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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윈을 너머 헤겔로: 지젝의 익살

content6462 2026. 1. 7. 01:11

다윈의 곤혹스럼

 

다윈은 <종의 기원>에서 만일 누적적인 조그만 변형을 거치지 않은 복잡한 기관이 입증된다면자신의 이론은 절대적으로 붕괴 될것으로 말했다. 다윈에게 자연은 비약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Natura non facit saltum). 그러나 엘드리지와 스테판 굴드의 단속평형이론은 오랜 고대의 시기의 화석에서 수억년에 걸쳐 진화가 정지상태였음을 보여준다. 종들은 갑자기 사라지고 본질적으로 다른 종들에 의해 대신된다. 다윈의 계통수의 점진주의는 현재의 생을 공동조상으로 소급시키는 과거지향의 방법이다. 그러나 이제 진화는 새로운 종들이 갑작스러운 유전자의 변화를 통해 즉각적인 폭발로 나타난다.

 

생의 창발성은 진화론의 새로운 차원을 특징짖고 더 이상 다윈의 기계론적인 결정론에 대립한다. 단속평형이론은 오늘날 생물학 교과서에서 정통이론의 지위를 가지고 있다. 자연은 창조적인 생의 출현에서 비약하기를 좋아한다. 자연선택과 생존투쟁은 과거의 유물이 되었다.

 

자연의 복잡성과 창조성

 

프리고진에 의하면, 우리는 생물학적 진화가 어떻게 진행되는 지 알 수 없다. 사건들의 출현은 비평형의 물리학에서보면 무질서의 증가와 더불어 갈라치기에서 나타난다. 이것은 미래를 결정할 수 없게 만든다. 소산구조의 다른 존재를 출현하게 하는 것은 소수의 입자들이 대우주적 조직을 변경시키면서 부터이다. 유기체의 자기조직화와 열린환경과의 교호작용이 종의 새로운 출현을 가능하게 한다.

 

오토포이에시스

 

칠레의 뇌과학자 훔베르토 마투라나는 신경 시스템의 순환적인 조직은 모든 살아있는 것들의 기본조직에 속한다고 주장한다. 사이버네틱의 순환 안에서 살아있는 조직들이 생산되고 유지된다. 이것은 네트워크와 패턴을 의미하며, 이 안에서 모든 개체들의 기능은 생산되고, 서로 변형을 시키고 분화한다.

 

마투라나는 그의 제자이자 동료인 프란시스코 바렐라와 함께 산티아고 학파를 대표하는 데, 이들에게서 중요한 것은 살아있는 유기체의 순환적인 조직이며, 이것을 자기생산성 곧 ‘autopoiesis’로 표현한다. 이것은 자기조직 시스템의 자율성(auto)과 생산(poiesis)을 합성어로 한다. 이것은 과정들의 관계에 주목하며 이러한 네트워크에서 개체들은 서로에게 영향을 주면서 상호작용을 한다. 자기생산성은 조직의 일반적 패턴이 되며, 모든 살아있는 것들에 공통적이다. 시스템의 조직은 개별적인 구성분들과는 독립적이며, 시스템의 구조는 이러한 조직을 구현한다.

 

비평형에서의 생의 창발성

 

일리야 프리고진은 모든 살아있는 것들의 자기조직과 생산성에 구조적 차원을 개방한다. 자기조직은 평형상태가 아닌 열린 환경에서 에너지와 물질대사의 공급을 통해 나타나는데, 새로운 구조와 질서는 비평형상태 즉 엔트로피 (무질서)에서 발생한다.

 

시스템의 구성분들은 일직선상이 아니라 복잡하게 연결되어있고, 피드백 회로로 정보와 소통이 교환된다. 열린 환경에서 삶의 과정은 안정상태가 아니라 에너지와 물질이 공급되고 증가되면서 비평행 상태에서 구조와 질서는 분산되고 소비되어 사라지지만, 동시에 이것은 새로운 질서의 근원이 된다.

 

이것은 동일자의 영원회귀나 차이와 반복의 형이상학이나 베르그송의 생과 개별화의 원리와 다르다. 베르그송의 창조적 진화에서 생은 개별화을 추구하며 개별성은 결코 완전하게 실현되지 않는다. 지속적인 창조에서 본래적 상태는 기본적인 사실들로 해소되며, 각각의 개별적 사실은 이미 알려진 사실의 반복을 말한다.

