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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학적 해명: 들뢰즈와 포스트 구조주의

content6462 2026. 1. 7. 01:19

들뢰즈는 하이데거의 존재론과 형이상학의 해체를 거절한다. 둘뢰즈의 철학은 스피노자와 니체의 전통에 서 있으며 베르그송의 창조적 진화론을 통해 다윈의 진화론을 비판한다. 들뢰즈의 절친 푸코는 권력관계를 통해 지배 담론을 분석하고 지식과 권력의 넥서스를 기초로 시대적인 에피스테메에서 출현하는 인식론적 단절을 검토한다.

 

들뢰즈에게 생산적 욕망은 푸코의 권력관계처럼 중심에서 작동한다. 푸코와는 달리 들뢰즈는 욕망구조를 기초로 생물학적 사유를 그의 철학에 결합시킨다. 그의 욕망기계는 안티 오이디푸스적이며 자본주의 사회가 일으키는 정신분열증에 주목한다. 둘뢰즈는 프로이드-라캉의 정신분석의 영토를 허물어버린다.

 

들뢰즈의 철학은 자본주의 분열증적인 욕망구조로부터 개인이나 집단을 탈영토화시켜 생산적이고 창조적인 욕망을 추구하는 정치를 시도한다. 철학은 기존체계를 해석하고 대변하는 곳이 아니라 차이들을 창조한다. 문학과 예술 그리고 필름도 철학을 갱신하고 변형해야한다. 이런 점에서 둘뢰즈는 계보학의 사회학을 단자론적으로 그리고 스피노자의 코나투스를 통해 노마드의 삶의 철학으로 전개한다.

 

차이와 반복

 

들뢰즈에게 차이와 반복은 논리적으로 그리고 형이상학적으로 동일성 개념에 앞서있다. 차이의 반복은 동일성(신, 이데아 세계, 자아, 영혼불멸 등)의 반복을 거절한다. 이것은 반 헤겔주의를 지향하는 철학이며, 차이와 반복개념은 비확실성과 예기치않는 효과와 산출을 갖는다. 다수성 개념이 실체와 본질을 대신하고, 하이데거가 주장하는 형이상학의 종언을 거절한다.

 

들뢰즈는 구조화된 기존질서나 상식에 문제틀을 하고 이 러한 현실세계에서 밀려나간 잠재적인 것을 통해 전복하려고 한다. 생은 지속적으로 창조적이며 자기변형을 하며 열려있지만 일정한 삶의 양식에서 구체적으로 현실화된다. 들뢰즈는 생물학을 풍부하게 자신의 형이상학 즉 차이와 반복의 철학을 위해 통섭한다. 이러한 내재성의 철학은 헤겔의 동일성과 부정을 기초로하는 변증법과는 다르다. 내재성의 철학은 지평의 운동 또는 탈중심된 중심 또는 탈구된 주변부에서 반복과 차이가 드러난다 (Hughes, Deleuze’s Difference and Repetition, xxi).

 

과학에서 모든 현상이나 사건들을 기술할 때 법칙이나 사이클에 기초하여 일반성 개념을 사용하지만, 반복은 사물이나 사건의 유니크한 시리즈를 지적한다. 예를들어 세르 반테스의 돈키호테는 문예비평에서 반복되고 재생산 내지 재창조 될 수 있다. 이것은 니체의 영원회귀나 또는 반복적 강압이나 파괴에서 나타나는 프로이드의 죽음충동에서도 볼 수 있다. 역사적으로 전쟁도 반복된다. 과거의 텍스트가 현재의 텍스트에서 차이와 반복을 한다. 그러나 이러한 반복과 차이는 들뢰즈와는 달리 헤 겔의 역사철학에서도 그대로 현상한다.

 

들뢰즈의 문제는 여기에 있다. 반복은 개념이 없는 차이이며, 차이는 대립과 다르다. 니체의 영원 회귀는 매순간마다 일어나는 실제경험에서 차이나는 발생의 반복이다. 영원불변의 법이 반복되는 것이 아니라 패턴이 나타난다. 특이성은 베르그송의 잠재성에 공명하며, 잠재적 다양체는 현실태의 이미지 즉 시물라크라 (모방 이미지)로 나타난다. 그러나 신과 이데아의 세계가 해체된다면 시물라크라는 단지 모사가 아니라 실재로 의미를 갖는다. 베르그송의 플라톤적 배경은 제거된다.

