인 세계이며 무의식으로 말한다. 상징계는 기표의 사슬과 연쇄의 의미로 엮어지고 아버지의 법으로 지배되는 전체 삶의 영역이다. 이것은 거의 영지주의적 세계이해에 접근한다. 프로이드의 현실원리나 죽음충동을 넘어서는 문명의 에로스적 생과 사랑은 별다른 의미가 없다.

 

라캉의 페시미즘은 프로이드의 현실원리와 갈라선다. 인간의 성은 전체가 아니며 (not-whole), 유아기에서 성관계의 주이상스는 어머니와의 관계에서만 나타난다. 욕망충족은 이후 상징계의 문화사회에서 기표체계(랑그)에 의해 생산되며 대리만족인 잉여 주이상스로만 파생된다.

 

라캉의 분석에서 성관계는 없고 존재의 원초적 주이상스 만 존재한다. 원초적 억압(프로이드)은 소외처럼 남아있고 여성의 주이상스는 남성과 다르며, 이러한 다름이 성관계의 결핍과 부재를 드러낸다. 남성은 원초적 거세경험으로 인해 여성의 몸에 대한 주이상스를 갖지 못한다. 여성 파트너는 남성의 원초적 주이상스를 충족시킬 수 있는 전체가 아니다.

 

성은 상징계에서 문화적으로 담론화가 되지만 원초적 성의 쾌락은 유아와 어머니와의 분리되지않는 관계에서만 존재한다. 남녀 간의 사랑에서 나타나는 잉여항유는 대리만족을 위해 문화적으로 구성된 것이다. 아무도 상징계의 사회와 문명을 벗어날 수가 없다. 억압적인 문명의 담화에서 갈등과 대립이 생길 때 이것은 증상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증상이 강박증세로 나타날 때 objet petite a가 구멍을 만들면서 현상으로 출현하는 것으로 볼 수 있고, 징후적으로 독해할 수가 있다. 라캉의 정신분석학은 칸트의 지성계에서 나타나는 인과율을 벗어나지 못한다.

 

조그만 대상 a가 인과적으로 나의 삶을 지배한다. 그러나 라캉에게는 시간개념은 하이데거의 시간성을 페시미즘적으로 변형시킨다. 라캉에게 논리적 시간은 무의식의 상징계에 관련되지만, 공시적이며 환자의 삶의 역사와는 다른 이해구조를 가지고 있다. 기억과 무의식은 양피지처럼 원초장면을 다시 쓰고 다차적으로 중복하면서 장면을 변형하고 보존하는 텍스트와 같다.

 

이것은 프로이트의 <늑대인간>에서 원초장면이 추후의 단계에서 수정되고 변형되면서 나의 기억에 보존되는 것과 같다. 그러나 추후작용(Nachtraglickeit)에서 프로이드는 현재의 주체의 경험이 과거의 원초장면의 트라우마를 재해석하고 바꾸기도 한다. 현재가 과거를 바꾼다. 이것은 퐁티의 Gestalt 심리학과 가깝다.

 

라캉과 하이데거: 시간성

 

라캉은 논리적 시간을 세명의 죄수의 이야기에서 말한다. 간수는 죄수들의 등에 흰색과 검은 색을 부치고 자신의 등에 흰색이 부친 것을 아는 사람은 석방된다. 죄수들은 서로의 등을 쳐다보다가 머뭇거리다 동시에 감옥 밖으로 나갔다. 그 이유는 간수가 모든 죄수들의 등에 흰색을 부쳐 놓았기 때문이다. 논리적 추론을 통해 각각의 죄수의 등에서 흰색을 본 사람은 자신의 등에도 흰색이 부친 것을 알았다.

 

논리의 시간구조는 타자와의 관계에서 머무거리는 시간과 판단과 이해를 하는 시간이다. 나의 등에 검은 색이 부쳐 있다면 두 죄수는 머뭇거릴 이유가 없이 밖으로 나가면 된다. 라캉의 논리적 시간은 양피지에 반복적으로 씌여진 원초장면의 기억이 시간적인 연속으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서로 분리되어서 각각의 다른 시간구조에서 수십 번의 변형과 다시 씌여지는 원초장면과 같다. 이것이 기억이며 무의식의 텍스트가 다차적으로 중복된 양피지 처럼 나타난다. 이것은 프로이드의 추후작용에 대한 하캉의 시간적 해석이다.

