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크스와 징후발견적 사회학
지젝은 최초로 마르크스의 이데올로기 이론을 상품의 의 물산슝배와 연관지어 프로이드에 앞서 마르크스가 자본주의 사회의 병리현상과 증세를 진단했다고 보았다.
지젝의 징후발견적 독해는 라캉-알뛰세의 전통에서 헤겔의 변증법에서 움직인다. 지젝의 입장은 사회학적 관점에서 비판적으로 해명될 필요가 있다. 그는 마르크스의 발생론적 현상학을 충분히 고려하지 못했고 상품의 교환과정에서 일어나는 이데올로기의 역할에서 주체의 허위의식에서 나타나는 증세를 상부구조의 영역과 관련하여 사회구성의 문제를 개념화하지 못했다. 이런 점에서 자젝은 포스트 마르크스주의에서 첫번째 철학자헤겔과 더불어 민주주의 문제와 자본주의 사회를 징후발견적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나는 마르크스의 발생론적 접근울 현상학의 차원에서 재구성하고 장후발견적 사회학으로 전개한다.추상(본질계기)에서 구체(현상계기)로 진행되는 발생론적 현상학에서 사유는 구체적인 것을 유용화하며 의식 안에서 구체적인 것으로 재생산한다.
이것은 이론적 실천을 의미한다. 발생론적 현상학에서 마르크스는 상품이 물신으로 현상하는 사회에 직면했다. 이데올로기가 허위의식을 넘어서서 상품의 물신숭배로 작동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허위의식은 사물화가되며 증세로 나타나며 과학기술이 주인의 담론으로 등장한다.
사회의 변혁과 새로운 인식론적 파열로 가져가는 것은 자본주의가 일으킨 기술혁명 글로벌수준으로 확대된다. 자본주의 혁명은 세계혁명이다 (헬무트 골비처). 과학기술의 담론이 물신숭배사회를 통제하고 사회구성을 지배하는 것은 상부구조의 이데올로기적 영역이다. 여기서 위로부터의 계급투쟁이 작동하며 국가 헤게모니가 자본축적을 주도하고 사회를 뤼계질서로 계충화한다.
마르크스는 이러한 내용을 잠재적 형식으로 가지고 있고 인간의 실천성으로 연결했다. 그러나 그의 이론은 계급투쟁의 아르키메데스의 점에 붙들리고 생사를 건 파시즘 투쟁과 인민독재로 고착되었다. 마르크스의 이론적 실천과 비판적 민주주의는 실종되며, 상부구조 '에미스테메'의 구조가 투쟁의 과정에서 어떤 통제적 기능을 했는지 해명이 되지 않는다.
마르크스는 계급투쟁에 조급증세를 가진 사람도 아니며 자본주의 붕괴라는 강박증세를 가진 적도 없다. 마르크스는 이론적 실천에서 자본주의를 오랜 세기 유지해주는 자본축적의 사이클을 보았고 이것이 해외시장의 잉여자본의 유입과 과학기술의 혁명에서 연관된것으로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마르크스 텍스트의 잠재적 내용으로 남겨져있고 세밀한 독해를 요구한다. 이것은 징후발견적 사회학에 속하며, 나는 이론적 실천에 입각해 마르크스의 발생론적 현상학을 재구성한다.
발생론적 현상학
마르크스의 발생론적 현상학은 구체적인 것에 대한 자연적 태도에 에포케를 하고 사태자체인 추상의 본질로 되돌아간다. 그리고 본질로부터 현상적인 구체적 계기들을 향해 진행되며 재생산 과정과 사회구성 그리고 세계시장으로 나간다. 이것은 역사적인 경험적 자료둘을 분석하는데 부분과 전체의 의미론적 순환을 제공한다. 생산과 재생산과정에서 과학기술과 역사적 투쟁은 매개와 변형의 과정으로 나타난다 (Mandel, Late Capitalism, 17).
각각의 계기의 발생과 전개는 역사 사회적인 단계에서 경험적인 자료와 내용을 가지며 자연과학의 발전이 생산량식을 매개하고 발전시키며, 사회계층에서 계급과 신분의 투쟁은 자본의 다양한 형식과 내용 (상징, 지식, 문화 종교 등)에 엮어진다.
마르크스의 변증법적 방법은 자본축적과 더불어 욕망과 충족의 변화체계에서 움직이며 역사의 발전을 규정하는 중층결정에는 자본의 유기적 구성이 자본주의 성격을 특징짖지만 해외시장과 식민지배를 통해 유입되는 앙여자본과 가치가 중심부에서 잉여 주이상스를 창출한다.