 

과거의 요소들은 새로운 배치로 들어오며, 이러한 반복은 새로운 질서안에서 차이로 출현한다. 잠재적이고 활력적인 생의 경향은 여전히 살아있는 유기체안에 남아있다. 베르그송에 의하면 시스템과 조직은 인간의 정신이 만들어낸다. 베르그송은 살아있는 유기체의 자기생산성에 주목하지 않는다 (Creative Creation, 16.32).

 

베르그송과 달리 분자생물학에서 살아있는 조직의 자기생산성은 삶의 과정에서 열린 환경과의 피드백 회로를 통해 새로운 구조와 질서로 출현한다. 삶의 과정은 조직의 패턴과 구조와 밀접한 관련을 갖는다. 엘랑 비탈과 지속의 시간성은 시스템 안에서 촉매작용에서 나타날 수 있다.

 

간략히 말하면 자연이나 인류의 삶은 닫혀진 상태가 아니라 열린 상태에서 새로운 영향과 도전을 통해 새로운 삶의 질서로 다양한 방식과 차이로 발전한다. 그러나 닫혀진 상태에서 이러한 도전과 영향은 부패와 변질로 갈 수 있다. 이런 과학적 관점에서 전쟁은 열린 시스템을 교란하는 주범이며, 인류와 자연의 삶을 부패와 변질로 몰아간다.

 

과학의 소명

 

환경 시스템은 리스크를 동반한다. 유기농법은 바람직하지만 생산성의 저하로 인해 경작지 확대라는 폐혜를 가져올 수가 있다. 화석 연료소비를 감축하기위해 바이오 연료 (알콜, 메탄 등)는 대안이 되지만 옥수수를 위해 엄청난 경작지를 요구한다. 온실가스의 주범인 화석 연료를 대처하는 것은 원자력이 되지만 핵무기의 공포와 체르노빌 사건으로 인해 극단적 환경론자들의 저항이 거세다. 그러나 온실가스를 만들어내지 않으면서 효율성이 높은 것은 아직까지 원자력 이외에 없다.

 

1986년 체르노빌 참사이후 독일의 사회학자 울리히 벡은 “위기사회”를 출간하고 새로운 근대성의 필요를 주장했다. 환경문제나 생태학적인 위기는 산업사회의 귀결로부터 온다. 후기 근대사회는 반성적인 근대화를 요구하며 리스크와 안전망을 동시에 고려하면서 위험요인들을 줄여가면서 지속가능한 삶을 기획한다. 산업화 과정을 통해 기술 합리화가 급증하며, 일과 사회조직과 전반적인 삶의 스타일에 변화를 가져온다.

 

근대성에 대한 사회학적인 분석에서 쟁기, 증기기관, 마이크로 칩은 이러한 사회발전의 바로미터가 되며, 전체 사회구조를 재설정한다. 기술 합리성과 더불어 생태학의 문제가 동반된다. 문제는 환경기술을 통한 리스크의 관리와 조절에서 신중한 정책 결정이 수행되어야한다. 여기서 과학의 소명의 의미가 있다. 인간은 노동을 통해 자연과 연관을 맺고 거기서 나오는 소산을 먹고 살 수 밖에 없다. 이것은 거친 자연 정복개념이 아니라 자연을 가꾸고 돌보는 삶의 교감과 더불어 느끼는 유대적인 연민(compassion)에 기초한다.

 

인간의 삶은 환경을 떠날 수가 없으며 사회 문화적 환경은 민주적이며 창조적으로 빌전해야된다. 자유의 진보와 공공선이 이루어지는 생활세계와 시민사회가 추구될 필요가 있다. 과학자의 책임적인 태도와 소명은 이러한 사회의 공공선과 자유의 진보 그리고 생활세계의 보존을 위해 헌신되어야한다.

 

미래의 차원은 새로운 창조로

 

열역학 제 2법칙에 의하면 엔트로피의 양은 시간과 더불어 증가하고 이전 상태로 되돌아가지 않는다. 향수병을 밀폐된 방에서 열어놓으면 방안에 채워지지만 다 이전상태로 복귀하지 않는다. 시간은 불가역적으로 무질서의 양과 더불어 흐른이다. 시간은 화살처럼 시위가 당겨져 날아가면 목표를 향해서 간다. 밀폐된 공간에서 따뜻한 음식은 식고 부패할 수 밖에 없다.