 

라캉의 시간성은 하이데거처럼 이해와 관련되며 과거와 미래가 함께 포개진다. 타자에 대한 머뭇거림이 있고 결정하는 순간도 있다. 그러나 하이데거는 딜타이-슈프랑거의 역사의미와 니체의 역사유형을 존재론적으로 수용했다. 하이데거의 시간의 존재론적 구조는 과거 (존재의 던져짐)와 죽음을 보고 앞질러가는 현존재의 결단이 있다. 이것이 하이데거의 시간성이다.

 

현존재의 이해는 단순한 해석이 아니라 새로운 존재와 미래의 가능성을 기획하고 투사하는 행동이며, 여기서부터 해석이 파생한다. 실존의 본래성이 이해안에 순간의 결단으로 나타나며 비본래성이나 일상인들의 뻐져있음에 저항한다. <존재와 시간>에서 실존의 본래성을 위한 하이데거의 결단은 니름 프로메테우스의 차원을 함축한다.

 

그러나 라캉의 논리적 시간성은 기표의 사슬과 연쇄의 의미화에서 정상인의 언어에 여과없이 적용되며 주체는 과거와 미래를 예측하면서 대타자의 욕망에 따라 움직이는 꼭두각시처럼 나타난다. 하이데거의 시간성은 실존성에 관계되며 미래적 기획을 위해 결단을 하지만 일상인들의 비본래적 삶과는 구분된다.

 

라캉에게 죄수들의 행동은 시간의 연속이 아니라 존의 판단과 결단에 관계되며 논리적 시간구조를 말한다. 과거(원초장면)와 현재는 서로 혼재되어있고 나름 논리적 판단을 통해 스스로 해방을 하는 미래의 차원이 있다. 그러나 라캉의 논리적 시간은 소쉬르처럼 공시적으로 나타난다. 환자의 중세는 정상인의 삶과 구분되지 않는다. 억업으로부터 자유로운 미래의 문명을 기획하기에 라캉의 인간상은 원초적 주이상스의 쾌락원리에 지나치게 붙들려있다.

 

칸트의 주이상스

 

칸트의 인식이성은 물자체를 향한 열망을 가지고있고, 이것은 규제원리로 나타나는데, 또한 이성은 계몽의 영역에서 도덕이성과 더불어 지성의 영역에서 작동한다. 그런가하면 이성은 자연의 고고학에서 욕망과 충족의 체계변화에 대한 반성을 하고 자연의 지향성과 더불어 합리적 사회질서를 구성한다.

 

그러나 급진적인 악이 존재하며 욕망의 죽음의 병리현상과 문명을 향한 생의 원리는 투쟁관계에 있다. 여기서 objet petite a 는 사회와 문명의 증세로 여전히 남아있다. 그러나 성충동이 사회적 적대감의 원인이 아니라 욕망과 충족의 체계변화에서 나타나는 큐피디타스가 원인이다.

 

욕망은 경험의 영역에서 지각으로 들어와 지성의 개념을 통해 표상이 된다. 그러나 원초적 주이상스는 자각의 단계에서 경험될 수 없으며, 이것은 경험외부에 존재하는 성격으로 인해 나의 의식욕망과 안티노미처럼 현상한다. 이러한 안티노미는 물자체로 이동되지만, 칸트적인 의미에서 주이상스는 자유의 이념을 통해 합리적 사회와 생의 원리에 기초한 문명에서 해결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칸트는 과거에 붙드리는 것이 아니라 미래의 원리를 향해 희망한다.

 

지젝의 '괴상한' 라캉해석

 

지젝은 칸트와 사드를 비교한 라캉을 바타이유의 방식으로 몰아간다. 지젝의 해석에 의하면, 사드의 성도착 변태행위는 칸트의 정언명법보다 더 급진적이다. 칸트가 자신의 도덕적 귀결을 회피하는 지점에서 사드의 변태가 나타난다.

 

지젝에 의하면, 라캉은 <정신분석의 윤리>에서 위험한 방식으로 실재계를 위한 열정에 접근했다. 여기서 라캉의 입장ㅡ너의 욕망과 타협하지말라ㅡ은 죠르주 바타이유의 성의 과몰입에 공명한다ㅡ 모든 것을 사람들이 전율을 느끼는 지점까지 가도록 생각하라. 바타이유의 에로티시즘은 성의 금지를 넘어서며, 실재계의 불가능성에 대한 극단적 경험은 존재의 진정성을 표현한다 (The Puppet and The Dwarf, 54-5).