 

들뢰즈의 논리를 세포의 생에 적용한다면 세포에서 드러나는 관계의 네트워크는 각 구성분들의 실제적인 차이들을 보여주며, 차이들은 세포 존재 안에서 발생한다. 그러나 세포의 네트워크를 니체의 영원회귀에 갖다부칠 수가 있을까? 오히려 세포의 생은 공생과 매개와 촉매작용울 통해 생의 풍부한 변증법적 스스템을 보여준다. 이것은 들뢰즈의 자연과학적인 이해에 급격한 제동을 건다.

 

들뢰즈의 리좀 픽션

 

들뢰즈는 나무와 같은 사고와 리좀적 사고를 구분한다. 언어는 문법과 같은 기본구조를 가지고 있으며 각각의 다른 언어에서 표현된다. 이것은 일정한 질서와 방향을 생산한다. 이러한 사고와 글쓰기는 나무와 같은 스타일이다. 반면에 리좀의 사고는 자의적이며 탈중심적 관계를 확장시킨다. 중심은 없으며 어느 곳에서 시작이 되며 다른 것과 연결된다.

 

들뢰즈의 차이의 철학은 리좀 사고법을 지적하는 데 나무와 리좀을 이항의 대립으로 보는 경향이있다. 예를들면 세포 전체를 구성하는 각 부분은 서로 접속되고 다양한 요소가 혼합된 형태로 볼 수 있다. 그런가하면 리좀은 새로운 부분이 접속되거나 단절될 때 성질이 바뀌는 다양체이기도 하다. 리좀은 자기복제를 통해 끊임없이 주름접기와 펴기를 반복 하면서 새로운 자기 조직화의 과정이며 사물들 사이에 있는 사이-존재로 볼 수 있다.

 

그러나 들뢰즈의 리좀사고는 자연과학적 인식보다는 형이상학적 픽션에 가깝다. 숲에서 나무와 뿌리는 분리되기 보다는 오히려 변중법적 성격을 보여준다. 숲은 다양한 나무들이 중심부들과 연결된 복잡한 시스템이다. 서로 겹치기도 하는 연결망에서 나무들은 피드백과 소통과 적응을 통해 생명계를 유지한다.

 

숲의 생태계에서 리좀은 곰팡이와의 공생관계 즉 균근의 연결망을 형성한다. 곰팡이는 뿌리를 보호하고 물과 영양분을 발견하게 돕는다. 그 대가로 뿌리는 곰팡이에게 탄소와 다른 영양분을 제공한다. 이러한 공생의 균근관계 (my- corrhiza)에서 곰팡이들은 나무의 생에 해로운 박테리아나 곰팡이들의 감염을 차단하는 항생제 역할을 하기도한다. 균사체 (mycelium)는 하얀 곰팡이 실로 이루어진 균사의 집단인데 뿌리와 관계를 유지하고, 나무들은 균사체를 통해 이웃의 나무들과 소통한다.

 

세포의 문화는 들뢰즈의 특이성을 기초로 반복울 하는 리좀 사고와는 달리 시스템적 사고를 보여준다. 관계론적 사고는 사스템 안에서 작동된다. 영회회귀의 존재론과 차이의 반복은 충분히 숲의 생태계를 설명할 수가 없다. 반복이 뿌리의 특이성에 기초해 관계론적으로 보편성을 획득하지 않는다. 모든 개체의 정체성과 기능이 관계와 시스템 안에서 공생과 매개를 통해 생을 유지한다. 여기에 노마딕 생의 스타일은 없다.

 

버섯은 뿌리를 감싸고 있는 광활한 균사체의 네트워크에서 자라난 균사의 열매로 볼 수 있다. 균사체는 전체 나무와 식물 종들의 65%에서 작용하며, 나무 뿌리에 미네랄 (질소와 인)을 제공한다. 훍 속의 내균근은 뿌리의 세포벽을 뚫고 들어오며 세포막은 군사를 거푸집처럼 둘러싼다. 외균근은 나무의 작은 뿌리를 감싸고 주의의 흙으로 뻗어나간다. 세포들 사이에서 균사 연결망이 형성된다.