 

우주 자체는 역동적이며 태양의 시스템안에서 팽창하며 화살처럼 나간다. 은하계는 마치 젖이 흐르는 것처럼 뿌옇게 나타나지만 태양 시스템을 포함한다. 블랙홀도 존재한다. 무수한 은하들이 존재한다. 에드윈 허블은 태양도 지구처럼 은하 주위를 공전한다고 말한다.

 

우주는 에피제네틱 곧 후생 유전적이며, 또한 역사적이다. 우주의 진화에 영향을 미치는 주변환경의 요소가 중요하다. 유전자가 인간의 삶을 결정하지 않는 것처럼, 우주 또한 결정론적이 아니라 시간의 화살과 더불어 비결정적으로 그리고 복합적으로 움직인다.

 

들뢰즈는 베르그송의 창조적 진화론과 엘랑 비탈을 기초로 잠재성의 다양체가 현실화 되어가는 형이상학을 개념화한다. 그러나 들뢰즈에게 양자역학이나 분자생물학에서 나타나는 세포의 생에 대해서 별 다른 검토가 없다.

 

존재론적으로 우주는 미래로 열려져 있지 과거의 자연의 삶으로 회귀하지 않는다. 잠재성이 현실화하면서 기존의 질서를 해체하지도 않는다. 기존질서를 다른 새로운 질서로 열어가는 것은 사회와 문화의 삶이 환경과의 열려있는 테도와 상호작용에서 나타난다.

 

자연과 역사는 둘다 하나님의 미래를 향해 열려있는 시스템이다. 이러한 프로렙시스적 원리는 시스템적 사고와 생태학적 입장을 매개하고 종합한다. 이것은 과거 소급적인 차원 즉 아남네스적인 차원을 포괄한다. 과거소급적 존재론은 다음처럼 요약된다: 존재하는 것은 미래를 갖는다.

 

과거를 회상하는 것은 미래 즉 하늘과 새 땅의 계기가 현재로 들어오는 것이다. 유대 기독교 전통에서 미래는 하나님이 인류에게 준 선물로 파악된다. 그러나 그것은 먼 훗날의 이야기가 아니라 지금 여기서 화해와 인정의 복음과 더불어 시작된다. 모든 피조물들의 삶은 갱신되며 이들은 상호 의존적이며 관련성 가운데 있다. 생태학적인 갱신은 유대 기독교 전통 이외에도 유교나 불교 그리고 이슬람에서도 작동한다. 살아있는 지구의 삶을 더 이상 고삐 풀린 성장, 무한 경쟁, 자유방임이라는 탐욕의 논리로 착취를 해서는 안된다.

 

무신론의 전통에서 유대-기독교의 억압적 도덕체계가 비판되지만 예언자적 비전이나 하나님의 미래와 프로렙시스는 오히려 무신론의 한계를 교정한다. 다윈의 진화론은 지구의 삶을 구원하는 것이 아니다. 결정론적의 뉴톤의 기계론적 세계 안에서 인위적인 교배를 통해 좋은 품종을 개량하듯이 자연도 그렇게 경쟁과 생존투쟁을 통해 품종개량을 할걸로 순진하게 맏었다. 유기체의 자기조직화나 비평형상태에서 새로운 종의 충현은 그에게 거리가멀다. 오히려 다윈주의의 픽션은 생태학의 삶을 자연선택과 적자생존의 쇠창살에 묶어 놓았다.

 

이 지점에서 베르그송이 다윈의 환경 적응주의와 적자생존을 기계론적 단순함으로 비판한 것은 의미가 있다. 전혀 다른 진화의 과정에서 특히 식물인 경우 유사한 구조가 나타난다. 여기서 적응과 환경은 별 다른 의미가 없다. 우연한 변이들의 축적은 복잡한 구조를 생산하지만, 특히 다른 시간과 공간에서 동일한 질서로 반복된다.

 

반복의 역설은 다윈의 적자생존과 환경 순응주의에 대립한다. 우연한 원인들이 서로 다른 매우 복잡한 진화의 과정들에서 동일한 형식으로 반복된다. 이것은 다윈의 자연선택과 생존투쟁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Creative Evolution, 59-60).

 

오늘날 생명과학이나 분자 생물학 그라고 시스템 이론에서 다윈의 기계론적 이해와 네오 다윈주의자의 결정론적 세계관은 거절된다. 파라다임의 변화가 인식론적인 파열로 나타난다. 모든 피조물들의 삶은 생의 영역에서 공생과 매개 그리고 협력을 보여준다.

