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ublic Theology in Forum: Science, Civil Society, Life-World

카테고리 없음

라캉ㅡ지젝: 현상학적 평가

content6462 2026. 1. 7. 02:14

라캉과 헤겔

 

지젝은 “라캉: 어떤 점에서 그는 헤겔적인가?”란 글에서 라캉은 여전히 코제브와 이폴리트의 헤겔해석에서 지대한 영향을 받았다고 말한다.

 

거울단계 (에고/자아)인 상상계를 거쳐 자아는 언어의 상징계, 다시말해 사회 안에서 주체로 전환된다. 상상계는 유아의 나르시즘적인 단계이며 거울의 단계를 기초로 파편화된 몸에 대한 동일성 (그러나 기만)의 성격을 갖는다.

 

라캉이 프로이드로 돌아가려는 것은 초기 프로이드에게서 나타나는 이드의 충동본능에 있고 이것을 거울의 단계에서 자아로 설정한다. 여기서 라캉은 후기 프로이드의 현실원리와는 다르게 유아기의 자아의 거울의 단계에서 자신의 몸과의 파편화되는 소외의 의식을 부각시킨다. 그러나 프로이드에게 거울의 단계는 이드에 속하며, 자아개념은 사회화되는 과정에서 표현된다.

 

그러나 상징계에서 문회사회 질서(아버지의 이름: 대타자)가 자아를 주체로 규정하며, 상징적 남성 지배는 생물학적인 의미에서 오이디푸스 콤프렉스를 대신한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는 생물학적인 개념이이 아니라 상징계의 언어에서 아버지의 금지와 법이 주체에게 억업으로 나타나며, 이것은 아버지의 이름의 권위를 말한다.

 

프로이드의 위상학

 

라캉의 모방욕구의 문제를 다루기위해 프로이드는 중요하다. 프로이드는 인성구조를 이드 (쾌락의 원리; 무의식)-자아 (현실원리; 전의식/ 의식)-초자아(무의식: 사회구성; 이상원리)로 구분하고, 삶과 죽음을 향한 충동(에로스/타나토스)에 주목했다.

 

그의 정신분석은 자아를 이드의 억압된 본능과 욕망을 승화시키고, 현실원리(이성과 상식)를 초자아의 이상원리(양심/정언명법)에 적절하게 맞추어 살게 한다. 프로이드는 대부분 이드의 욕망에 주목했고 현실원리를 통해 조정하려고 했다(Gay, ed., The Freud Reader, 603, 642).

 

이드는 무의식의 영역에서 리비도의 충동욕망으로 채워져 있으며, 문화적 가치를 모르며 선악을 넘어서며 도덕과는 상관이 없다. 이드에서 자아가 발전하며 자아는 현실을 지각하면서 이드의 본능욕구와 외부세계를 중재한다. 지각과 의식은 자아의 가장 피상적인 부분에 불과하다. 그러나 지각-의식을 통해 자아는 현실세계를 경험하고 적응하면서 자신의 삶을 보존한다. 자아는 이드를 억압하면서 현실원리를 발전되고 초자아의 권위 아래서 외부세계를 표상하는 역할을 한다.

 

이러한 현실원리에서 볼때 쾌락의 만족에 대한 기억은 모든 사유의 기원이다. 과거의 쾌락을 재포착하는 자극과 충동이 사유과정의 배후에 은닉된 추동력이된다. 자아의 발전에서 초자아가 출현하는데 이것은 유아가 부모에 대한 오랜 의존이나 금지나 거세공포 (오이디푸스 컴플렉스)에서 기인한다.

 

사회 문화적 영향은 초자아에 의해 수용되고 양심의 가책이나 기존의 도덕성을 대변한다. 자아는 이러한 억압을 초자아의 명령에따라 수행하며, 이러한 억압은 무의식적 과정으로 변형되며 문명의 발전에서 중요하다.

 

이드의 모든 에너지는 본능을 만족시키기 위해 대상집중(object-cathexes)인데 에너지는 유동적이며 쉽게 이동한다 (전이). 유아는 음식이 없으면 다른 사물을 음식으로 원초적으로 동일시하고 입에 데는데 이것을 술어적 사고로 부르며 왜곡된 형태의 사고를 낳는다. 이것은 꿈의 상징성에서 나타나며 사회적으로 인종편견에 술어적 사고가 나타난다 (흑인과 검은색의 악함의 동일성).

 

이런 점에서 대상집중은 지향성에 비교될 수 있다. 프로이드는 후설의 선생 브렌타노의 지향성 개념을 알고 있었고, 이드의 지향성은 대상집중으로 나타나며 자아와 초자아에서도 대상집중을 통해 삶의 의미지평이 융합되면서 나타난다. 의미지평은 이드의 본능의 융합을 통해 다차적으로 전이과정을 통해 복합적으로 츌현한다. 자아는 지향적 존재이며 대상에 대한 지각을 기억으로 저장한다.