마르크스의 곤혹스러움과 기술합리성
자본의 글로벌 차원에서 인간의 욕망을 재생산하는 사물화현상은 인터넷의 정보가치와 시뮬라시옹 (가상현실)으로 이행되고 인공지능이 노동을 대신한다. 사회와 인간의 삶은 정보와 기호에 따라 가상현실원리로 조건된다. 교환가치는 정보와 기호가치와 인공진능의 잉여가치로 이행한다. 나는 고급스런 차를 타면서 자신의 신분을 기호적으로 (자동차) 대변한다. 고급차에 대한 정보는 사회 안에서 넘쳐난다. 인공지능은 상품의 물신숭배에 편입된다.
이러한 하이퍼 현실에서 생의 원리는 상품이 채워지며, 성은 지배구조의 모방욕구로 채워지고 에로스는 잘못된 욕구에 의해 변질되고 만다. 하이퍼 현실은 하이퍼 금용 자본과 첨단 과학기술 그리고 재생산 구조에따라 인간의 노동동과 욕망구조는 후기 자본주의 구조안에서 변형된다. 가상현실원리가 마르쿠제의 수행원리를 컴푸터 구성과 더불어 프로이드의 비사회적 오이디푸스 신화의 허구를 해체한다.
여기서 마르크스는 곤혹스럽다. 자본의 유기적 구성을 너머 레스토랑에서 만나는 인공지능 로봇은 '인간적인' 상품으로 나와 소통하고 접촉한다. 독일에서 휴먼 로봇 예배시간에 설교를 한다. 인공지능을 기초한 생산양식은 19세기 산업자본사회에 서 있는 마르크스가 예견한대로 노동자들로부터 일자리를 빼앗고 이들은 산업 예비군으로 전락할까? 최첨단 컴퓨터 기술진보는 사회영역들을 분화시키고 유용성의 극대화를 시도한다. 휴먼 로봇의 유용성의 가치가 출현한다. 유용성이 나의 욕구를 재생산한다. 교환가치에 기초한 상품의 물신숭배의 매력은 이제 인간적인 로봇과 소통하고 더불어 살아간다.
고전적으로 마르크스는 사회혁명을 가져오는 것은 생산양식의 대립을 파열시키는 기술진보 즉 상부구조의 령력에 있음 보았다. 다시말해 이데올로기는 단순히 허위의식이 아니라 사회혁명을 글로벌차원에서 확대시키는 진원지이다. 그러나 이데올로기 영역의 작동은 다차적이며 개별계기들 (과학자집단, 정치, 경제, 교육,종교등(에서일어나는 교차영역은 나를 예속시켜 주체로 만들어가며 아버지의 이름을 과학의 이름으로 대처한다. 과학은 인류의 역사에서 운명이 되었다.
라캉과 지젝의 '기묘한' 헤겔
나의 마르크스- 프로이드 독해에서 라캉의 실재계는 유아의 주이상승 결핍에서 떨어져 나가 objet petite a 로 남지 않는다. 이런 대상 a는 상징계의 문화질서에서 잉여억압과 수행원리에서 재생산 과정에서 나타난다.
상징계 안에서 에로스와 문명의 관계는 아버지의 이름이 어떤 방식으로 법적으로 합리화되고, 관료지배가 인간의 노동과 욕구를 콘트롤 하는 지를 검토한다. 아버지 법은 비인격적인 실재로 주인없는 폭력으로 작동되며 사회계층에서 발생하는 징후들에서 독해된다. 이제 인공지능이 등장한다. 아버지의 이름과 어떤관계가 있는가? 운명으로서 과학과 아버지의 이름을 변두리로 밀어내고 새로운 주체의 의식과 현실원리를 만들어낸다.
여기서 헤겔은 포스트 마르크스주의 첫 번째 철학자로서 어떤 의미를 갖는가? 지젝은 라캉을 통해 헤겔을 읽고 정신분석에 지양의 계기를 첨부한다. 지젝에게 헤겔의 지양은 환원으로 변형되고 지양된 것은 자신의 생활세계에서 떨어져나간 축약판으로 본다. 이성의 과정을 통해, 다시 말하면 이성이 죽이는 지양과정을 통해 축약된 것은 구체적 보편성을 통해 청청한 삶으로 되돌아온다 (The Sublime Object of Ideology, x).