 

미토콘드리아와 세포핵이 서로 공생한다. 유전자의 진행을 히스톤의 단백질이 매개하고 변이 상태를 치유하면서 좋은 환경을 만들어준다. 세포 네트워크에서 효소 단백질이 세포핵의 DNA의 손상을 복구하는 경사진 사이클의 loop에서 적용한다.

 

이러한 에피제네틱은 “인식론적인 문화”라는 말로 표현되기도 하지만, 수 많은 효소들의 매개 역할이 생명을 유지하는 데 큰 역할을 한다. 세포의 생은 찰스 다윈의 진화론을 거절한다. 생존투쟁을 통해 얌체 짓과 환경에 변태적으로 적응을 잘 하는 자만이 살아나지 않는다. 오히려 부패와 변질로 막을 내린다.

 

리차드 도킨스나 에드워드 윌슨의 사회 생물학은 독단주의이며, 다르게 생각할 수 있는 자유를 사전봉쇄해한다. 이들의 제국주의 담화는 과학이란 이름으로 신화를 배태하지만, 과학의 권위로 일상인들에게 전문적이고 화려한 시니피앙으로 기만을 한다. 누가 개미를 연구해서 개미에게 가서 도덕을 배우겠다는 사람이 있을 까? 큰 사고를 치고서 뻔뻔하게 조상으로 부터 내려온 나의 유전자가 그렇게 하도록 했다고 말하면 법적 처벌을 당하지 않는가? 이런 얼치기 논리는 정치사회의 영역에서 넘쳐난다.

 

생각을 전한해야한다. 세포의 생에서 우리는 공동의 선을 위해 매개와 협력하는 아름다운 삶을 산다. 우주 안에 하나님의 이성의 씨앗과 빛이 담겨져있 다는 고대 스토아 철학의 지혜와 통찰이 찰스 다윈의 진화론이 틀렸다고 말한다. 

 

지젝의 <레닌>을 읽고....

 

화려한 헤겔주의자 지젝은 황당하기도 하지만 가끔 의미있는 시니피앙을 공론장에 던질 때가 있다. < Repeating Lenin>에서 지젝은 사고를 봉쇄하는 금기를 깨뜨트리는 시도를 한다. 그는 역사적인 실례를 든다 1930년대 독일 공산당의 최대의 실책은 나치즘에 저항한 것이 아니라 미온적인 태도를 취한데 있다, 물론 배후에 글로벌 공산당 정책을 주도한 스탈린의 입깁이 있었다. 나치는 자신들에게 유화적인 정책을 쓴 공산당원들을 정권장악 후 일차적으로 처형했다. 파시즘 독재는 후기 자본주의지배의 마지막 변태적인 단계이며, 독일 인종주의와 자연 낭만주의 그리고 진영논리를 고취해 모든 것을 파괴했다. 진영논리는 공멸논리이다.

 

지젝은 오늘날 글로벌 리버럴 질서의 상황을 반지성주의 시대로 말한다. 그는 기발하게 레닌의 <유물론과 경험비판>을 양자 물리학에 연관지어 읽자고 말한다. 양자의 영역에서 입자는 파동과 더불어 있고, 측정의 단계에서 입자의 물질은 에너지의 파동에서 사라진다. 이것은 지잭의 변증법적 역설 현상에 속한다.

 

그러나 지젝의 의하면 레닌의 <유물론과 경험비판>에는 헤겔의 변증법이 없다. 자연과학의 영역에서 물질의 영역은 인간의 마음과 독립하여 존재하며 인간의 지식안에 반영된다. 이른바 악명높은 레닌의 반영이론이다. 인간의 마음과 지식은 그저 객관적인 실재를 거울처럼 비출 뿐이다. 그러나 레닌과는 달리 주체의 반성은 객관적인 현실과 이미 얽혀있다. 레닌의 번영론은 반헤겔주의자의 대표인 칼 포퍼의 실증주의를 말하지 헤겔의 변증법과는 상관이 없다. 물론 레닌이 <철학노트>에서 헤겔의 <대논리학>을 연구하고 변증법의 본질을 알고 있었지만 반영이론과의 접합은 결국 스탈린주의에서 참담한 야만의 정책으로 나타났다.

