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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프레드 슈츠의 사회학과 베르그송

content6462 2026. 1. 7. 01:08

현상학적 사회학

 

오스트리아 비엔나 출신 알프레드 슈츠는 <사회 세계를 위한 의미구성, 1932>에서 후설의 현상학을 막스 베버의 의미행동과 이해의 사회학에 접목시켰다. 슈츠는 베버의 사회학에 현상학적 토대를 제공했다. 1938년 히틀러의 오스트리아 점령으로 인해 슈츠는 파리로 이주하고 이후 미국의 뉴옥의 사회 리서치 뉴 스쿨의 교수로 활동했다.

 

슈츠는 탈콧 파슨스의 기능주의 사회학을 날카롭게 비판하고 미국의 학계에서 현상학과 사회과학의 가교를 놓은 사상가로 간주된다. 후설에 의하면 모든 인간의 직접적 경험은 생활세계 안에서 작동된다. 생활세계는 자연세계와 달리 인간의 정신적 문화적 세계이며 일상성의 경험과 방향과 행동을 포괄하는 총체적 영역을 의미한다. 생활세계안에서 현존재는 "삶의 전기로 조건된 상황"에서 살아간다 (Schutz, On Phenomenology and Social Relations, 15).

 

개인은 자신의 삶의 전기와 역사 그리고 다큐멘트를 벗어날 수가 없다. 소통과 언어는 결정적이며, 지식스톡 (지식정보와 축적)은 다양한 방식으로 구성되며 삶에 연관성을 갖거나 아니면 주변적인 것으로 간주된다. 지식스톡에 근거해 개인은 과거와 현재의 경험을 해석하고 미래를예견한다. 후설은 지식스톡을 의미의 침전으로 불렀다. 한 사회의 에피스테메는 의미의 침전을 담고있다 (ibid., 74).

 

현상학의 방법

 

현상학은 엄밀한 학문이며, 이것은 수학화된 언어로 세계의 경험과 의미를 발견할 수 없다고 본다. 자연의 세계는 갈릴레오에 의해 수학화가 되었고, 자연과학의 도구화가 되었다. 현상학은 세계에 대한 지각을 기초로 본질적인 것을 개념화하고 이러한 개념적 틀에서 엄밀하게 인간의 경험과 의미를 추구한다.

 

인간의 경험과 지식에 보편구조로 작용하는 것은 생활세계이다. 당연히 여겨진 것에 대해 태도를 변경하고 생활세계의 사태자체로 돌아가 의식의 지향성과 의미를 구성한다. 인간의 의식은 본잘적으로 어떤 대상에 관한 것이며 대상을 지향한다. 반성 안에서 주어지는 현상은 내가 생각하는 지향적 대상이며, 모든 경험은 지향성의 대상에 의해 구성된다.

 

이것을 위해 자연적 태도로부터 돌아서서 현상학적 환원이 요구되며, 이것은 판단중지를 의미한다. 판단중지는 기존의 당연한 상식과 자연과학적 전제에 대해 문제틀하는 사고일 수가 있다. 현상학적 환원을 통해 후설은 경험의 내적 흐름으로 돌아가며, 이것은 지각과 반성과 인식을 포함한다. 후설은 의식의 흐름자체로 돌아가서 내적구조를 경험하고 기술한다. 의식의 흐름과 순수한 특질에 대한 현상학적 접근은 베르그송의 순수지속의 시간성과 의식의 상태에 가깝다. 슈츠는 후설의 의식의 흐름과 시간성을 베르그송의 개념을 통해 해명했다.

 

베르그송의 지속과 후설의 지향성

 

르그송의 방법은 직관으로 볼 수 있다. 직관은 철학적 명료함을 말하며 순수지속을 전제한다. 순수지속의 시간성에 따라 직관은 철학의 방법으로 고양된다. 그러나 직관은 순수지속이나 기억에 비하면 2차적이다 (Deleuze, Bergsonism, 13). 순수지속 자체는 순수하게 직관적으로 남으며, 본질적으로 기억이며 자유이다.

 

순수지속은 잠재적으로 기억이기 때문에 의식과 자유가 된다. 여기에 접근하는 방법은 지성이 아니라 직관이다. 직관이 없으면 순수지속은 단순히 심리적인 것으로 남는다. 우리는 많은 지속의 흐름을 다양한 방식으로 서로 다르게 지각한다. 지속의 흐름은 내면적인 것이며, 변화하고 융합되며 차별화되는 다양체이다. 우리는 이러한 내적인 다양체 즉 잠재성의 다양체를 직관을 통해 경험한다.

 

베르그송의 직관에 기초한 정밀한 방법은 후설의 엄밀한 학문과 의식의 지향성에 가깝다. 직관은 의미의 다수성과 다차적 측면을 갖는다. 진리는 문제틀하는 방식과 창조적 능력 (엘랑 비탈)에서 나타나지, 기존의 것과 편견을 받아들이는 데 있지않다.

