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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캉과 사회학적 문제틀

content6462 2026. 1. 7. 02:21

프로이드: 무의식과 억압의 장소

 

프로이트에게서 무의식은 개인의 꿈의 세계에 위치하고 오이디푸스 신화의 거세공포와 원초적 억압이 들어와있다. 무의식은 생물학적이며 사물표상에 속하지만, 사물과 단어표상은 전의식과 의식의 영역에 속한다.

 

프로이트는 신경증 환자에게 자유 연상법을 통해 기다란 안락 의자에 반쯤 누워서 마음에 떠오르는 모든 것을 이야기 하게 한다. 이야기가 멈출때 분석가는 질문을 던지면서 이야기의 흐름을 이어간다. 자유연상에서 환자의 꿈의 이야기에 프로이트는 주목했다. 꿈은 현실세계의 경험들과 관련되어있다.

 

어떤 망상증 환자에게서 자신이 구세주이며 여인이 될 것이라는 기표가 나타난다. 프로이트는 이러한 사례에서 과대 망상증이 동성애로 연결된다고 보았다. <늑대인간>에서 늑대애 대한 꿈이 원초적 장면--어린 시절 부모의 성관계에 대한 경험-- 에서 환상으로 나타난다.

 

환자의 증세에서도 (한나 O의 사례) 원인은 인과율적이 아니라 중층적으로 결정한다. 그러나 심층적 원인은 전이 다시말해 아버지에 대한 육체적 사랑이 분석가에게 전이된다. 히스테리의 원인은 아버지에 대한 원초적 욕망에서 기인한다.

 

꿈에서 나타나는 상징 이미지를 프로이트는 욕망충동으로 파악하고 사물표상의 전치 (다른 표상으로 넘어감)나 압축을 통해 꿈의 내용에서 의미를 해석한다. 꿈은 의식과 초자아에 의해 검열을 당하며, 명시적 내용--그림과 같은 표상으로 이루어진다--과 잠재적 내용(사고)으로 등장한다. 잠재적 내용(사고)이 명시적 내용의 근거가 된다.

 

이런 관계에서 꿈은 메타포와 상징으로 나타난다. 이런 꿈의 해석에서 다차적 계기들과 장면들이 혼합되어있고, 꿈의 명시적 내용은 전치와 압축을 통해 중충적으로 나타난다. 중층결정으로 인해 꿈은 충분히 해석하기가 어렵다. 꿈 작업에서 중요한 것은 압축과 전치 그리고 표상의 장면에 주목하는 것이다. 프로이드는 이러한 꿈의 언어가 시와 예술에서 나타난다고 파악했다.

 

그러나 라캉에게서 무의식은 상징계의 문화질서안에 언어처럼 구조되어있다. 꿈에서 나타나는 모든 이미지 표상이나 전치나 압축은 욕망충동을 드러내지만 단순히 사물표상이 아니라 상징계안에서 언어현상 (시니피앙의 사슬과 연쇄 과정과 의미)으로 파악된다.

 

라캉은 프로이트의 무의식의 꿈의 세계를 사회로 이동시키고, 초자아는 상징계 다시말해 언어화된 대타자, 즉 문화를 의미한다. 그러나 프로이트와 다른 것은 라캉이 의식의 세계를 상징으로 즉 꿈의 세계로 파악함으로써 의식의 영역과 현실적인 관계를 무의식으로 환원시켰다. 그러나 프로이트는 문명에서 현실적인 의식의 영역을 초자아의 무의식과 구분시켰다.

 

프로이드에게서 문화는 이드의 욕망을 억압하고 자아의 현실원리와 초자아의 권위를 인정하면서 출현한다. 상징계의 문화질서는 프로이드에게 초자아의 이상원리로 나타나고 오이디푸스의 원초적 억압에 기초된다. 프로이드는 이드의 욕망의 자리에 생의 충동과 죽음의 충동이 공존해있음을 보았다. 문명은 욕망의 억압을 통해 불만을 운명으로 가질 수 밖에 없다. 그러나 프로이트는 문명의 파괴와 죽음충동을 방어하기 위해 합리적인 질서와 생의 원리를 중요하게 보았다. 선한 삶의 열망이 프로이트에게 중요하게 작동한다.

 

그러나 라캉은 문명(초자아)을 무의식의 사회구조로 전치시키고 대타자의 담화가 상징계 안에서 살아가는 주체를 형성하고 지배하는 것으로 기호화한다. 주체는 유아기의 파편화된 자아와 대타자의 담화의 지배와 억압의 사이에 위치한다. 라캉이 무의식의 꿈의 세계를 상징계에서 파악하는 이유는 시의 상징언어에서 친화력을 보기 때문이다.