 

캐나다 브리티시 콜럼비아 대학 수잔 시마드 교수는 숲의 생태학을 전나무와 자작나무의 소통관계를 연구하면서 균사가 두 나무를 연결시킨 것을 분석했다. 땅속에는 가느다란 곰팡이실 (균사)들이 모든 나무의 잔뿌리를 에워싸고 있다.

 

균사는 토양에서 질소나 인 등 영양성분과 수분을 빨아들여 나무 뿌리에 공급한다. 균사는 그 대가로 나무가 잎에서 만든 광합성으로 인해 탄수화물의 양분을 공급받는다. 전나무와 자작나무는 광합성을 통해 이산화탄소를 흡수해 당분으로 변화시켜 뿌리로 보내고, 탄소를 서로에게 보낸다.

 

숲의 복잡 시스템에서 나무들은 탄소뿐만 아니라 질소와 인과 물 그리고 방어신호, 화학물질과 호르몬 정보를 교환한다. 균근의 줄기에서 근류의 끈실이 나와 균사체를 이루고, 균사체는 모든 나무와 식물들의 뿌리에 감염되어 서식하고 숲속의 다른 개체들을 인터텟처럼 연결한다.

 

뿌리가 넓고 깊게 뻗은 큰 나무 (중심나무 또는 엄마나무)가 균근 연결망을 통해 숲 그늘에 가려 광합성에 어려운 묘목들에게 여분의 탄소를 보내주면서 보호한다. 중심나무는 수백 개의 작은 나무들에 얽혀있고, 이것은 숲의 생태학에서 ‘나무 연결망’을 지적한다 (수잔 시마드, “나무가 서로와 대화하는 방법,” TED 2016).

 

뿌리는 곰팡이 균과 공생의 관계를 유지하며 이러한 연결망에서 나무들은 화학적인 시그날을 보내면서 직접적인 대화(cross talk)를 통해 생태계에 침해들어오는 해로운 요소들 (병원균, 독성물질, 약탈자 등)에 방어력을 형성하고, 영양분을 서로에게 제공하면서 건강한 삶을 유지한다. 심지어 벌목이 되는 경우 스트레스 시그널을 서로에게 보내기도 한다. 이것은 공생을 기초한 소통과학이다.

 

들뢰즈의 차이의 형이상학에서 모든 생은 지속적인 과정에 있으며 현존재만이 본래성을 결단하는 것이 아니다. 모든 생은 외부의 힘에 대해 창조적인 반응으로 '결단'한다. 모든 것들은 언어와 유전자와 몸과 욕망 그리고 역사적 세력과 사회적 힘의 관계에서 교차되며 지속적으로 변형된다. 여기서 기원이나 의도성에 대한 원인을 추적할 수가 없다. 들뢰즈는 세계를 인간의 경험에서 설명하지 않는다. 의미의 과정과 인간의 삶은 본질적으로 인간 이전의 생에 의해 생산된다.

 

그러나 들뢰즈는 삶의 형식과 다름을 구분하지 않는다.생활세계는 자연의 생의 세계로 흡수된다. 자연과 정신의 일원론에서 총족되지 않는 잠재성과 무질서가 다양체의 가능성으로서 생의 기원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숲의 생태학은 들뢰즈의 차이와 반복에 기초한 리좀이해를 균근관계에서 비판적으로 설정한다. 들뢰즈는 인간의 현실적인 경험을 다룰 때 차이와 반복의 카오스모스에서 파악하고 리좀의 다양체를 강조한다. 그러나 그는 땅 밑의 균근의 연결망이나 공생 그리고 시스템의 소통 차원을 결여한다. 들뢰즈는 리좀에 관한 형이상학 픽션을 쓴 셈이다.

 

영원회귀와 시간

 

시간이해에서 들뢰즈는 반복이 일어나는 세 가지 다른 계기들로 파악한다. 반복의 측면에서 현재만이 존재하며 과거와 미래를 포함한다. 현재안에 과거와 미래는 기입된다. 습관과 기억이 지속되는 현재에서 과거와 미래를 종합한다 (ibid., 83).

