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공 신힉은 포스트 라캉의 정치비판과 바울 택스트 해석을 대화의 전거로 삼는다. 이것은 교차 텍스트의 해명에 근거하며, 비기독교적 또는 무신론적인 정치 이론가들의 종교적 접근을 공론장에 소통시키고 시민사회의 민주주의와 해방을 향한 연대의식을 함양한다. 공공 지성인의 역할은 시민사회의 영역을 떠나서 성립되지 않으며, 국가의 강압 이데올로기 기재나 관료지배로부터 생활세계의 온전성을 방어하고 시민사회의 다차적 필드들에서 공공선 거버넌스를 세워나가고 위계질서와 특권을 철폐하는 것을 지향한다. 진정한 민주주의는 비판적 태도로 특징되며, 주변부로 밀려나간 자들의 권리를 "가능하게 하는" 정의 (enabling justice) 를 다름의 원리를 통해 실현해나간다.
크리스테바: 기호의 정치
라캉은 예속된 자들에게서 지배문화와 권위에 저항하는 욕망충동과 희열을 비판과 자유와 해방의 기능으로 보았다. 라깡의 헤겔-프로이드 문제틀은 크리스테바에 의해 해석의 정치학으로 개념화되고 마르크스의 실천과 프로이드의 치유를 연결한다. 크리스테바는 <정신분석과 도시국가>에서 파시즘과 스탈린 주의의 abjet를 보면서 스토아 철학의 해석 즉 인식론과 윤리적 태도로 해석의 정치학을 시작한다. 스토아 철학에서 해석은 연결하는 것이며, 인간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일들들 해석하면서 비로소 태어난다.
크리스테바는 해석을 기호학과 연결하며, 사건-사인은 시니피에에 연결되며 '말하는' 주체는 여기에 따라 행동한다. 역사적 사건-시니피앙이 시니피에에 접합되고 더 이상 해석될 것이 없을 때 주체는 말한다. 알려는 주체는 욕구의 존재이며 욕구와 지식의 연계는 여전히 인식기능의 장애에 노출되어있다.
프로이트에 의하면 지각-지식 (해석이나 장애에서 든지간에)은 항상 그리고 이미 결핍에 의해 특징된다. 이러한 결핍은 상징화될 수 없고 기표화 될 수 없는 영역에 있으며 주체는 타자의 욕구에 연결되어 스스로를 의미화한다. 타자의 욕구는 주체에 도전을 유발하며 여기서 주체의 인식장애는 왜곡과 이탈로 나타난다.
말하는 주체는 결핍에 노출된 "마이너스 자아" (minus I)를 의미한다. 장애담론은 욕구에 기초되며 역사적으로나 사회적으로 거절된 실재의 자리에 변형과 이탈을 통해 주관적으로 상정된 '정신 착란적인' 진리를 삽입하려고 한다. 이러한 욕구는 객관적 대상이나 타자를 사전봉쇄하고 완벽한 주이상스의 자리에 앉는다 (The Kristeva Reader, 307-8).
정신분석적 해석은 정치적 해석과 유사점을 갖는데, 후자의 경우 군중의 유토피안적 욕구에 이데올로기적 담론을 제공한다. 대중의 에너지를 집결하고 동원령을 위한 정치해석은 개혁이나 혁명 또는 민중선동으로 막을 내린다. 마르크스에게 세계는 해석이 아니라 인간의 실천에 의한 변혁대상이지만 세계자체는 고려되지 않는다 (ibid., 313).
이것은 크리스테바의 탁견에 속한다. 마르크스는 세계의 변혁을 말하고 세계를 해석하기위해 정치경제학에 몰두했지만, 담론이 갖는 권력관계와 물질적 이해의 역동성을 계급과 신분의 분화과정을 보면서 어떻게 사회 시스템으로 장착되는 것을 소홀히 했다. 물론 마르크스 자신은 그의 추종자들에 비해 개혁과 혁명의 관계를 유연하게 이해했다. 그러나 크리스테바의 정신분석에서 인간의 해석이나 실천은 분리되는 것이 아니라 생활세계안에서 이미 그리고 항상 움직이며 이러한 원초적 세계와의 감정이입이나 동일화가 없는 해석은 정신착란 담론이 되거나 실천은 전체주의 폭력으로 귀결된다. 마완의 해석, 미완의 실천에서 언어의 구조, 담론, 기호는 해석의 다원성에 기초한 진정한 삶을 구성한다.