 

그러나 프로이트와는 달리 라캉에게 죽음충동과 원초적 주이상스에 대한 과몰입이 나타나며 오히려 후기 하이데거의 <아낙시만더의 단편>에서 나타나는 오류에찬 현존재와 "진리는 없다"라는 영지주의적 허무주의에 근접한다. 유대교의 데무르고스가 창조한 물질의 세계는 악하다.

 

무의식의 표상과 예술

 

라캉에게 무의식의 세계는 시나 문학 그리고 예술에서 표현될 수가 있다. 예술은 보이지 않는 무의식의 세계와 접촉한다. 이것은 프로이드에게도 마찬가지다. 꿈의 언어처럼 시인들의 언어는 메타포와 상징으로 표현된다.

 

예를들어, 시는 언어의 전치나 압축을 통해 내용을 메타포로 표현한다. 환유는 프로이드의 꿈에서 다른 사람에게 대한 전치나 대체와 같다. 언어는 무의식의 조건이며, 무의식 (꿈의 그림내용과 표상: 압축과 전치)은 시의 언어처럼 (메타포와 환유) 구조화된다 (Lacan, Écrits, A Selection, 303).

 

사회화된 주체는 시니피앙의 연쇄를 통해 의미작용을 하지만, 그러나 무의식의 사회구조는 대타자의 담론과 욕망에 의해 나의 시나피앙과 욕망을 산출하고, 제한하고 지배한다. 상징계는 주체의 모방충동에 부재나 결핍와 갭 또는 신경증적인 징후(흔적)를 만들어낸다.

 

라캉에 의하면 문명의 시작에 언어가 있었고 기표는 인간의 신체에 권위와 금지로 기입된다. 징후의 관점에서 보면 "주인담화"는 유아시절에 실종된 주이상스를 보상 받기위해 아버지의 이름을 모방하면서 대상 a를 잉여향유로 갖는다.

 

증상은 무의식이 잉여대상을 즐기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것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극복하는 잉여 주이상스로 볼 수 있다. 잉여 쾌락은 아버지 판본을 기초로 성도착이나 히스테리 담화에도 작용한다.

 

증상에서 잉여 쾌락을 추구하는 차원이 나타나며, 문명 구성에서 쾌락의 보상체계가 문명의 삶에서 주요계기가 된다. 이것은 종교영역에서 위대한 봉사를 하면서 나타나는 보상체계에서도 볼 수있다. 정상인의 주인담화나 또는 악플을 대는 행위에서도 잉여쾌락이 작동한다. 이것은 프로이드의 현실원리와는 달리 라캉에게 쾌락원리가 문명에서 더 중요하게 작동한다.

 

그러나 사회학적으로 볼 때 잉여 주이상스는 합리적인 노동조직과 휴가와 만족할 만한 급료를 기초로한다. 이것은 상징으로 환원되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사회 시스템의 변화와 개혁을 필요로한다. 사회적 관계의 총체와 문화사회 계층의 위계질서를 경험적으로 분석하지 않은 채 정신병자의 시니피앙을 기초로 잉여 주이상스를 일반화 하는 것은 라캉의 강박증세처럼 나타난다. 라캉 역시 상징계의 억압과 잉여 주이상스에서 벗어난 초인이 아니다.

 

무의식(지배의 상징구조)이 대타자의 담화에 의해 설정된 것이라면, 주체는 이미 언어와 규칙의 네트워크 (소쉬르의 랑그: 문법체계)에 기입되어있다. 상징계의 담화는 문법체계처럼 나의 시니피앙과 욕망을 지배한다. 여기서 과학과 지식이 산출하는 대학담화의 유형이 존재한다.

 

상징계의 담화는 욕망을 지배하고 방향을 제시 하지만 또한 잉여 쾌락의 대상 a를 산출한다. 분석가의 담화에서 분석가는 전이(대상a)가 되지만 지식의 힘을 행사한다. 분석가는 아버지의 판본을 넘어서서 내담자에게 원초적 주이상스를 찾도록 작용하는 대상 a로 역할을 한다. 이것이 라캉 정신분석의 목적이다. 분석가는 권력담론이다. 어떻게 뷴석가는 상장계의 억압과 지배외부에서 그런 초인적인 특권을 갖는가?