 

대상집중은 합리적 가능을 통해 자아와 무의식에서도 나타난다. 이것은 이드의 대상집중에 반집중의 형태로 나타난다. 무의식에서 반집중은 부모와의 동일시로 나타나며 자아이상에 에너지를 집중한다. 무의식은 선악을 구별하는 도덕적 가치에 주로 관심을 기울이지만 그러나 무의식에 억압이 저장된다.

 

이드는 무의식의 억압을 통해 초자아를 조작하기도 하고 자아에 대한 실망으로 인해 자해행위를 하거나 죽음충동을 일으킨다. 이것은 위선적 태도나 종교재판의 잔혹성, 마녀화형, 홀로코스트 등에서 이드의 본능충동울 만족시키면서 나타난다. 이드가 초자아를 변질시키고 타락시킨다. 이드-자아-초자아의 역동적인 위상학을 다루는 것을 프로이드의 메타심리학으로 부른다. 이드의 본능과 충동욕구를 억압하는 조직은 현실원리에 기초한 모든 역사적 형식들과 문화의 지배에 깔려있다.

 

꿈은 현실세계의 경험을 반영하지만 또한 유아기의 억압이 반복되면서 나타나기도 한다. 꿈의 무의식에서 현실세계의 경험과 어린시절의 경험 그리고 유아기의 원초적 억압이 현실원리의 검열을 거치면서 은폐되거나 위장된 채로 또는 상징적으로 압축되면서 사물표상으로 나타난다. 꿈은 상징과 메타포로 드러나며 중층적으로 결정되며 해석을 필요로한다.

 

이런 점에서 프로이드의 위상학의 구조는 풀라톤의 본능-감정-이성에 비교될 수 있으며, 플라톤의 <심포지움>에서 에로스의 중요성에 일치한다. 그러나 플라톤과 달리 프로이드의 정신분석은 무의식과 끔의 해석에서 삶의 경험에서 억압의 내용에 일차적인 중요성을 부여한다.

 

프로이드의 정신분석은 후설의 의식의 지향성과 신체 상호성과 공감의 윤리에서 문화적인 차원에서 에로스와 생활세계의 원리로 재구성될 수 있다. 프로이드는 특히 리퀘르에게 욕망의 의미론으로 현상학적-해석학의 틀에서 재구성되었다.

 

라캉이 상징계를 무의식 또는 아버지의 이름으로 보는 것은 프로이드의 지향성의 구조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나 현실원리와 의식의 단계는 라캉에게 악화되고 이드의 본능에 끌려다닌다. 라캉은 프로이드보다 인간의 삶을 보다 더 페시미즘의 관점에서 본다.

 

라캉과 헤겔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라캉이 프로이드로 돌아가려는 것은 초기 프로이드에게서 나타나는 이드의 충동본능에 있고 이것을 거울의 단계에서 자아로 설정한다. 여기서 라캉은 후기 프로이드의 현실원리와는 다르게 유아기의 자아의 거울의 단계에서 자신의 몸과의 펴편화되는 소외의 의식을 부각시킨다. 그러나 프로이드에게 거울의 단계는 이드에 속하며, 자아개념은 사회화되는 과정에서 표현된다. 그러나 라캉은 상징계에서 문회사회 질서(아버지의 이름: 대타자)를 통해 자아를 주체로 규정하며, 상징적 남성 지배는 생물학적인 의미에서 오이디푸스 콤프렉스를 대신한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는 생물학적인 개념이이 아니라 상징계의 언어에서 아버지의 금지와 법이 주체에게 억업으로 나타나며, 이것은 아버지의 이름의 권위를 말한다.

 

여기서 필자는 하나의 곤혹스럼을 느낀다. 언어가 사용되는 삶의 형식이나 규칙을 벗어나서 무작위로 정신분석의 영역으로 사용될 경우 필연적으로 개념적 혼란이 발생한다. 그리고 언어는 윤리적 실천이 동반된다. 이러한 애매모호함은 라캉이 철학의 원전을 사용하는데서 그대로 그의 아마추어리즘을 드러낸다. 

 

프로이드와 라캉

 

라캉의 모방욕구의 문제를 다루기위해 프로이드는 중요하다. 프로이드는 인성구조를 이드 (쾌락의 원리; 무의식)-자아 (현실원리; 전의식/ 의식)-초자아(무의식: 사회구성; 이상원리)로 구분하고, 삶과 죽음을 향한 충동(에로스/타나토스)에 주목했다.

 

프로이드는 유아기를 구강기와 항문기 (1-2세)그리고 남근기(3세ㅡ6세)로 분류하고 이 시기에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와 거세공포가 나타난다고 본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와 더불어 리비도의 욕망이 집중되는 자기 중심적 나르시즘이 병행된다. 프로이드는 이드의 억압된 본능과 욕망을 승화시키고, 현실원리(이성과 상식)를 초자아의 이상원리(양심/정언명법)에 적절하게 맞추어 살게 한다. 프로이드는 대부분 이드의 욕망에 주목했고 현실원리를 통해 조정하려고 했다(Gay, ed., The Freud Reader, 603, 642).