 

비어있는 시간은 현재 안에 기입된 세번째 층인데 시간의 반복을 깨트리고, 위대한 상징적 사건이나 궁극적 사건을 지적하며, 편재한다. 개인은 자아를 지어버리고 이러한 영원한 회귀에 참여한다 (ibid., 90).

 

이런 점에서 들뢰즈는 니체의 영원회귀가 동일자의 영속성이나 반복이 아니라, 절대적인 차별자에 대한 새로운 사유이며, 차이와 반복의 원리로 이해한다. 힘의 의지가 영원회귀 즉 차이나는 것들을 되돌아오게한다.

 

이것은 적극적인 생성의 존재이다. 힘의 의지는 관계 안에 놓여있는 힘들의 양적차이이며, 힘들의 종합이고, 또한 이러한 관계에서 나타나는 힘의 성질 (지배 관계)을 표현하고 생성한다. 시간과 관련하여 권력의지는 힘들과 힘의 차이들을 종합하고 재생산함으로써 영원회귀의 근거가 된다 (들뢰즈, <니체와 철학>,103).

 

니체의 계보학은 발생론적 방법을 구현하며, 권력의지는 들뢰즈의 차이의 철학의 근거가 된다. 생산적이고 긍정적인 것은 변증법이 아니라 차별화된 비변증법적인 힘들에 의해 형성된다. 진화는 창조적이며 근접한 가능성은 질서가 아니라 무질서에서 보다 많은 다양성과 다름으로 나타나며, 존재하는 것 보다 비존재에서 많은 것들이 출현한다.

 

그러나 들뢰즈와는 달리 니체는 영원회귀를 디오니소스적 생 즉 그리스 여인들의 출산행위에서 보았다. 생명이 영원히 반복되며 차이를 가지고 나타난다. 이러한 디오니소스적 생의 원리는 해라클레이토스의 변화와 생성 그리고 사라짐의 변증법에서 여전히 생명존재로 돌아온다. 이것이 니체로 하여금 헤라클레이토스를 기초로한 헤겔의 역사 변증법과 갈라서게한다. 니체는 디오니소스적 생의 원리를 기초로 귀족윤리와 그리고 초인의 고결한 윤리를 구성한다. 들뢰즈의 형이상학에는 고결한 자들의 윤리보다는 생산적 욕망에 기초한 노마드의 정치가 있다.

 

창조적 진화와 일의성

 

앙리 베르그송의 창조적 진화개념은 들뢰즈에게 중요하다. 생명의 약진력 (엘랑 비탈) 에서 의식은 자유로운 본질이 되며 비가역적으로 (주관적인 의식의) 지속이 된다. 다윈의 자연선택과 생존투쟁은 엘랑 비탈에 의해 대신된다. 알랑 비탈은 활력적인 자극이며, 인간의 자연적인 창조적 생의 도약으로 이해된다.

 

여기서 시간은 지속으로서 개인의 주관적인 시간경험에 토대가 된다. 이것은 시계로 측정되는 물리학의 우주적 시간과는 다르다. 기억은 의식의 본질이며 과거의 축적된 기억은 불가역적이며 이러한 마음의 본능은 것은 인간의 이성과 현재의 체험보다 더 강하다. 이것은 모래시계에 비교할 수있다. 위 부분이 비어지면 아래 부분이 채워진다 (Creative Evolution, 18).

 

지속으로서의 시간은 감각을 통해 이해된다. 이러한 베르그송의 시간과 창조적 진화는 칸트와 후설의 시간개념과 가깝다. 만일 삶이 지속과 기억에 의해 유지가 된다면, 이것은 모든 생의 지속성을 설명하지만, 자연의 세계에서 나타나는 진화론적인 시간개념과의 단절을 의미한다.

 

랑 비탈에서 모든 살아있는 것들의 창조성을 이해한다면, 생의 다원성과 분화가 진화를 설명한다. 인간의 지식은 감각의 활동에서 자성의 형식과 구조에서 출현한다. 그러나 본능과 충동과는 분리된다. 베르그송의 창조적 진화는 욕망기계론적인 생의 이해를 거절한다.