 

간력히 말해 지잭이 던지는 시니피앙은 사고를 봉쇄하는 것(Denkverbot)에 투쟁하고, 다르게 생각할 줄 아는 자유와 민주주의를 지키는 것이다. 구소련은 이향의 대립 즉 진영논리로 글로벌 영역을 편가르다가 결국 리버럴 민주주의와의 경쟁에서 몰락했다. 지젝은 레닌과는 달리 글로벌 반지성주의 현실에 대해 징후발견적인 해석을 하려고 한다. 후기 자본주의에서 나타나는 이데올로기 호출과 증세현상의 교차되는 지점을 보는 것이다. 지젝의 관심은 유몰론과 관념론의 이항의 대립 즉 진영논리를 변증법적 역설로 넘어서려고 한다. 이것을 위해 그는 십자가의 예수의 절규에서 그레코-영지주의 전통과 실존주의의 환상을 넘어서려고 한다.

 

진리는 내안에 드러나지도 않으며 내가 갖는 것이 아니다. 십자가의 절규에서 예수는 자신의 신념을 부셔버리는 대타자와의 트라우마적인 경험을 했다. 진리는 여기서 출현한다. 왜 지젝은 신학적인 시니피앙을 즐겨 사용할 까? 그것은 생각을 다르게 하는 것이 지젝이 추구하는 민주주의 이념의 기초여서 그럴 것이다. 그런데 지젝의 한계는 양자이론과 장이론에 문외한이다. 여기에 무슨 변증법적 역설이 있나? 만일 그런 역설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공생과 서로 세워주는 공동구성(co-constitution)에 나타난다. 이것은 헤겔의 시스템 사고에 근접하는데 여기서 지양은 자기전거와 구조의 역할에 의해 새로운 생의 출현으로 나타난다.  

 

세포의 자기 생산성

 

앞서 본 것처럼 진화는 더 이상 다윈이 말한 것처럼 자연선택을 통해 생존경쟁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이미 세포의 세계에서 우리는 개별적인 요소들이 공동으로 협력하고 공생의 미학을 본다. 물론 자연 과학자들로부터 배우는 중요한 통찰은 미래는 불확실하고 예측할 수 없지만, 자연의 삶에는 아름다움과 복잡성이 존재한다. 이것은 공공선의 차원을 지적한다. 정의롭고, 지속가능한 범 지구적인 삶을 지켜나가기 위해 과학자들이 하는 예언적인 경고와 정치가들의 책임/심정윤리 그리고 세계종교들과의 협력은 시급하다.

 

사자가 양과 함께 눕는 세상(이사야 11장)은 단순한 유토피아가 아니라, 사자와 양들이 공생하는 새로운 자연질서를 그린다. 자연과 인류 그리고 프로렙시스의 비전은 공론장의 정의를 위해 헌신한 자들에게 생태-윤리적인 지침을 제공한다. 프로렙시스의 가능성은 열린 미래로 부터 현재화되며 예언자적인 비전은 우리에게 가능성으로 주어진다. 이러한 바전이 현재의 기후변화와 같은 위기와 재앙앞에서 신중하고 올바른 정책을 수행하고 행동을 취하도록 한다.

 

자연은 더 이상 지배와 정복의 대상이라기보다는 인간의 본성처럼 외부의 세계에 예민하며 조그만 변동에도 영향을 쉽게 받는다. 자연의 삶은 인간에게 대화와 존중과 협력을 요구한다. 세계는 더 이상 데카르트나 뉴톤이 꿈꾸던 기계와 같은 것이 아니다. 원초적 생은 자기생산성과 소산구조를 통해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내고 현상학적 생활세계에 의미배경이 된다. 이러한 자기 생산성과 네트워크의 협력에서 인간은 자유로운 존재로서 창조적이며 도덕적인 역할을 수행한다. 이러한 도덕적인 책임은 개인의 이성에만 근거하는 것이 아니다. 자연과 우주 그리고 우리가 몸담고 살아가는 시민사회가 기능적인 분화와 합리화 과정을 통해 도덕적으로 진보한다.

 

미래는 지금 여기서 변혁된 실제로 드러난다. 우리가 생의 원리를 무시하고 여전히 구태한 존재론과 인식론에 머물러 닫혀버린 삶을 영위할 때 부패와 변질은 필연적인 것이 된다. 문화적 침전과 하비투스에 들어와있는 반지성주의나 집단 나르시즘에서 돌아서야한다. 끊임없는 내재적 비판과 선한 삶을 향한 열망과 해방의 기획을 향해 나가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