청청한 삶에서 나타나는 구체적인 내용은 무엇인가? 부정의 부정을 통해 개념으로 죽어버린 것이 청청한 삶으로 나타날 수 있는가? 개념이라는 강아지는 짖지 않는다. 지젝은 헤겔의 지성(이해)의 역할에서 다양한 감각적인 것들에게 영적으로 활력을 준다고 말한다. 감각적 확실성 (지금 여기)의 계기는 보편적인 시간과 공간으로 이행된다. 구체적인 계기인 지금 여기의 생생함은 죽는다. 이러한 이해의 과정을 지젝은 프로이드의 사물의 환원으로 간주하고 일치/통일적인 특징으로 말한다. 다양한 성질들은 하나의 지배적인 특징으로 환원한다.
감각적 확실성에서 보편적 계기로 진행되는 헤겔의 발생론적 변증법은 지젝에게 프로이드의 환원 즉 역행으로 바뀐다. 프로이드는 변증법이 아니라 위상학에서 본능충동과 자아의 긴장과 억압을 생물학적으로 다룬다. 그러나 지젝은 헤겔의 일치 내지 통일의 특징을 환원으로 밀어부치고 플라톤적으로 이해한다. 사물의 이념은 사물에 대해 의무론적인 차원을 가지며 사물이 충분히 실현해야 하는 상태를 지적한다 (Zizek, xi).
예를들어 내가 나무를 언어의 렌즈를 통해 관찰할 경우 나는 나무의 현실태를 숨겨진 잠재태 다시말해 나무의 지평을 통해 지각한다. 잠재태가 현실태로 현상하는 것은 오로지 시니피앙을 통해서이다. 이것은 잠재태를 드러내는 물의 호출이다. 지젝의 기발함은 헤겔의 지양을 물의 호출로 재구성하고 라캉 -프로이드의 틀에서 헤겔을 유용화한다. 그런 점에서 지젝은 말하는 주체와 시니피앙의 연쇄에서 의미와 징후를 포착하려는 지각의 현상학의 전통에서 멀리 있지 않다.
그러나 지젝의 기묘함은 헤겔의 지양을 카톨릭의 화체설에 갖다 부치고 기독교인이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통해 하나님을 남김없이 소화하는 것으로 본다. 헤겔은 루터란이지 카톨릭의 화체설을 지지하지 않는다. 헤겔의 지양은 화체의 계기가 아니라 타자에 대한 인정과 화해를 지적한다 (ibid , xii).
헤겔은 모든 타자를 배속에 삼켜버린 공룡의 변증법처럼 나타나지만 타자는 소화될 수 없다. 그러나 지젝은 헤겔의 절대지를 자기와 관련된 부정성의 텅빈형식으로 환원한다. 인격성의 풍부함은 비워지고 라캉적으로 표현하면 헤겔의 실체에서 주체로 변증법적 이행은 주체에서 빗금쳐진 (결핍과 소외)주체로 이행과 같다.
지젝은 캐터린 말라부의 압장에 공감한다: 지양과 제거는 상호연관적이며 제거와 지양과 해방은 어원적으로 동일하며 제거는 지양의 지양이며 새로운 변형울 의미한다. 이것은 절대지의 계기를 생산한다. 이것은 모든 집착으로 부터 자유롭다(xiv). 여기서 절대지는 모든 계기와 대상들을 해방시키고 자기를 부정하고 지양하는 비움으로 출현한다. 만일 절대지가 자기비움으로서 라캉의 실재계로 간주되면 헤겔은 하캉-프로이드의 정신 분석학에서 중요한 자리를 갖는다.
헤겔의 강인함
내가 보기에 헤겔은 라캉-지젝에 의해 쉽게 길들여지지 않는다. 절대지는 그리스도의 화해의 기초되고 역사 사회적 영역으로 확장괸다. 정신분석학적으로 보면 이것은 트라우마의 포용을 통해 상징계의 뷴열과 억압을 치유하려고 한다. 마르크스의 자유의 왕국은 헤겔과는 다른 차원에서 여전히 인정과 화해를 담고있다. 헤겔과 마르크스의 변증법은 유아기의 오이디푸스 거세 공포로 역행하기보다는 역사 사회적 영역에서 빚어지는 주인과 노예의 욕망구조와 생사를 건 투쟁에서 공유할 수 있다. 이것은 후설적인 의미에서 ' 아론적 실천'이며 생활세계를 회복하려는 내재적 비판과 타자의 인정 그리고 해방의 정치를 향한 공감윤리를 담는다.