크리스테바의 분석적 해석에서 정신장애의 담론을 다룰때 판단 또는 해석의 중지를 내리고 담론욕구의 타재성 ㅡ광기와 무의미성ㅡ에 주목한다. 임상과정에서 전이와 역전의 과정을 통해 명명될 수 없는 것, 즉 원초적 모성의 코라와 부성의 이상성의 빛에서 치유의 의미가 돌출한다. 이것은 근원적 삶의 세계자체로 돌아가는 기호학적 판단 중지와 사랑의 고고학이며 정신분석의 윤리적 태도를 특징짖는다.
크리스테바는 정신착란의 담론과 주이상스가 만들어내는 전체주의 거대의미가 반유대주의 저술과 히틀러 파시즘 또는 스탈린주의나 모택동주의 이데올로기의 토대로 본다. 이것은 이항의 대립 또는 진영논리로 출몰하며 쾌락원리와 현실원리의 경계를 허물며 죽음충동을 문화사회적 영역의 상징계로 통합한다.
사회주의 국가(구소련과 중국의 모택동 주의)에서, 특히 이전 동구권 사회주의 국가에서 여성은 행정부나 산업 또는 문화영역의 권력에 참여하면서 나르시즘에 사로잡힌다. 여성들은 전체주의 정부의 기존질서를 옹호하는 수호자들로 변신하고 기존질서의 권력구조에 자신을 동일시하는 가장 열렬한 하수인들이었다. 이것은 히틀러 파시즘이나 칠레 군사정부에서도 여실히 나타난다.
크리스테바에 의하면 이것은 테러에 붙잡힌 권력이며 나르시즘과 편집증적 현상이다. 이러한 권력테러는 서구사회에서도 볼 수 있지만, 특히 보편 평등주의나 여성의 급진적 다름에 기초한 페미니즘에서도 나타난다. 이것은 상징적 문화질서의 외부에 머무는 아-토피아적 현상(여성사회운동)으로 등장한다.이러한 유형은 변질된 성차별주의로 막을 내린다.
크리스테바는 라캉의 도전적인 테제를 수용한다: 대문자로서 여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사회주의 이데올로기에서 인간은 생산양식 (생산력과 생산관계)에 위치되지만, 사회의 합리화과정(재생산)과 상징적 문화질서를 간과한다. 이러한 전체주의 사회에서 모든 여성은 동질화된다. 이것은 계몽주의와 인간주의 영향권에 있는 서구의 페미니즘 운동에서도 유사하게 나타난다. 아버지의 이름을 사전봉쇄 (foreclosure)하면서 권력에 스스로 동일화하는 가부장적 모방욕구는 결국 여성으로 하여금 원초적 모성 (코라)을 살해해버린다.
중국여성과 상상적 동일화
크리스테바는 <중국여성>에서 모택동주의에 열렬한 지자자들이었던 여성 홍위병들을 사실주의적으로 다루지 못했다. 모택동의 지도아래 중국여성의 능력과 열정에 대한 크리스테바의 낭만주의적 기대감이 나타난다. 그러나 슈피박은 크리스테바가 중국여성과 역사와 종교를 기술할 때 서구와 중국을 이항의 대립으로 나누고 유럽의 오리엔탈리즘울 대변 한다고 비판했다. 그러나 이항의 대립논리(데리다/에드워드 사이드)나 표상적 대변은 인식론적으로 실재를 개념적으로 파악하지 못한다. 비난대상이 아니다. 누가 언어를 통해 실재를 남김없이 파악하는 가? 더우기 에드워드 사이드의 오리엔타리즘의 허구가 여기저기에서 파열음으로 나타난다. 사이드는 자신이 옹호하는 이슬람의 역사와 문명을 이해하지도 못한채 서구사람들이 대변하는 이슬람의담론을 여과없이 순응해서 자신의 오리엔탈리즘을 만들어냈다. 이것은 1세대 포스토콜리얼 문예비평가들의 한계로 폭로된다.