 

유기체의 삶 자체는 본질적으로 장애를 제거하고 문제를 제기하고 해결하는 생의 활력과 도약으로, 다시말해 창조적인 진화의 과정으로 나타난다. 이것은 스피노자의 생의 자기보존과 확장 즉 선한 삶을 향한 열망과 윤리에 비교될 수 있다. 후설에게서 선한 삶을 향한 열망은 신체의 지향성을 통해 타자의 신체와 공감하고 의미있는 공동세계를 창조해나가는 윤리적 실천으로 나타난다.

 

베르그송은 순수지속과 공간을 이분화했다. 경험의 흐름안에 살아있는 것은 시공간의 세계안에 살아있는 것과 분리된다. 베르그송에게 지속의 내적 흐름은 헤라클레이토스의 변화와 생성 그리고 사라짐처럼 끊임없이 되어감이며, 되어감의 과정에서 이전 시간의 내용은 축적되며 이질적 요소로 사라진다.

 

이러한 순수지속의 시간성은 잠재적이며 지속적인 다양체이며, 시공간에서 측정되는 양적 시간으로 환원되지 않는다 (Bergsonism, 38). 순수지속은 오로지 의식상태에서 끊임없는 흐름이며, 이것은 잠재성이며, 진화나 역사에서 현실화의 운동에서 직관과 이미지로 나타난다. 이러한 현실태의 이미지는 잠재성의 무의식성과 동일하지가 않다.

 

현실화는 차이로 즉 다양체로 나타난다. 모든 것은 다양체 안에서 현실화되지만 이미지로서 완전히 실현이 되지 않는다. 잠재성은 여전히 현실화할 것을 담고 있으며, 이것은 무질서나 또는 무로 언급될 수도있다. 이것은 하이데거의 존재/무에 근접한다.

 

그러나 주관 내면적으로 볼때 순수지속에서 경험되는 것은 지금과 새로운 지금으로의 흐름 밖에 없으며 반성의 그물에 걸리지 않는다. 반성은 지성의 기능으로서 일상성의 세계에 관련되며 잠대성의 이미지로 볼 수 있다.

 

예를둘면 배르그송의 지속과 순수기억의 동일성은 현재안에 과거가 축적되고 보존되는데서 볼 수 있다. 현재는 증대하는 과거 이미지를 포함하며, 순수 지속의 기억은 직접적인 지각의 핵심인 회상을 포함한다. 순수기억/의식의 회상의 이분법에서 현재는 순간의 계기를 과거와 미래로 갈라 놓는다.

 

그러나 들뢰즈는 질문한다: 어떻게 순수지속이 순수 기억이 되는 가? 베르그송에게 생이 의식과 공존한다면 어떻게 생은 자기 의식이 되는가? (Bergsonism, 52). 만일 순수기억이 지속과 동일시되고 비심리학적인 무의식이고 잠재성이라면, 베르그송의 차이의 존재론은 순수지속 순수기억의 관계와 차이를 해명하기 어렵다. 순수기억이 무의식이라면 이것은 프로이드의 현재화된 무의식과는 달리 심리학 이전의 존재론에 속한다. 이것은 영혼이전의 영원한 삶에 관계되는 플라톤의 회상론에 근접한다.

 

그러나 슈츠에 의하면, 경험구조는 지속의 흐름에 예속되거나 아니면 그것을 반성하기위해 멈추고 개념적 파악에 따라 달라진다. 잠재적 기억이 현실화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기억과 반성이 의식의 흐름과 지속의 시간성을 현실화한다. 예를들면 우리는 움직임을 내적 삶의 현상으로 경험할 수 있다. 우리는 동일한 움직임을 균질적인 공간에서 고착시킬 수 있다. 이 경우 우리는 움직임의 본질 --되어감과 사라짐--을 파악하지 못한다. 모든 것은 현실화 되지만 완전히 실현되지 않는다.

 

우리는 반성을 통해 움직임을 이미 지나온 것으로 이해한다. 주관적 기억(회상)과 반성은 베르그송의 순수지속과 가억의 동일성과는 다르다. 오히려 순수지속은 의식의 흐름과 시간성에 속하며 이것은 헬라클레이토스의 변화와 생성의 변중법이다.

 

기억을 하는 것은 (노에시스) 의미를 (노에마) 산츌하기 위해 의식의 지향성에 속하며, 외부의 지각대성은 의식의 시간성에서 과거의 파지와 현재의 반성 그리고 예견의 지평에 서 있다. 또한 외부 대상에 대한 지각도 보는 관점에 따라 지향성의 지평은 변경되고 확대된다. 지향성은단순한 관점주의가 아니라 원근법의 스펙트럼을 가지고 있고 두터운 기술과 해석의 차원이 나타난다.