 

이드는 무의식의 영역에서 리비도의 충동욕망으로 채워져 있으며, 문화적 가치를 모르며 선악을 넘어서며 도덕과는 상관이 없다. 이드에서 자아가 발전하며 자아는 현실을 지각하면서 이드의 본능욕구와 외부세계를 중재한다. 지각과 의식은 자아의 가장 피상적인 부분에 불과하다. 그러나 지각-의식을 통해 자아는 현실세계를 경험하고 적응하면서 자신의 삶을 보존한다. 자아는 이드를 억압하면서 현실원리르 발전되고 초자아의 권위아래서 외부세계를 표상하는 역할을 한다.

 

이러한 현실원리에서 볼때 쾌락의 만족에 대한 기억은 모든 사유의 기원이다. 과거의 쾌락을 재포착하는 자극과 충동이 사유과정의 배후에 은닉된 추동력이된다. 자아의 발전에서 초자아가 출현하는데 이것은 유아가 부모에 대한 오랜 의존이나 금지나 거세공포 (오이디푸스 컴플렉스)에서 기인한다.

 

사회 문화적 영향은 초자아에 의해 수용되고 양심의 가책이나 기존의 도덕성을 대변한다. 자아는 이러한 억압을 초자아의 명령에따라 수행하며, 이러한 억압은 무의식적 과정으로 변형되며 문명의 발전에서 중요하다.

 

이드의 본능과 충동욕구를 억압하는 조직은 현실원리에 기초한 모든 역사적 형식들과 문화의 지배에 깔려있다. 이런 점에서 라캉이 거울의 단계(6개월-18개월)에서 동일시와 나르시즘이 편짐증세로 나타나는 것은 프로이드의 구강기항문기에 상응한다. 이것은 프로이드의 유아기의 분류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와 결이 다르다.

 

그러나 라캉이 상징계를 무의식 또는 아버지의 이름으로 보는 것은 프로이드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나 현실원리와 의식의 단계는 라캉에게 악화되고 이드의 본능에 끌려다닌다. 라캉은 프로이드보다 인간의 삶을 보다 더 페시미즘의 관점에서 본다. 왜냐하면 거울의 단계에서 나타나는 파편화된 몸에 대한 나르시즘이 유아의 자아형성의 출발이 되기 때문이다. 인간은 처음부터 소외의 단계에서 기만 당하고 편집증의 포로가 된다.

 

라캉은 상상계(자아)-상징계 (주체)-실재계의 틀에서 프로이드의 인성구조를 언어 기호학(시니피앙/시니피에)을 통해 비판적으로 재구성했다. 유아기의 자아의 형성 (엄마와의 동일성 원칙)은 거울의 단계에서 유아기의 나르시즘적인 투사에 상응하며, 자기분열과 오해의 영역을 지적한다. 여기에 헤겔의 소외에 대한 사회철학적 반성을 여과없이 갖다부쳤다. 

 

자아는 거울에 비추는 자신의 몸과의 관계에서 오해와 분열 그리고 소외의 산물이다 (파편화된 몸). 이런 단계에서 라캉은 헤겔의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을 착상시키고 정신 분석학적으로 헤겔의 철학을 변형시켰다. 라캉은 거울의 단계에서 자아의 소외와 분열을 부각시키기위해 헤겔의 주인과 노예의 인정투쟁에서 나타나는 소외개념을 적용한다.

 

여기서 헤겔의 사회철학의 핵심원리인 주인과 노예의 인정투쟁은 자아의 형성과 소외에서 파편화된 몸의 차원으로 유용화 되지만, 헤겔의 인정투쟁에 담겨져있는 지배와 노동에 기초한 욕구충족의 체계변화와 해방의 실천은 실종된다. 그러나 헤겔의 소외의 문제는 상징계에서 환유와 은유를 통해 정신분석으로 개념화된다. 오히려 라캉을 비판하는 것은 헤겔자신이 될 수가 있다. 유아의 소외가 과연 프랑스 혁명전야에 드러나는 소외와 <라모의 조카>에서 드러나는 비이성과 계몽주의와의 대화에 관련성이 있는가? 헤겔의 용어를 요란하게 갖다부친들 라캉의 정신 분석학이 돋보이기라도 할까? 