이런 점에서 징후발견적 사회학은 유아기의 주이상스를 기초로 섹슈알리티의 억압이나 결핍에 주목하지 않는다. 오히려 섹슈알리티의 문제는 노동분업과 수행원리에서 나타나는 잉여 억압과 잉여 주이상스에서 교차되며, 증세는 상징계의 합리화 과정에서 독해될 수 있다.
이데올로기 상부구조가 과학기술의 진보를 통해 전지구적으로 자본주의가 일으킨 혁명을 주체의 의식을 변형시키고 인도한다. 마르크스의 과학담론은 이데올로기로 설정되며 라캉의 아버지의 이름을 변두리로 밀어낸다. 19세가 자신들의 노동력을 뺏아간 기계를 노동자들이 파괴했다면 21세기 인공지능은 주인담화의 자리를 갖는다. 인간의 모든 영역에서 유용성의 주이상스를 극대화하는 휴먼 로봇을 인간이 파괴할까? 상품의 물신숭배사회를 출현시킨 것은 과학기술의 이데올로기였고 오늘날 휴먼로봇을 등장시키며 기술물신숭배사회로 이행한다.
에로스와 문명의 관계에서 인간의 욕망은 다차적으로 (
잉여억압, 잉여주이상스, 과학의 주인담론) 빗틀려있다 이데올로기-에피스테메에서 징후들이 인간의 의식과 행동에서 나타난다. 이드와 문명의 긴장과 안티노미는 중층적으로 결정되고 과학단론이 주도하지만 미래는 여전히 불확정성의 원리가 지배한다. 아버지의 법은 과학담론의 통제를 받으며 비인격적 실재로 관료지배의 그믈망에 펼쳐있다.
이러한 에피스테메의 배구조에서 변증법적 현상학은 시스템적우로 작동한다. 사회의 필드들은 분화되고 사스템으로 작동되며 정치시스템의 권력욕망의 시니피앙이 종교시스템에 병행되지만 통제하지 않는다. 그러나 여전히 종교시스템을 지배하는 것은 아버지의 이름이다.
종교의 귀환
징후발견적 사회학이 관심하는 영역은 유아기의 주이상스에 관련되는 실재계나 사적인 임상담화가 아니다. 공적인 영역에서 소통과정이 어떠한 문법과 타당한 규칙을 통해 상호주관적인 합의와 인정으로 진행되는 지에 주목한다. 말하는 주체는 대화 파트너와 더불어 사회문화적인 상황에 특수한 예민성을 가지고 자기를 표명한다. 언어의 상징과 의미내용 그리고 상징전거의 대상은 문화적 실천에서 두텁게 기술된다.
나와 타자의 정체성을 구정하는 것은 문화의 전거체계 또는 많은 기호들을 가지고 있는 인덱스에 기초한 문화실천 또는 언어 놀이와 내러티브를 말한다. 여기에는 과거의 억압을 통해 현재와 미래를 산출하는 정신분석적 귀환 담화는 사적영역에 머문다. 징후발견적 사회학에서 오히려 불확정성의 원리가 작동되며 과학의 주인담화가 통제를 통해 새로운 삶의 변혁과 인식론적 파열을 가져온다. 하버마스의 소통 합리성의 규칙은 문화적 인덱스에 따라 그리고 과학의 주인담론에 따라 비판적으로로 보충되어야한다. 무엇이 서로 다른 문화의 두 세계에서 소통을 합리적으로 이끌고 합의에 이르게 하는가? 서로 다른 문화체계에서 합리성은 개별 생활세계에서 주인담론과 더불어 형성되지 외삽법적으로 주어지고 보편화 되기가 어렵다.
에로스와 문명의 전개에서 특히 종교시스템은 새로운 가치와 기능으로 나타난다. 베버가 진단한 것 같이 세계의 비주술화를 통해 신들의 세계가 벗겨지지만, 억압된 것의 귀환은 무덤으로 되돌려진 신들이 다시 출현하는 현상이다. 문명은 종교를 세속화 시키지만 인간의 삶은 아버지의 이름이나 순야타의 세계 또는 배단타의 합일(우주적 실재와 아트만)을 향한 영적갈망을 피해갈 수가 없다. 종교는 인정과 심정윤리의 장소로서 시민사회의 삶을 카리타스나 정명 또는 자발적 자선실천 (이슬람), 대자비나 아힘사와 같은 가치 합리성을 통해 유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