 

들뢰즈는 배르그송의 창조적 진화를 형이상학적으로 개념화했다. 의식의 지속은 질적인 다양체로 구성되며, 서로 다른 의식의 상태가 겹치고 진보하면서 풍부한 내용을 담을 때 자유에 대한 경험이 일어난다. 생명의 전체 진화과정에서 자유는 창조성이 되며, 자유의 실현은 물질의 속으로 들어가서 진화의 가지를 펼쳐나간다. 삶은 자기 창조행위가 되며 분화와 다양체와 복잡성으로 나타난다.

 

창조적 진화는 들뢰즈에게서 다양체의 중요성을 제공한다. 잠재적인 것(the virtual)—아리스토텔레스의 잠재태와는 달리 배제되고 가능성이 없는 것을 의미한다—이 현실화되면서 실재적인 것이 된다. 잠재적인 것은 가능적인 것과는 달리 자체상 완전히 실재적이며, 현실적인 것에 대립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점재태와 현실태의 목적론적 사유에서 현실화되지 않는 것들이 존재한다. 들뢰즈는 현실화되지않고 배제된 것들의 잠재성을 부각시킨다. 충족되지 않은 잠재성을 복권 시킬 때, 우리는 비로서 현재를 새로운 미래로 변형시킬 수 있다. 이러한 정치적 채도는68혁명배의 배경을 가진다.

 

과거의 잠재적인 것은 다름의 관계들의 영역을 지적하며, 이러한 다름의 관계들은 현실적인 영역으로 이전되면서 현재화가 되고 실재화가 된다. 과거의 잠재태는 현실태과 동시에 존재하며, 전체과거는 동일한 것이 아니라 차이와 다름으로 반복된다.

 

이러한 입장은 현상학적으로 볼때 급진적인 반성을 통해 과거의 유효한 역사를 생생한 현재로 기술하는 것과 먼 거리에 있지 않다. 그러나 들뢰즈는 칸트의 통각의 선험적 일치—헤겔이 극찬하고 이러한 선험적 일치를 개념적으로 파악했다—를 거절되고, 선험적 영역은 일치가 아니라 다양체 즉 다름과 차이로 말한다. 충족되지 않은 잠재적인 것이 현실적인 것의 충분한 근거가 되며, 모든 실제 경험의 출현조건이 되며, 과정의 산물이다. 미래에 새롭게 되어가기 위해 우리는 아직 현실화되지 않은 잠재적인 것들 (아직 아닌 것들)을 삶에서 회복해야한다.

 

들뢰즈 비판

 

들뢰즈의 시간이해는 자연과학적이 아니라 형이상학적이다. 열역학 제2법칙에 의하면 시간은 화살방향으로 미래를 향해 흐른다. 차이와 반복은 니체의 영원 회귀를 생물학이론을 차용하면서 철학적 인식론으로 발전 시킨다,

 

그러나 시스템 생물학에서 드러나는 네트위크와 복합성에는 헤겔적인 의미에서 매개 즉 집단적 촉매작용과 상호인정은 중요하다. 대립과 부정은 생물학적 차원이 아니라 인간의 사회적 삶에서 드러나는 투쟁, 사건, 전쟁 등에서 반복되며 편재한다.

 

어째튼 들뢰즈에게서 이념은 차이에 기초되며, 차별적 관계들의 시스템으로 볼 수 있는 데, 이것은 유전적 요소에서 상호적으로 결정되는 유기체의 네트워크과 복잡성에서도 드러난다. 차이들의 관계가 선험적 원리이며, 경험의 다양성에 충분한 이성과 이해를 제공한다.

 

이념은 다수성이며 조직의 형식이며 다른 영역에서 작동될 수가 있다. 개별화는 유동적이며 서로 소통하며, 환경의 영향을 받으며 고차적인 형식으로 진화한다.

 

예를들어 배아는 임신 8주이전 접합체가 발생하여 완전한 개체를 형성하기 전 까지 발생 초기단계이다. 이러한 개별화의 드라마에서 배아는 역동적 관계를 통해 완전히 개별화된 유기체로 발전된다.