정치적인 목적으로 동양의 타자를 서구의 제국주의적 자아의 관점에 포섭하고 지배하지 않는 한 슈피박의 오리엔탈리스트 비난은 적합하지 않다. 슈피박 역시 중국의 종교나 역사나 여성문제에 전문적 지식과 경험이 없고, 이들을 위해 대변할 이유도 없다. 아시아 문제라고 해서 인도 출신 슈피박이 대변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이항의 대립이나 대변논리는 사미르 아민이나 타릭 라마단에 의해 에드워드 사이드에게 역공으로 부쳐진다.
사이드는 자기가 대변하는 이슬람에 대해 아마추어 저널리즘 정도에 불과하다.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은 아민의 <유럽중심주의>와 비교 검토될 필요가 있고 이항의 대립이나 대변형식으로 동서양의 비교 문화연구를 사전봉쇄하는 것은 크리스테바가 보기에 나르시즘이나 편집증적 태도로 현상할 수있다. 크리스테바의 문제는 이항의 대립의 덫이 아니라 중국의 역사와 종교, 가족과 혼인법을 검토할 때 두터운 기술에서 실패했다.
이 지점에서 나는 크리스테바의 교차텍스트를 공공신학의 해석방법으로 차용하고, 크리스테바를 넘어 사화과학적인 틀로 명료화한다. 크리스테바의 정신분석학은 기호적이며 사회문화적인 탑 다운 방식을 가지고 있지 않다. 사회학적 원근법보다는 정신분석학적 관점주의가 부각된다. 서구의 페미니즘이나 사회주의 이데올로기에서 원초적 코라와 아버지의 이상성을 사전봉쇄하는 것은 상징계가 아니라 실재계의 환각으로 자리한다. 장애담론과 나르시즘 그리고 편집증세는 거대의미와 하나의 이데올로기 이름을 위해 (이항대립, 대변논리) 여성의 상징적 사회계약(어머니, 아내, 간호원. 의사, 선생 등)을 허물어 버린다.
이러한 전체주의 담론은 요한복음의 서설을 거절한다. 태초에 말씀이 아니라 감정이 있었다. 말씀은 감정을 대신하면서 나중에 등장했다. 감정과 본능충동의 자리는 중오를 기초로 아브제트의 자리에서 극단적 허무주의 형식으로 나타난다 (ibid., 317). 이것은 데리다의 해체주의를 추종하는 포스트콜로니얼의 담론에 의심의 기호학을 갖는다.
포스트콜로니얼 논쟁에서 지젝은 크리스테바의 입장에 가깝다. <The Puppet and The Dwarf>에서 지젝은 말한다. 학계의 좌파들은 불가능한 요구들을 히스테리컬하게 주장하면서 자본주의 시스템에 폭탄을 던진다. 이들은 이런 불가능한 요구들을 잘 알고있고 국경을 개방해 이민자들을 수용하라고 말한다. 이로인해 백인 노동계급의 반동이 시작되고 기업인들은 대학펀드를 중단하고 학계의 좌파 지식인들이 누리는 특권에 비상이 걸린다. 포스트콜로니얼 연구기금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동시에 자신들의 급진적 양심을 위선적으로 표현한다. 이것은 마치 68혁명 구호와 비슷하다. "Soyongs realists, demandong l'impossible!"
바디우와 지젝: 사도 바울
크리스테바의 기호학의 정치는 어거스틴과 카리타스에에 기초한다. 그것은 잡단주체의 이기주의와 나르시줌에서 출현하는 큐피디타스를 비판한다. 그러나 공산주의자 바디우와 지젝은 사도 바울에게서 혁명적 주체를 보려고 한다. 바디우는 라캉의 주체 페시미즘에서 돌아서서 그의 존재 사건론에서 주체의 혁명성괴 혁명에 대한 믿음을 강조한다. 그러나 지젝은 바울의 율법비판에서 즉음충동이 나타나며 '존재-사건'이 출현하는 것을 본다. 이런 점에서 지젝은 충살한 라캉의 제자로 남지만 바디우의 모택동주의룰 지지한다.