 

상징계와 기표현상

 

라캉의 상징계는, 프로이드의 이드와 무의식과는 달리, 언어의 습득을 통해 사회화되는 지배의 문화질서와 주체의 결핍과 억압을 지적한다. 상징계에서 주체는 언어를 통해 사물의 질서를 변형하며, 작은 타자들과 더불어 존재한다. 그러나 지배하는 것은 대타자의 담론 즉 상징계의 문화사회질서 (무의식)이다. 상징계의 언어의 기능 즉 아버지의 이름과 법이 나로 하여금 이념과 욕망을 소통하게 하며, 이것은 상징질서이며 대타자이며 집단적인 무의식이다. 나의 욕망은 결국 대타자의 욕망으로 현상한다.

 

이러한 무의식(대타자의 담화)이 나의 정체성을 형성하고 소통하게 하며, 발화자로서 나의 주체를 지배한다. 나는 기표(시니피앙)의 연쇄과정에서 부분적인 의미를 만나지만, 여전히 시니피앙의 사슬망에의해 지배된다. 여기서 거울의 단계에서 표현된 유아의 나르시즘과 동일시는 해겔의 소외로 드러나지만 더 나아가 시니피앙의 환유개념에서 소외는 결핍된 의미(기의)에서 심화된다.

 

환유는 기표의 사슬과 연쇄의 과정을 통해 무한하게 자유롭게 의미를 산출한다. 기의는 기표의 네트워크에 의해 지배되고 결정된다.그러나 상징계에서 이러한 기표체계는 대타자에 의해 지배된다. 이것은 "편지는 항상 목적지에 도착한다"는 표현에서 에드가 알란 포우의 도둑맞은 편지를 통해 설명될 수도 있다. 억압된 것 (편지)는 언제든지 되돌아올 수가 있다. 편지 (letter)는 문자(lettre) 즉 시니피앙이다. 여왕이 국왕이 알면 안되는 비밀편지를 잃어버렸다. 편지의 내용은 비밀이지만 아무도 모른다. 장관이 국왕과 함께 왕비를 방문한 기회에 슬쩍 편지를 훔치고 자기 집의 흔한 서류함에 두었다. 여왕은 이 편지를 찾기위해 경찰총감에게 부탁을 하고 장관의 집을 뒤졌지만 헛수고였다. 결국 전문탐정에게 편지 찾기를 의뢰하고 오만 프랑의 배상금을 제의했다. 그러나 탐정은 장관의 서류함에 구겨진 편지를 쉽게 밝견했다.

 

이러한 스토리에서 편지는 감추어진 원초적 욕망 또는 objet petite a로 표현될 수가 있다. 편지는 사람들을 거치면서 부재로 나타나지만 결국 탐정의 손에서 현재한다. 편지는 주인이 없이 상징계의 질서를 떠 돌아다니며 주체의 욕망을 형성하고 (장관의 정치적 야망, 경찰총경의 승진욕망) 시니피앙으로 부재하면서 마지막에 탐정의 손에 현전한다. 주체는 실종된 편지의 시니피앙의 사슬과 연쇄과정 (환유의 과정)에서 주체들의 욕망의 의미를 드러낸다.

 

욕망구조의 사회적 차원

 

사회적인 측면에서 시니피앙의 환유 즉 의미의 생산과정은 상품생산과정에 비교될 수도 있다. 상품 생산과정에서 부품들이 만들어지고 조립되면서 상품으로 만들어진다. 그러나 상품이 만들어지는 과정과 여기에 투자되는 노동과 자본 그리고 잉여가치에서 이미 소외가 은닉되어있다. 이런 점에서 환유는 소외와 결핍으로 각인된 기표체계로 말할 수가 있다. 여기서 라캉의 시니피앙은 문화질서안에서 소외와 결핍의 측면을 비판적으로 드러내는 기능을 함축한다.

 

지젝은 <증세를 향유하라>에서 실종된 편지를 재해석한다. 지젝에 의하면 이러한 문제틀은 알뛰세에 의해 인식/오인의 논리로 개념화했다. 인간은 인식/오인의 틀에서 국가 이데올로기 기재의 호출에 관여한다. 지젝은 라캉을 "로고스 (문자) 중심주의"으로 간주하고 편지 (대타자)를 상상계/상징계/실재계의 전거에서 인식/오인의 논리로 독해한다. 편지가 나에게 도착할 때 나는 대타자의 이데올로기 호출 (민족, 민주주의, 정당, 신, 등 )을 받는다. 나는 일한 대타자의 호출을 인정하고 내면화함으로써 나는 스스로 오인한다. 여기서 지잭은 데리다의 라캉 비판을 거절한다: "편지는 수신자가 없다" (Enjoy Your Symptom, 12),

 

상징적인 세계에서 편지는 시니피앙의 가족 유사성 (비트겐슈타인)처럼 작용하며 편지를 보낸 사람은 수신자로부터 답신을 받는다. 억압된 것은 항상 되돌아온다. 지젝은 헤겔의 "아름다운 영혼"을 거대언어와 관련하여 다룬다. 헤겔은 아름다운 영혼을 세상의 타락이나 더러움에서 자유로운 순수한 거대언어로 말한다. 라캉은 헤겔의 아름다운 영혼을 히스테리 증상의 표현으로 본다.