 

실재계는 유아기의 상상계에서 일어난 거세된 억압으로서 조그만 대상 a, 즉 objet petite a로 표현된다. 어머니로부터 분리 또는 소외되는 과정에서 네가지 쾌락 (구강, 항문, 부모의 시선과 음성)이 거세된다. 이것은 실재계로 이전되고 구멍처럼 상징계를 둟고 들어온다.

 

이것은 죽음충동이나 강박증세 또는 망상이나 신경증에 설정되며 나의 의식의 구멍을 낸다. 이것은 유아기의 상상계의 어둠이나 부재처럼 여전히 언어나 의미를 넘어서 있으며 말할 수도 기록될 수도 없다 (Lacan, The Language of the Self, 92). 정신분석의 담화는 objet petite a를 내담자에게 상징적 아버지의 이미지를 통해 원초적 주이상스를 찾게한다.

 

현상학적 문제틀

 

퐁티는 유아 심리학에서 거울의 단계에 주목울 하고 라캉의 소외개념을 수용했다. 유아는 자신의 이미지에 븉잡혀있다. 라캉은 거율단계룰 통해 사르트르의 실존주의와 주체의 자유개념을 비판했다. 유아의 자아는 이미 오인(meconnaissance)의 단계에 있다.

 

그리고 대타자의 욕망에의해 끌려 다닌다. 라캉은 퐁티의 지각의 현상학에서 몸의 중요성울 거절한다. 라캉은 데카르트의 코기토 개념을 해체했다. 라캉의 존재론은 다음처럼 표현된다: "나는 사유하는 곳에서 존재하지 않는다. "나는 생각하지 않는 곳에서 나의 존재를 생각한다."

 

라캉이 거울의 단계에서 Gestalt (거울에 비친 형체)는 사회학에 중요한 자극을 준다. 퐁티는 레비 스트로스와 함께 라캉이 무의식에서 강조하는 이질성과 자아의 분열이 이후 주체의 삶을 지배한다는 입장을 수용하지 않았다. 머릴로 퐁티의 현상학에서 Gestalt는 고정된 것이 아니라 성장의 과정에서 변형울 거치는 역사 사회적 내용을 담는다. Gestalt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질료/형상의 관계에서 잠재태가 운동을 통해 자신을 실현시키는 현실태에 이르는 동적인 개념에 비교될 수도 있다.

 

문화적 세계는 생물학적 경험주의를 통해 인과율적인 사슬로 파악하기가 어렵다. 유아의 행동에는 대상을 향한 지향성이 있으며 유아의 몸이 환경과 상호작용하면서 경험적 필드들을 만들어낸다. 유아의 몸의 기관의 발전에서 특히 두뇌는 몸의 구조적 무질서를 조절하고 전체 몸의 작용에 영향을 미친다.

 

여기서 작동하는 것은 의미의 세계이며 무의식이 이러한 경험과 의미 그리고 어휘를 구조화하고 언어로 표현한다. 야생의 문화에서 무의식은 이성적으로 작동되며 정신증세의 억압구조가 라캉의 상징계처럼 일방적인 지배로 나타나지 않는다. 퐁티에게서 무의식 개념은 프로이드-라캉과는 달리 의식의 세계와 직물처럼 짜여있고 서로 공존한다.

 

이것은 프로이드의 마음의 위상학에서 무의식과 의식의 관계를 설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무의식은 의식을 포함하며, 의식을 무의식을 표현한다. 그러나 의식이 무의식을 결정할 수가 없다. 무의식의 역동성은 욕망을 포함하지만, 마음이 아니라 몸-주체에서 세계와의 관계를 통해 규정돤다. 몸의 충동은 심리적인 활동들에 연계되며,

 

무의식의 리비도는 더 이상 단순한 성적충동과는 다르다. 달리말하면 성적 탐욕과 쾌락을 유아기의 성욕에서 환원시킬 수가 없다. 무의식의 탐구는 환자에게 말하게하는 치료법과 더불어, 보다 더 비 언어적인 소통 방법 (얼굴표정이나 발음의 강약 등)이 포함되어야한다.

 

프로이드는 무의식과 환자의 말하는 치료에 과몰입했다. 퐁티에게서 몸과 마음의 직물관계에서 무의식은 의식과 공존하며 내면의 영역으로 이동하지 않는다. 이러한 틀에서 분석가와 내담자의 대회는 전이과정에서 서로를 개방하는 차원에서 매우 중요하다. 이것은 무의식의 역동적 구조를 드러내는 최선의 방법이다. 프로이드는 전이현상을 부정적으로 보았지만, 오히려 퐁티는 전이와 역전이 과정에서 분석가와 내담자의 감정적인 관계를 향상시키며, 무의식에 대한 깊은 이해를 증진한다.