 

그러나 들뢰즈에게서 개별화 또는 기능적인 분화들이 부각되지, 이러한 분화들의 총계인 시스템 안에서 소통과 사회적 사건 그리고 구조접합은 별 다른 주목을 받지 못한다. 차이와 반복은 시스템 사회학의 스펙트럼안에 통섭되지만, 소산구조와 다차적 촉매 작용을 통해 다름과 차이에 대한 인정과 자율성이 확대된다.

 

여기서 인정은 들뢰즈가 비판하는 것처럼 동질성이 아니라, 동일성과 다른 기능적 분화들의 오토포이에시스에 대한 긍정을 말한다. 세포의 세계에서 매개와 자기생산성, 그리고 분자의 세계에서 인접한 새로운 가능성 그리고 리좀은 같이 작동된다. 그러나 이러한 기능적 분화들에서 다양체에 앞서 시스템과 구조가 노마딕 욕망주체에 관여한다.

 

주체의 특이성은 스피노자-니체적 영향아래있는 들뢰즈가 말하는 것처럼 노마딕한 개별 주체가 영원회귀에 참여하면서 나타나지 않는다. 이러한 사건 존재론은 들뢰즈가 말하는 시스템이론이 갖는 정당성의 자리를 부인한다. 모두가 다 통제된다면 아무 것도 통제된 것이 없다. 들뢰즈에게는 푸코의 계보처럼 니체의 약점을 역사 사회학적 내용을 면밀히 검토하고 그 내용을 채우는 것이 없다.

역사적인 전개와 사회의 합리화와 전문화 과정 (에피스테메) 에서 자율적인 시스템과 물질적 이해 그리고 권력관계 안에서 구성된다. 그러나 들뢰즈의 차이-내재-발생론적 입장에서 개별적 조건들에서 새로운 것이 반복적으로 생산 된다는 주장에서, 그의 철학은 살아있는 유기체의 지속적인 창조행위를 말한다. 그러나 세포에서 이러한 창조성은 공동체적인 삶에서 출현한다.

 

식물뿌리 진화에서 드러나는 리좀은 뿌리 끝 세포들이 벽을 뚫는 드릴처럼 나선형으로 뻗어 나가는데, 여기서 분자의 집단적 촉매역할은 중요하다. 곰팡이균과 박테리아를 통해 뿌리는 영양분을 섭치하며, 뿌리를 통해 흡수한 물과 영양분이 식물로 보내면서 식물의 성장과 생존 을 돕는다. 나무의 광합성 과정에서 60-70% 이산화탄소는 뿌리를 통해 토양에 저장된다.

 

뿌리는 부식하지 않으며 토양의 생명을 유지한다. 뿌리는 식물이나 나무를 독성과 세균으로부터 보호한다. 뿌리가 없이 토양은 나무나 식물의 생을 유지 하지 못한다. 식물은 토양을 안정 시키고 뿌리의 네크워크는 토양을 성장시키고 확장시킨다. 네덜란드의 경우 바다의 낮은 수면을 안정적으로 유지해준다. 리좀은 식물뿌리의 진화에서 공생의 미학과 생명을 지탱해주는 근거로 나타난다 (Will roots save the world?. DW Documentary, 2021 8월 5)

 

숲의 생태학에서볼 때 리좀적 사고는 오히려 균근관계에 기초되며 나무의 성장을 도우며 열린 환경에서 태양의 빛을 통해 광합성의 작용을 거치는 전체-부분의 중요성을 지적한다. 생명계 (또는 생활세계)는 태양의 역할처럼 빛을 보내주며 광합성의 과정을 통해 산소를 생산하고 나무의 성장과 생은 리좀과 균사와 공생관계를 통해 이웃한 나무들과의 소통과 정보교환을 하며 악성 박테리아나 병원체나 약탈자로부터 방어한다.

 

급진적인 것은 뿌리에 천착하고 뿌리로부터 사고하는 것이며, 이것은 관계에 기초된 시스템 사고를 말한다. 리좀의 개념은 균근관계와 나무의 성장교류 그리고 생활세계와 연결되어있는 소통 시스템의 일부에 속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