 

히스테리 증상은 대타자의 조작과 착취로 인해 온다. 지잭은 히스테리 증상이 대타자의 요구에 지나치게 순응하고 희생자로서 괴로워하는데서 기인한다고 본다. 지젝은 헤겔의 아름다운 영혼을 어떻게 세상의 악함에 참여하고 대결할수 있는 지를 고려한다. 편지는 권위를 인정하는 사람에만 도착하기 때문이다. 대타자의 메타언어의 불가능성은 억압의 회귀와 관련된다 (ibid., 13-4).

 

더 나아가 지젝은 라캉의 기표의 논리를 해석학의 의미지평에 비판적으로 보충시킨다. 유아의 탯줄은 하이데거의 전이해에서 생각될 수 없다. 여기서 가다머의 언어를 통한 이해의 보편적 요구는 제동이 걸린다. 유아의 탯줄의 경험은 언어의 보편적 지평안에 들어오지 않는다. 이것은 정신분석의 영역이고 해석학의 보편요구에 제한을 가하고 문제틀한다.

 

다시 말해 억압의 증세는 메타언어로 생각할 수 없고 징후발견적으로 분석될 수 있다. 인간은 열려진 의미지평이 아니라 닫혀진 지평 즉 과거의 욕망구조안에서 사유하고 일상의 삶을 추구한다. 인간의 삶의 해석은 중층결정적으로 분석되며, 지젝은 마르크스의 변증법에서 나타나는 관계들의 총체를 도입한다. 그러나 실재계에서 편지는 누구에게나 도착하는 운명이며 이것은 죽음으로 표현된다 지젝은 에드거 앨런 포우의 도둑맞은 편지를 라캉과 알뛰세의 이데올로기 호출을 접합시켜 징후발견적 해석을 열어 놓는다. 이것은 지젝의 중요한 기여에 속한다

 

지젝에 대한 비판적 반성

 

그러나 라캉-지젝의 헤겔 정신분석의 길과 병행하여 비판이론 전통에서 마르쿠제는 <에로스와 문명>에서 헤겔-마르크스의 변증법과 노동문제를 프로이드의 정신분석의 틀에 접합시켰다. 하버마스 또한 가다머와 해석학 논쟁에서 언어이해의 보편적 요구에 이데올로기 비판을 제기하고 알프레드 로렌조의 정신분석을 심층 해석학으로 발전시켰다. 그러나 지젝은 이러한 비판이론과 정신분석의 비판적 만남을 충분히 검토하지 않는다.

 

내가 보기에 라캉-지젝의 헤겔해석에서 아름다움 영혼을 히스테리 증상의 표현으로 보는 것은 지극히 피상적이다. 헤겔의 아름다운 영혼은 스피노자나 쉴라이에마허 또는 신비한 종교체험의 영역에 있는 자들이 변증법적으로 신을 매개하지 않는다고 비판한 것이다. 절대지의 순환적 시스템에서 상호인정을 위해 아름다운 영혼은 사회문화적으로 매개가 되고 지양될 필요가 있다. 그러나 헤겔의 비판과는 달리 스피노자나 쉴라이에르마허는 쉽게 바사회적으로 치부되기가 어렵다. 이들은 오히려 사회경험적이고 윤리적으로 매개한다. 스피노자의 영원성의 관점은 무우주적 사랑으로 나타나며 심정윤리로 등장한다. 그리고 그의 양태에 대한 평등주의적 관점은 해겔의 정치철학보다 더 민주주의적으로 앞서 있다. 쉴라이에르마허는 일찌기 노동운동에 관여하고 사회경험을 그의 신학에 통전한다.    

 

이것은 헤겔이 간과한 것이다. 헤겔의 관점은 지젝이 얼렁뚱당 넘어가는 식으로 히스테리 증세의 주체가 아니라 종교적 신비체험의 영역에서 역사와 사회로 외화되지 않는 측면에 주목한다. 헤겔의 비판은 피히테의 자기동일성 (나=나)이나 또는 괴테의 아름다운 영혼을 향한다. 과연 라캉-지젝이 헤겔을 이해하고 그의 택스트를 사용하는가 아니면 자신들의 주장을 위해 하이데거 흉내내면서 탈취하며 모자이크 방식을 추종하는가?  

 

더우기 쉴라이에마허의 절대의존감정은 <그리스교 신앙론>에서 그리스도의 화해를 기초로 보편적으로 전개된다. 더우기 스피노자의 영원성의 관점은 헤겔의 절대지의 인정을 오히려 포함하고, 보다 더 적극적으로 정치 사회문제에 관여한다. 헤겔과 스피노자의 관계는 단순하지가 않다. 적어도 헤겔의 절대지는 도둑맞은 편지처럼 모든 역사의 전개과정에서 정신의 운동이 운명처럼 도달하는 목적지가 아니다.