 

그러나 지젝의 라캉해석은 기괴하다. 칸트의 정언명법ㅡ사람을 수단이 아니라 목적으로 대하라ㅡ은 식민지 비판을 귀결로 갖는다. 칸트는 루소와 더불어 유럽 식민주의를 공격했다. 사드가 변태적인 성도착으로 여성들을 극단적인 학대로 몰아가는 것이 과연 칸트가 회피한 귀결을 완성하는 가? 칸트는 도덕과 윤리를 구분했고 감정과 미덕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에우다이모니아 (중용으로 절제된 삶의 행복) 윤리를 거절하지 않았다. 그리고 정치개혁과 혁명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핵심미덕인 프로네시스(신중한 지혜)와 경제적 정의를 수용했다. 이것은 마르크스에게 고스란히 이어진다.

 

왜 지젝은 느닷없이 바티유의 과도한 에로티시즘을 칸트를 극복하고 안티고네의 심정 윤리로 연결하는 가? 안티고네는 바타이유처럼 외설과 과도한 성적변태의 삶에 탐닉한 사람이 아니다. 크레옹 왕이 안티고네의 오라비의 장례삭을 허락하지않는 법을 공포했을때 여가에 저항하고 사형울 당한 사람이다. 그녀는 헤겔이 말한 심정윤리의 전형이다.

 

지젝은 모든 윤리적 차원을 실재계에 접근하는 죽음충동으로 환원하고, 오히려 라캉의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를 피해간다. 오히려 라캉은 <율리시스>에서 불룸과 스티븐의 인정과 화해에서 상징적 아버지의 의미를 보고 정신분석의 윤리의 모델로 보았다. 이것을 사랑의 윤리로 발전시킨 사람은 크리스테바이지만 지젝은 쥭음충동에 라캉보다 더 심하게 빠져있다.

 

어째튼 칸트의 원리는 프로이드의 초자아의 영역에 속한다. 그러나 라캉에게 초자아의 의미는 죽음충동으로 몰아가는 유령처럼 존재하며 상징계가 만들어놓은 잉여 주이상스로 이해될 수 있다. 프로이드의 초자아의 지배원리는 라캉에게 잉여 주이상스의 부분으로 전이된다.

 

라캉의 치유

 

라캉에게 문화의 상징계에서 성의 억압(초자아)도 있지만 새로운 잉여의 쾌락이 산출하며 사회를 지배한다. 대상 a와 잉여 주이상스의 대리만족의 변증법은 문명의 과정에서 나타난다.

 

라캉은 인식론적으로 볼 때 레비 스트로스의 구조주의에 가깝고 치유적 관심에 공유할 수 있다. 레비 스트로스의 구조 인류학에는 샤만의 노래와 상징에서 병든 신체 부분에대한 심리적인 치유 효과가 존재한다. 오이디푸스 신화는 원초적 타자성인 어머니의 사랑에 관련되며, 이러한 사랑은 사회 문화 언어적 구조로 엮어진 집단적 싱징의 질서를 넘어선다. 이것은 주체가 콘트롤 할 수 있는 현존이 아니며 신비한 타자성으로 남아있다.

 

샤만의 노래는 영혼을 되찾기위해 선한 영과 악령의 드라마틱힌 투쟁을 상징한다. 이것은 시적언어나 메타포가 세계를 변화시키는 것과 비교된다. 샤만의 치유와 노래가 상징적 기능처럼 프로이드 심리학의 명료하지않는 부분을 해명해 줄 수 있다 (Levi-Strauss, 192, 202).

 

라캉의 관심은 상징계에 있으며, 이것은 상상계와 실재계의 우위에 있다. 이들은 상상계로 부터 출현하며, “기표는 기의에 선행하며 기의를 결정한다.” (Lacan, The Language of the Self, 295). 여전히 말하는 주체는 라캉에게 중요하며, 기표를 통해 사회와 문화를 질서짖고 의미체계 (기의)를 형성한다. 랑그를 결정하는 것은 시니피앙이며 말하는 주체의 활동에 기초한다.