< From Cold War to Hot Peace>에서 지젝은 우쿠라이나 전쟁을 언급하면서 러시아의 푸틴이 우크라이나를 침략하고 시민들을 학살한 책임을 묻는다. 푸틴은 제국주의 길을 취하며, 서구의 좌파들이 푸틴의 위협에 대해 충분히 고려하지 못한 오류를 범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바디우는 애매한 태도를 취하지만 친 러시아적 경향을 보인다. 그러나 이들은 정치적으로 순진해보인다. 트럼프와 푸틴이 쳐놓은 덧과 신중상주의로 회귀라는 자본축적의 사이클의 단절을 사실주의적으로 보지 못한다.
바디우에 의하면, 진리는 국가의 지배관리에 포섭되지 않는 비일관적 다수 즉 집단주체의 국가에 저항하는 실천에서 혁명의 사건울 통해 스스로 드러낸다. 그는 <사도 바울: 보편주의 토대, 1997> 바울에게서 그의 사건 존재론의 모델을 본다. 사건은 역사 안에서 일어나며 주체의 실천을 요구한다. 그것은 진리로 나타나며 존재가 된다. 여기서 사회적 존재가 자본주의 질서를 전복시켜 나가지만 반드시 혁명이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혁명의 미래를 위한 충실성과 믿음을 요구한다.
바울의 차별없는 공동체와 보편주의는 바디우에게 중요한 해석의 키워드이다. <존재와 사건>에서 바디우는 집단주체의 실천과 혁명성을 기초로한 사건 존재론을 바울의 다메석 사건에 적용한다. 바울은 혁명 주체의 인물로로 파악된다. 바디우의 보편주의는 무한한 다수를 구성하는 원리에 속한다. 보편주의는 일자에 근거한 동일성에 반하여, 사건을 결단하는 전투적인 주체성을 창조한다.
바디우의 보편주의는 바울의 율법비판에 주목한다. 바울은 비일관적 다수에 속한다. 바울의 은총의 보편주의는 모두에게 적용되며 율법의 유대적 특수성에 대립한다. 은총의 보편주의는 공산주의적이다. 바울은 교회를 조직하고 서신을 보내면서 혁명적 주체의 탐구를 이어나간다. 바울은 차별과 특권을 철폐했다. 죄는 율법으로 인해 욕망에서 나타난다. 이것은 죽음의 길로 귀결된다. 구원은 반복되는 죄의 욕망으로부터 해방이다. 율법과 죄가 일방적으로 동일시 된다.
'진리-사건'은 바울의 사유의 힘 즉 부활에서 나타나며 그리스도-부활사건은 본잘적으로 죽음의 제국인 율법의 폐기이며 성령의 법, 즉 사랑의 법이 나타난다. 그러나 바디우와는 달리 바울은 안티노미안이 아니라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며 유대의 토라는 은총안에서 자리를 갖는다. 물론 바디우의 혁명주체는 바울에게 적용될 수 있다. 바율은 하나님 나라의 혁명을 위해 빌레몬과 오네시모의 사건에서 로마의 제국의 신학의 법을 부수고 들어갔다. 갈라디아의 차별없는 공동체는 유니온 신학교 브리키테 카 교수가 강조하는 것처럼, 토라와 복음의 대립이 아니라 로마제국의 법에 대한 비판에 연결된다. 바울의 칭의론은 하박국의 토라에 기초한다. 그리고 바디우는 급진적 사회주의자 시절 칼 바르트가 쓴 <로마서 주석>에 공명을 갖기도 한다.
지젝은 <까다로운 주체, Ticklish Subject>에서 로마서 7장에 나타나는 바다우의 바울해석을 비판했다. 십자가와 부활의 대립을 지젝은 헤겔의 변증법과 라캉에 근거해 독해한다. 지젝에 의하면 바디우의 진리-사건은 급진적으로 새로운 시작을 일방적으로 즉 보편주의적으로 해석한다고 말한다 (Zizek, Ticklish Subject, 146). 바디우에게 보편주의는 그의 공산주의의 원리로 작동한다.
라캉의 정신분석에서 볼 때 죽음충동과 진리-사건은 분리되지 않는다. 율법을 욕망의 자동기계로 파악하는 것은 라캉의 죽음충동에 속한다. 지젝에 의하면, 로마서 7장은 죽음충동을 피해가는 텍스트로 볼 수 있다. 지젝은 라캉의 <정신분석의 윤리>에서 로마서 7장의 독해를 돌출했다. 사태는 바디우가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훨씬 복잡하며, 바울은 율법에대한 특별한 관계를 피해가는 데 있다.