 

절대지는 신학적으로 표현하면, 그리스도의 화해와 죄의 용서를 의미하며 역사의 전개과정에서 소외되고 상처를 치유하는 의미를 갖는다. 십자가의 용서는 누구를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와의 화해로 나타났다. 이것을 헤겔은 절대적으로 보편의식으로 표현하지, 헤겔도 이러한 절대지에 도달한 철학자가 아니다. 절대지는 그리스도의 화해를 철학적으로 절대적 보편의식을 표현한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그리스도의 세계와의 화해를 말하지만 여전히 화해되지 않은 주인없는 폭력의 세력을 언급한다.

 

스피노자는 유대인 윤리적 유일신론의 전통에 서 있고 그리스도를 높게 평가했지만 개신교로 전향을 의도가 없다. 보편적 화해는 세계와 더불어 진행되며 모세의 토라가 폐기되는 것이 아니라 병립된다. 토라와 화해의 변증법에서 스피노자는 자연의 삶에서 평등 민주주의를 개념화하고 시민국가와 모든 다른 종교와 문화의 가치를 인정하는 보편종교를 구상한다.

 

라캉-지젝의 헤겔헤석에서 시니피앙 사슬와 연쇄에서 내용없는 공허한 단어들이 앙상하게 유령처럼 돌아다니는 현상이 나타난다. 시니피앙이 정치 사회적인 영역에서 진정성을 가질려면, 그것은 역사 사회적인 경험과 내용을 헤겔철학으로부터 충분히 검토하고 시니피앙으로 사용하고 비판하는 것이 의미가 있다. 역사 사회적인 삶의 경험과 내용이 없는 시니피앙은 추상적이고 공허한 픽션에 불과하다. 이것은 칸트철학의 문법에 속한다.

 

대타자의 무의식

 

라캉의 상징계에서 무의식은 꿈의 이미지처럼 언어로 구성된다. 무의식과 언어의 구성 관계는 프로이드와 다른 방향을 지적한다. 프로이드에게서 무의식은 개인의 꿈의 세계에 위치하고 오이디푸스 신화의 거세공포와 원초적 억압이 들어와있다. 무의식은 생물학적이며 사물표상에 속하지만, 사물과 단어표상은 전의식과 의식의 영역에 속한다. 꿈에서 나타나는 상징 이미지를 프로이드는 욕망충동으로 파악하고 사물표상의 전치 (다른 표상으로 넘어감)나 응축 (압축)을 통해 꿈의 내용에서 의미를 해석한다. 이런 꿈의 해석에서 다차적 계기들의 결정은 전치와 응축을 통해 중충적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라캉에게서 무의식은 상징계의 문화질서안에 언어처럼 구조되어있다. 꿈에서 나타나는 모든 이미지 표상이나 전치나 응축은 욕망충동을 드러내지만 단순히 사물표상이 아니라 상징계안에서 언어현상(시니피앙의 연쇄과정과 의미)으로 파악된다. 라캉은 프로이드의 무의식의 꿈의 세계를 사회로 이동시키고, 초자아는 상징계 다시말해 언어화된 대타자, 즉 문화를 의미한다. 뮬론 이런 라캉의 틀은 프로이드와 다르지 않다. 프로이드에게서 문화는 이드의 욕망을 억압하고 자아의 현실원리와 초자아의 권위를 인정하면서 출현한다. 그러나 프로이드는 현실원리를 부각시키고 모든 것이 상징계의 무의식으로 통합시키지 않았다.

 

자아의 세계 (현실원리)는 라캉의 주체의 상징계와는 달리 문화의 의식의 세계를 강조하고 무의식의 초자아 (양심, 법)으로 분류한다. 이점에서 라캉은 프로이드를 야콥슨의 환유와 은유에 기초한 언어학을 통해 프로이드를 재해석하고 어떤 면에선 넘어서서 재창조한다고 볼수가 있다. 상징계의 문화질서는 프로이드에게 초자아의 이상원리로 나타나고 오이디푸스의 원초적 억압에 기초된다. 프로이드는 이드의 욕망의 자리에 생의 충동과 죽음의 충동이 공존해있음을 보았다. 문명은 욕망의 억압을 통해 불만을 운명으로 가질 수 밖에 없다

 

그러나 라캉은 문명(초자아)을 무의식의 사회구조로 전치시키고 대타자의 담화가 상징계안에서 살아가는 주체를 형성하고 지배하는 것으로 기호화한다. 주체는 유아기의 파편화된 자아와 대타자의 담화의 지배와 억압의 사이에 위치한다. 라캉이 무의식의 꿈의 세계를 상징계에서 파악하는 이유는 시의 상징언어에서 친화력을 보기 때문이다. 예를들어, 시는 언어의 전치나 압축을 통해 내용을 메타포로 표현한다. 환유는 프로이드의 꿈에서 다른 사람에게 대한 전치나 대체와 같다. 언어는 무의식의 조건이며, 무의식 (꿈의 그림내용과 표상: 응축과 전치)은 시의 언어처럼 (메타포와 환유) 구조화된다 (Lacan, Écrits, A Selection, 303).