 

또한 주체의 시니피앙은 집단적인 상징질서 (문화의 에피스테) 안에서 무의식처럼 기호화가 되고 주체의 욕망과 삶을 지배한다. 그러나 실재계의 역힐은 여전히 중요하다. 실재계에서 성적 관계성은 표상할 수가 없다, 이것은 생물학적으로 주어진 성이나 상징계에서 결정된 젠더와는 다르다. 상징세계애서 경험되거나 허락되지 않는 여분은 실재게에 속하며 파괴적이거나 창조적으로 인간의 삶에서 나타난다.

 

큰 타자의 언어 시스템은 구조화된 시니피에로서 상징계의 무의식이 되며 이러한 인식론은 레비 스트로스와 공유한다. 사회는 언어처럼 독립적인 실제이며, 사회관계의 구조는 에피스테메처럼 기능한다. 인간은 이러한 에피스테메 즉 상징적 아버지의 이름과 법에 의존하는 상징계에서 태어나 자라고 죽는다.

 

남성은 아버지의 이름으로 상징되는 문화와 사회질서에서 남성은 여성에 비해 보다 더 순응하고 합리화의 과정에 참여한다. 나르시즘은 남성의 카리스마나 지배구조 (파시즘)에서 출현한다. 그러나 여성의 신체는 가부장의 구조에게 쉽게 적응이 되지 않고 결핍과 증세 (히스테리)로 남는다. 샤만적 치유는 여전히 사회의 자배담론을 정화한다.

 

욕망기계와 권력관계: 들뢰즈-푸코의 반격

 

푸코는 들뢰즈와 카타리의 공저 <안티 오이디푸스>에 대한 서문울 썼다. 자본주의 욕망기계는 프로이드의 오이디프스 거세억압을 거절한다. 자본주의가 파시즘 체제로서 정신 분열을 일으키는 주범이다. 이것은 역사적으로 히틀러와 무솔리니 또는 스탈린에게서 출현했다. 또한 후기 자본주의 사회안에서 파시즘은 여전히 신체와 정신을 지배하는 일상이 되어있다. 이런 점에서 푸코는 <안티 오이디푸스>를 비판윤리로 독해한다. 그것은 비-파시즘적 삶에대한 입문이다 (xiii).

 

들뢰즈에게서 프로이드의 오이디푸스 억압이론은 자본주의의 정신분열증과 욕망구조에 순응하는 반동적인 역할을 수행한다. 정신분석은 모든 인간을 오이디푸스 거세억압에 가두고 인간을 노이로제 삶의 방식으로 취급한다. 이것은 모두를 현실원리에 순응하는 파시스트로 만들어 버린다. 그러나 코나투스에 기초한 생산적인 욕망구조는 오이디푸스 거세공포 이전에 무의식으로 존재하며 항상 같이 작동한다. 그러나 프로이드는 무의식적 생산적 욕망생산을 모두 다 오이디푸스 장치 안으로 가두어버린다 (ibid., 56).

 

들뢰즈와 푸코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식민지화 영토를 해체하고 자본주의 분열증 현상을 폭로하면서, 개인을 탈영토화해서 자신의 고유한 욕망을 창조하게 한다. 노마드는 오이디푸스 영토와 아버지의 법의 상징계에 저항하는 존재이다.

 

들뢰즈가 유용하는 마르크스의 자본주의 비판과 니체의 계보학은 부르주아 프로이드와 라캉의 정신분석에 쐐기를 박는다. 자본주의가 욕망을 생산하는 기계이며 정신분석가를 포함하여 모두 다 맘몬의 지배에서 정신 분열증을 벗어날 수 없다. 자본주의 생산과 분배 그리고 소비에서 자본과 노동분업의 관계는 허위의식이라는 이데올로기를 생산해낸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생산-분배-소비과정울 변증법적으로 파악하지 않고 모든 것을 생산의 계기로 환원 시킨다. 자본주의는 모든 사회적 관계의 총체와 더불어 욕망을 생산하는 이데올로기 기계이다. 생산은 과정으로서 모든 이념적인 카테고리나 실존론적 범주을 만들어낸다. 들뢰즈의 마르크스-니체의 포지션은 하이데거의 현존재를 해체한다 (Anti-Oedipus, 4-5).