그것은 변질된 율법의 덫을 피해가는것이다. 변태적 율법은 난잡한 성적 실천을 의미하지 않는다. 지젝에게 변태는 부정적인 의미를 갖지만, 여성의 히스테리는 긍정적 의미를 갖는다. 상징계의 대타자(법)에 대한 히스테리 반응은 끊임없는 질문이며 대타자가 원하는 것을 벌견하려고 한다. 이것은 변화를 위한 가능성을 갖는다.
이러한 히스테리 질문에서 율법이 금지하는 것을 깨뜨리는 주체의 주이상스가 중가한다. 이것은 역설의 변중법이다. 로마서 7장의 바울은 히스테리 주체이며 로마서 3장 8절에서 나타난다: "좋은 일이 생기게 하기 위하여 악한 일을 하자." 지젝에 의하면 바울은 활력을 상실한 도덕주의자가 아니다. 오히려 바울은 율법의 금지과 욕망의 위반의 악순환에서 나타나는 죽음충동을 부수려고 한다 (ibid., 149). 그러나 지젝과는 달리, 바울은 자신의 은총과 율법의 변중법을 남용한 저둘 즉 영지주의적 안티노미안들에 대한 비판으로 한 말이다.
바디우가 죽음충동을 넘어서야할 문제로 본다면. 지젝은 거기서 라캉처럼 원초적 주이상스를 통해 상징계의 법과 지배로부터 다커플링하는 해결책을 본다. 이 지점에서 바디우의 '진리-사건'이 출현한다. 죽음충동은 진정한 혁명적 주체를 구성한다. 물론 이것을 라캉은 안티고네의 비극에서 보았다. '진리-사건'안에 죽음충동의 비어있음이 존재한다. 이러한 집단적 부정성이 대타자의 질서를 중지시킨다 (ibid., 162-3).
지젝과 로젠츠바이크
<The Puppet and the Dwarf>에서 지젝은 유대인 출신 헤겔 철학자 로젠츠바이크(1886-1929)의 입장을 수용하고 다른 제스처를 취한다. 그러나 지젝에게 로젠츠바이크는 시니피앙에 머물지 로젠츠바이크의 상관관계의 방법을 언급하지 않는다. 로젠츠바이크는 헤겔의 정치철학을 박사 논문 (<Hegel und Staat>)으로 썼지만 신적인 정신을 인간 의식일반으로 환원시킨 헤겔을 비판했다. 신학은 철학을 보충한다. <구원의 별>에서 로젠츠바이크는 새로운 사유를 제시하며 신학과 철학은 계시룰 표현하는데 상호보충적이다. 그의 상관방법은 창조 (하나님과 세계), 계시 (하나님과 인간), 그리고 구원(인간과 세계)이며, 특별히, 계시는 인간에게 하나님이 자신의 임재를 허락하며 사랑으로 나타난다. 하나님의 사랑에대한 체험은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계명으로 응답된다. 이러한 계명은 제의적 율법과 다르다. 계시는 율법이 아니라 인격적인 사랑의 관계에 기초한 계명을 창조한다 (The Star of Redemption, xvi).
로젠츠바이크의 사회학은 유대교와 기독교를 하나님의 영원한 나라를 공유하는 사랑의 공동체로 파악한다. 유대교는 영원한 생명이며 기독교는 영원한 길이다. 유대교와 기독교는 서로 보충을 요구한다. 유대교의 토라는 국가의 법이나 이방인의 법과는 다르다. 지젝은 바울을 유대적 전통에서 재해석한다(<The Puppet and the Dwarf>, 10).
그러나 지젝은 로젠츠바이크의 상관관계의 방법과 계시에 근거한 인격적 사랑의 계명의 중요성을 파악하지 못했다. 그리스적 사유와 달리 로젠츠바이크에게서 성서적 신앙은 하나님과 세계와 인간을 상관관계에서 파악한다. 만일 지젝이 로젠츠바이크의 상관관계와 유대교와 기독교의 이중진리를 이해했다면. 지젝은 벤야민에 대해 불필요한 오해를 하지 않았을 것이다. 지젝에 의하면, 벤야민의 메시아적 시간 (지금시간)이 바울의 메시아적 시간에 공명이 없다 (ibid., 108). 이것은 익살꾼 지젝의 허풍에 속한다.