 

사회화된 주체는 시니피앙의 연쇄를 통해 의미작용을 하지만, 그러나 무의식의 사회구조는 대타자의 담론과 욕망에 의해 나의 시나피앙과 욕망을 산출하고, 제한하고 지배한다. 상징계는 주체의 모방충동에 부재나 결핍와 갭 또는 신경증적인 징후(흔적)를 만들어낸다. 무의식(지배의 상징구조)이 대타자의 담화에 의해 설정된 것이라면, 주체는 이미 언어와 규칙의 네트워크 (소쉬르의 랑그: 문법체계)에 기입되어있다. 상징계의 담화는 문법체계처럼 나의 시니피앙과 욕망을 지배한다. 나는 상징질서(대타자)의 담화의 권위에 조건되고, 나의 욕망은 시니피앙의 연쇄 그물망에 엮어져있고, 사회 문화적 담화을 모방하는 잉여주이상스를 산출하는 미메시스적 존재가 된다. 그런데 과연 꿈이 언어인가? 어떤 의미에서 의미작용화를 하는가? 언어는 공적인 것이며 그런 점에서 사회적인 규칙과 윤리적 관습을 쫒는다. 여기서 의미산출이 생겨나고 삶의 새로운 형식들이 출현한다. 종교언어와 스포츠 게임의 언어는 서로 다르다.  이러한 언어의 다름과 사회적 기능이 과연 라캉이 애지중지하는 사적인 꿈의 이미지  언어로 환원되어서 상징계를 대변하는 무의식으로 설정이 가능할 수 있는가? 나는 사회학자로서 전혀 아니라고 본다.

 

 미메시스의 저항

 

미메시스는 라캉에 의하면 지배구조에 대항하는 예속된 자의 욕망충동과 희열(jouissance)을 표현할 때 비판적이며 해방적일 수 있다. 라캉에게 원초적 주이상스는 유아기의 자아의 거울의 단계에서 소외와 파편화가 되고, 상징계의 주체로 이행할 때 원초적 주이상스는 영구하게 결핍으로 남는다. 이것은 objet petite a로 표현되며 실재계에 존재한다. 실재계는 상징계의 무의식의 중심에 속하지만 배제된 영역이다. 원초적 주이상스는 유아기의 어머니에 대한 욕망의 결핍으로서 정상인에게 접근할 수가 없다. 그러나 상징계의 주체가 얻는 주이상스는 대타자의 담화의 권위 아래서 산출되는 잉여물이 되며 원초적 주이상스의 대리만족으로서 파생적인 것이다

 

라캉은 시니피에 (기의: 의미)에 대해 시니피앙 (기표:상징계)의 우위를 둔다. 실재계는 유아기의 상상계에서 일어난 거세된 억압으로서 대상 a, 즉 objet petite a로 표현된다. 어머니로부터 분리 또는 소외되는 과정에서 네 가지 쾌락 (구강, 항문, 부모의 시선과 음성)이 거세된다. 이것은 실재계로 이전되고 구멍처럼 상징계를 둟고 들어온다. 이것은 죽음충동이나 강박증세 또는 망상이나 신경증에 설정되며 나의 의식의 구멍을 낸다. 이것은 유아기의 상상계의 어둠이나 부재처럼 여전히 언어나 의미를 넘어서 있으며 말할 수도 기록될 수도 없다 (Lacan, The Language of the Self, 92).

 

라캉: 상징계와 언어현상

 

라캉은 상상계(자아)-상징계 (주체)-실재계의 틀에서 프로이드의 인성구조를 언어 기호학(시니피앙/시니피에)을 통해 비판적으로 재구성했다. 유아기의 자아의 형성 (엄마와의 동일성 원칙)은 거울의 단계에서 유아기 (6 -18개월)의 나르시즘적인 투사에 상응하며, 자기분열과 오해의 영역을 지적한다.

 

자아는 거울에 비추는 자신의 몸과의 관계에서 오해와 분열 그리고 소외의 산물이다 (파편화된 몸). 이런 단계에서 라캉은 헤겔의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을 착상시키고 정신 분석학적으로 헤겔의 철학을 변형시킨다. 라캉은 거울의 단계에서 자아의 소외와 분열을 부각시키기위해 헤겔의 주인과 노예의 인정투쟁에서 나타나는 소외개념을 적용한다.

 

여기서 헤겔의 사회철학의 핵심원리인 주인과 노예의 인정투쟁은 자아의 형성과 소외에서 파편화된 몸의 차원으로 유용화 되지만, 헤겔의 인정투쟁에 담겨져있는 지배와 노동에 기초한 욕구충족의 체계변화와 해방의 실천은 실종된다.