 

현존재는 자본주의 사회안에서 생산과 재생산의 메카니즘에서 정신 분열증 환자이다. 욕망생산은 인간에게 기관을 만들어낸다. 욕망기계는 인간이나 동물이나 사회 기관이나 제도에 존재하고 교환과 연결 그리고 흐름에 기초한다. 이것은 억압과 가치평가를 통해 사회 계층화를 만들어내며 욕망생산의 흐름을 원활하게 한다. 사회적 생산이 형성된다.

 

그러나 이러한 욕망기계는 와해될 수 밖에 없는 현실에 직면한다. 흐름과 연결을 해소하는 것은 욕망생산안에 제한적으로 존재하는데, 이것은 기관없는 신체를 말한다. 이것은 형이상학적인 신체이며 국가가 배열하고 일정한 유기체 안에서 욕망을 생산하는 파시즘 정치에 대립한다. 신체의 기관은 자본주의 법과 규칙과 권력에 의해 배열되고 영토화된다. 그러나 기관이 없는 신체는 국가의 권력에 의한 배열이나 자본주의 욕망기계에 의해 영토화되지 않는다. 이것은 코나투스에 의해 탈영토화되고 새로운 창조성과 욕망추구로 나타난다. 이것은 타자의 신체에 대한 억압과 지배가 어니라 선한 열망을 갖는다 (스피노자).

 

자본과 물질적 이해관계 (마르크스)와 리비도 욕망의 흐름(니체)은 분리되지 않으며 욕망의 흐름과 생산은 사회적 생산의 무의식으로 볼 수 있다. 예를들어 기관없는 신체가 욕망생산에 의존할때 이것은 표면으로 나타난다. 기관없는 신체는 비생산적인 욕망을 구성하지만, 자본주의 욕망생산에 의해 의존되지만 완전히 침투되지 않는다. 욕망기계가 탈조직화되고 탈영토화 될때, 이것은 기관없는 신체로 이행한다. 이것은 자본주의 권력 관계로부터 몸을 해방시켜 자신의 욕망을 타자와 더불어 자유를 찾아가는 노마드의 윤리로 볼 수 있다.

 

푸코에 의하면 자본주의 사회안에서 성은 부르주아 문화안에서 합리화되면서 남성과 여성의 외부에 있는 제 3의 성은 배재된다. 생물학적인 섹슈알리티는 사회와 문화적영역에서 젠더화가 되고 성의 담론은 지식과 권력의 관계의 그물망에 엮이게 된다. 푸코의 성의 담론은 페미니즘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한다.

 

푸코는 라캉의 지나친 성억압과 실재계를 권력관계의 틀에서 해체한다. 푸코의 담론과 권력관계의 틀에서 섹슈알리티와 젠더를 접근하는 페미니스트들은 국가와 사회가 여성의 신체를 규제하고 지배하는 정치학에 주목한다.

 

여성의 몸은 권력이 행사되는 정치의 장소가 된다. 생물학적 여성의 본질주의자와는 달리, 나의 섹슈알리트는 합리화가 되고 정치적 지원을 통해 문화의 영역에서 담론화가 되고 정당성을 획득한다. 성은 억압된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상징계의 기표에 의해 정신과 의사나 종교인 또는 전문가들의 구성을 통해 보편적으로 유포되고 전문화가 된다. 나는 기관을 가진 신체가 된다. 섬의 담론은 사회전반을 지배하고 매우 능동적으로 생산/재생산의 메카니즘안에서 되며 정치권력에 의해 법제화가 된다.

 

이러한 지식/권력의 상호작용이 섹슈알리티의 이항의 대립을 생산한다. 푸코의 입장은 라캉의 상장계의 잉여 주이상스를 지식과 권력의 관계로 이행시킨다. 그러나 성은 라캉처럼 억압된 것이 아니라 담론의 형성과 유포의 과정을 통해 권력관계에서 사회화 된다. 푸코의 인간은 라캉과는 달리 물질적 이해관계와 권력의 그물망에서 지배담을 생산하고 주체는 아러한 지배 시스템에 예속된다. 이것은 상징계를 해체하는 푸코의 윤리적 태도 즉 예속된 자들의 이질적 삶을 회복하기 위한 파레시아의 태도이며 계보학이다. 이것은 들뢰즈의 노마드적 윤리에 공명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