 

퐁티의 현상학적 심리학에서 몸-주체와 세계와의 소통에서 유기체의 중요성이 나타난다. 유기체의 과정에서 유아의 기억에 경험과 의미가 축적되며 이러한 축적은 아버지의 법의 구조이전에 역사적으로 침전된 언어와 의미로 나타난다.

 

아버지의 법의 구조와 사회의 상징적 영역에 앞서 퐁티는 역사적으로 침전된 의미를 유아의 몸의 발전과 생활세계의 빛에서 상징계의 억압을 비판하면서 나간다. 무의식의 세계는 의식의 세계에 공존하며 프로이드-라캉의 억압의 세계로 볼 수가 없다. 몸과 마음의 관계가 무의식안에 단지 억압이나 조작이 아니라 의미의 근원으로 존재하며 몸-주체는 역사와 문화를 통해 의미침전을 하비투스로 의식이전에 갖는다. 이러한 무의식은 생활세계의 배경을 지적한다.

 

유기체의 발전과 더불어 유아는 말을 하고 표현하면서 자신의 본래적 소외를 치유해간다. 대화와 상호작용에서 유아는 소외로부터 본래적으로 설정되며, 성장의 의미와 진리를 드러낸다. 여기서 어거스틴의 기억과 몸울 통한 아름다움의 지각은 퐁티에게 현상학적으로 수용된다. 어거스틴의 기억과 반성 (아남에시스)은 언어이전에 위치되며 <존재와 시간>이전에 존재의 주체성을 구성하는 힘이 된다 (Phenomenology of Perception, x).

 

신학적으로 표현하면 태초에 말씀(로고스)이 있었고 이러한 로고스는 하이데거-라캉의 영지주의 세계관과는 달리 지혜서의 70인역 번역에 근거한다. 이 로고스/소피아가 육신 (살)을 입고 영지주의적 존재론을 부수고 들어와 아버지의 법이 작동되는 물질계를 전도한다. 이러한 살은 하나님의 세계와 현상계를 의미있게 매개하는 생활세계를 지적하며, 퐁티는 이것을 살의 형상학으로 발전시킨다.

 

퐁티의 몸과 지각의 현상학에서 아버지의 이름과 거울의 단계를 통해 유아의 소외현상을 자동인형처럼 기계론적으로 다루는 접근은 거절된다. 왜냐하면 라캉은 유아의 몸의 지향성과 환경과의 상호작용을 고려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유아의 삶의 과정에서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의 원리가 유아의 삶에서 새로운 시작과 자유의 가능성으로 출현하지 라캉의 자동인형의 아르키메데우스 점에 고착되어 포로가 된 채 살아가지 않는다.

 

그러나 라캉에게서 유아가 거울의 단계에서 비쳐지는 것은 Gestalt이며, 불완전한 것이며 자동인형과 같다. 이것은 이미 유아의 자아를 소외시키고 아러한 분열은 자동인형처럼 자아의 단편화된 몸에 영구히 각인된다. 이러한 자기 동일성은 나르시즘의 단계로 이행되며 소외와 균열은 극복이 되지 않는다. 이러한 분열로 인해 아리스토텔레스적인 현실태나 헤겔의 소외의 극복은 실종된다.

 

거울이 없던 시대에서 유아의 자아는 어떤 소외와 분열을 체험 하는가? 만일 거울이전의 문명에서 자아가 덜 분열되어 있다면, 그레코-로만 사회에서 이들의 삶은 노예제 사회에서 경제탐욕 그리고 권력지배로 우리 시대보다 더 혹독한 욕망충동과 잉여 주이상스로 나타난다 (그리스와 로마시대에서 나타나는 페드라스티 제도의 차이와 변질).

 

만일 자아의 분열은 사회화된 주체에 각인되고 주체는 상징계의 문화질서 안에서 대타자의 법 아래서 이중억압을 당한다. 더우기 원초적 주이상스의 결핍 즉 objet petite a은 실재계로 이동하고 구멍을 뚫고 주체의 삶을 교란시킨다. 여기서 프로이드의 자아와 현실원리는 지탱될 수가 없다. 이러한 복합적인 억압구조에서 문명은 억압자체가 되며 라캉은 더 이상 합리적인 사회의 발전과 과학기술의 진보 그리고 에로스의 생의 원리와 문명의 문제를 분석하기가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