 

라캉의 상징계는 프로이드의 이드와 무의식과는 달리 언어의 습득을 통해 사회화되는 지배의 문화질서와 주체의 결핍과 억압을 지적한다. 상징계에서 주체는 언어를 통해 사물의 질서를 변형하며, 작은 타자들과 더불어 존재한다. 그러나 지배하는 것은 대타자의 담론 즉 상징계의 문화사회질서 (무의식)이다. 상징계의 언어의 기능 즉 아버지의 이름과 법이 나로 하여금 이념과 욕망을 소통하게 하며, 이것은 상징질서이며 큰대타자이며 집단적인 무의식이다. 나의 욕망은 결국 대타자의 욕망으로 현상한다.

 

머릴로 퐁티의 신체 현상학

 

이 지점에서 라캉은 머릴로 퐁티와 만날 수가 있다. 퐁티는 프로이드의 무의식의 이론에 긍정하고, 특별히 무의식의 내용은 의식의 외부에 있는 모든 것으로 파악한다. 이것은 욕망과 느낌과 감정과 무의식적인 내용을 포함한다.

 

다시말해 퐁티에게 무의식은 꿈의 세계처럼 의식의 내면에 존재하지 않는다. 무의식은 몸과 마음이 공존하는 본래적인 자리와 상태를 말한다. 무의식은 나의 의식안에서 타자의 음성이 담겨져있다. 무의식은 개인과 세계의 상호적인 엮어짐과 과정에서 파악된다. 이러한 교차적으로 엮어지는 것은 '살"의 개념으로 기술될 수가 있다.

 

다시말해 몸은 개인과 세계의 공동본질이며, 인간은 신체의 주체로서 타자와 세계와 특별한 관계 즉 '살'로 구성된다. 나의 몸과 세계는 서로 포개져 있으며 서로 지각하고 살을 통해 서로 침투한다. 이념은 몸의 가시적인 부분이며, 의미와 욕망은 비가시적이다. 표면과 심층의 관계는 교차적으로 연결되고 현존재는 이러한 교차와 파장에 엮어져있다. 보이지않는 것은 의미화될 수 없는 다른 차원을 지적하며 살의 심층과 이념의 근원으로 작용한다.

 

표면과 심층은 변증법적 관계안에 있다. 의식과 무의식은 몸의 두가지 형식 즉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관계처럼 서 있다. 무의식은 개인과 세계의 교차 텍스트안에 존재하며, 의식은 무의식에 의해 재현되는 의미의 표현이다.

 

언어는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라 메타포와 시적언어에서 의미를 표현하며 문학작품에서 칭조적인 언어로 표현된다. 메타포는 구현된 몸과 세계와의 교차적 삶에 관련된다. 메타포는 자각의 현상학에서 나와 세계와의 대화의 중심에 서 있다. 지각의 진리는 이미지-픽션이 아니라 구상력을 통해서 의미구성에서 파악된다. 현상학의 존재론은 문학텍스트에 대한 세밀한 독해를 요구한다. 언어는 사회적 삶에 근거된다.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은 역전가능성이 있으며 문학의 창조적 언어에서 나타난다 (The Visible and the Invisible, 23). 언어는 언어의 의식을 전제로 하며 그것은 의식의 침묵이며 담화의 세계리는 무의식로부터 나는 반성이전 단계에서 단어와 의미를 받는다 (Phenomenology of Perception, 403).

 

세계는 무의식으로서 언어로 구조되어있고 나는 세계와의 대화를 통해 의미의 심층에 접촉하고 창조적 언어로 세계의 무의식에 대한 지각의 일차적 경험과 참여를1 표현한다. 퐁티의 존재의 파장과 세계와의 교차 그리고 창조적 언어활동은 라캉에게 공명한다.

 

라캉의 주체는 상징계의 무의식안에서 살아간다. 무의식(대타자의 담화)이 나의 정체성을 형성하고 소통하게 하며, 발화자로서 나의 주체를 지배한다. 나는 기표(시니피앙)의 연쇄과정에서 부분적인 의미를 만나지만, 여전히 시니피앙의 사슬망에의해 지배된다. 라캉의 상징계에서 무의식은 꿈의 이미지처럼 언어로 구성된다. 무의식과 언어의 구성 관계는 프로이드와 다른 방향을 지적한다.

 

그럼에도불구하고 퐁티는 라캉처럼 존재의 엮어짐이 무의식의 기표의 사슬과 연쇄작용에서 꼭두각시처럼 활동하는 것이 아니라 신체의 지향성과 생활세계 안에서 타자와의 활동성을 통해 적극적인 의미를 갖는다. 무의식은 라캉이나 프로이드처럼 단순히 억압의 장소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