게하르트 숄렘에 의하면, 벤야민은 바울의 메시아의 카이로스를 추종했다. 바울은 유대적 메시아주의를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성취가 되었고, 부활의 사건과 성령의 임재에서 영원성이 현재화 된다고 보았다. 벤야민은 현재화되는 메시아 시간 (지금시간)을 바울적인 의미에서 이해하고 사적 유물론의 진보를 멈춰 세웠다. 그러나 지젝은 남겨진 자들이 바디우가 멀하는 급진적인 보편주의의 급진적 단일성이며, 바울의 종말론적 구조를 거절한다 (ibid , 109). 오히려 밴야민은 바디우에 선택적 친화력을 보인다.
더우기 지젝은 고전 13장의 사랑에 대한 분석에서 바울이 언급하는 하나님의 사랑 즉 agape를 인간의 사랑, 카리타스로 혼동한다. 그래서 인간이 하나님의 자리를 대신하는 신화를 바울의 사랑에서 본다 (ibid., 115). 지젝의 헛소리를 추적하고 제대로 소통시키려면 교차 텍스트의 해명방법은 중요하다. 공론장에서 사이비 지식인들의 홍수와 같은 정보들은 공중에 권세를 가진 세력들처럼 들끊지 않는가?
지젝의 괴상한 해석: 루돌프 불트만
지젝은 루돌프 불트만의 은총과 율법의 반립을 수용하면서 동시에 기독교의 반유대주의를 비판한다: 기독교의 반유대주의는 아가페를 우주와 하나가 되는 우주적 느낌의 이교주의로 환원시켰다 (ibid. 119). 그러나 지젝의 괴상한 해석과는 달리 불트만의 은총과 율법의 반립이 반유대주의 토대가 된다. 여기서 그라스도는 율법의 마침표 (롬10: 4), 즉 폐기로 나타나지 목적(telos)으로 간주되지 않는다. 여기에 하이데거의 존재론에 영향을 받은 불트만의 영지주의적 사고가 담겨져있다. 그러나 바울에게 율법은 거룩하며, 계명도 거룩하고 의롭고 선한 것이다 (롬 7: 12). 지젝은 언제 쯤 신학의 택스트를 이해ㅍ하는 날이 올까?
로젠츠바이크에 의하면 유대교는 고정된 교리체계가 아니라 역사적 시대와 사회적 상황에따라 새롭게 해석되는 역동성을 갖는다. 유대교는 하나님과의 인격적 사랑의 관계에서 겸손하게 동행하며, 죽음충동이 아니라 하나님의 지성소에서 비쳐주는 생을 향해 나간다. 바울은 이러한 역동성을 예례미아의 새 언약의 빛에서 알고 있고 이스라엘의 구원이 하나님의 신비에 속하는 것을 을 확인한다 (롬 11).
바울에게 율법과 은총의 문제는 메시아의 현재사건에서 용서로 나터나며, 나는 이러한 용서를 카리타스 차원에서 실천하면서 하나님의 혁명에 참여한다. 집단주체가 아니라 공동체의 인격으로서 믿음의 사람은 자신을 회복시키는 용서의 정의를 타자를 인정하는 공동체에서 폭력이 난무하는 로마의 정치에서 실천했다. 이것은 < 죽음의 이데에올로기 무기> 인 후기 자본주의 시대에서도 물신숭배와 큐피디타스를 비판하면서 이어진다. '진리'사건'은 여기서 나타나며 이것은 라캉-지젝의 히스테리 주체나 죽음충동이 아니라 생명원리를 향한 선한 열망을 말한다. 믿음은 카리타스 안에서 활성화된다 (갈 5:6). 이 지점에서 지젝보다는 바디우가 바울의 진수를 재대로 파악한 것 처럽 보인다. 비록 바이우가 부활을 바울처럼 믿는 사람은 아니지만...신앙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체성과 화해의 보편성안에서 공적인 의미를 갖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