 

마찬가지로 사람의 행위를 동일한 관점에서 고려할 수도 있다. 인간의 행위는 지속되는 의식이거나 아니면 이미 완성된 것으로 간주된다 이것은 경험일반에서 나타난다. 나는 순수지속을 불가역적인 방향으로 경험하고 이전 순간과 바로 지금의 차이를 구분한다

 

슈츠의 해석에 따르면. 베르그송의 순수지속을 출발점으로 삼을 때 두 가지 의식의 수준에 관여된다. 순수지속의 경험은 시공간의 세계에서 단절된 이미지와 다르다. 일상성의 삶에서 자아는 시공간의 세계에 대한 의식에 기초해 사고하며 행동한다. 삶에 대한 주목 (attention a la vie)을 통해 우리는 순수지속으로 해소되지 않는다 (Schutz, ).

 

베르그송에 의하면, 지속의 흐름에서 부터 개인적인 경험을 구분하는 것은 인위적이며 순수지속에 대해 이질적이다. 이러한 과정을 분석하고 표상하는 것은 순수지속과는 급진적으로 다르다. 베르그송은 현상학이전 단계에 속한다.

 

순수지속과 순수기억은 동일하며 잠재성으로서 영원한 과거의 존재론적 자리를 모든 개별적인 과거들을 위해 갖는다. 그렇다면 이러한 과거일반은 흐르기 보다는 과거의 불변의 존재이며 오로지 존재를 향한 도약 (키에르케고르)이나 엘랑 비탈로 접근될 수 있다 (Bergsonism, 57).

 

이 지점에서 들뢰즈는 베르그송의 기억의 형이상학이 플라톤의 회상론에 기초한다고 인정한다. 플라톤의 회상론은 과거의 순수존재 즉 영혼이전의 이데아의 세계를 확인한다. 이것은 존재론적 회상이며 시간의 전개에서 차이와 다양체의 토대가 된다 (Bergsonism, 59) 그렇다면 베르그송의 과거와 현대의 공사성에서 영혼은 차이를 가지고 다양한 방식의 삶에서 주기적으로 윤회하게 된다.

 

그러나 슈츠는 과거복귀 존재론이나 플라톤적인 영혼주기설에 관심이 없다. 현상학적인 차원에서 의미있는 경험을 기술하는 것은 지속의 흐름에서 돌아서서 반성적 태도를 취한다. 기억과 반성의 형식에서 이전단계의 지속의 흐름은 지금의 나에게 현상으로 주어진다. 이것은 단순한 이미지가 아니다. 순수지속의 흐름에 대한 경험과 의식은 매 순간 기억으로 변화된다.

 

기억함으로써 경험은 순수지속에서 추출되며 의식은 변형된다. 이것은 반성적 태도를 통해 이전단계를 파지하면서 경험과 의미로 변형시킨다. 베르그송의 주목행위는 직관에 속하며, 현실태에서 파악되는 것은 잠재성의 세계에 대한 이미지 내지 모사일 수가 있다.

 

 

그러나 슈츠에 의하면 순수지속의 흐름에서 내적 지각의 경험을 반성하고 재생산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 중요한 것은 의미있는 경험을 산출하기 위해 과거에 대한 회상적 반성이다. 과거 겅험된 것만이 현상학적으로 의미가 있다. 의미는 오직 지향성의 작용이며, 이것은 반성적 시선에서 나타난다. 배르그송의 순수지속은 인간의 지각과 경험으로 채워져야한다. 이것은 과거일반의 잠재성에서 현상태의 이미지화로 가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인간의 지향성을 통해 현실의 경험을 잠재성으로가져간다.이러한 지향성의 방법은 과거존재를 향한 도약이라는 알랭 비탈이 아니라, 생활세계의 연관성에서 지향성의 주체는 의미를 부여하고 가치를 구성한다.

 

여기서 활력적인 자아(현존재)는 신체의 움직임과 다른 신체에대한 지향성뿐만 아니라 분위기와 느낌과 감정효과를 포함한다. 기억으로 회복될 수 있는 것만이 모든 합리적인 구성의 조건이 되며, 회복될 수 없는 것은 형언할 수 없는 것으로 여전히 남는다.

 

후설에게서 행위는 의미를 부여하는 의식경험이다. 모든 경험이 의미를 담는 것은 아니다. 의미를 부여하는 경험은 자아의 태도적인 행동이며, 이것은 지향성과 그 변경과 확대안에 주어진 모든 경험을 의미론적으로 포함한다. 현상학의 의미론은 베르그송의 잠재성의 다양체에서 현실태로 나가는 일원론과는 다르다.

 

원초적 행위는 의식경험으로서 지각된 것이며, 적극적인 지각의 활동(노에시스)을 통해 의미(노에마)가 부여된다. 현상학적 경험은 이미 행위가 된 것에 반성적으로 관여하며 해석한다. 지향성의 방식에서 활동적인 지각활동은 주어진 의미대상에 관계하며 해석한다. 본래적인 지향성은 자발적인 활동성이며 지향적인 변경안에 여전히 보존된다.

 

슈츠: 생생한 현재

 

베르그송에 의하면 의식의 삶은 행동에서 꿈에 이르는 무한한 단계를 갖는다. 행동의 단계에서 의식은 깨어있지만, 꿈의 단계에서 가장 저조하다. 의식의 긴장의 다양한 단계에서 삶에 대한 관심이 다르게 기능한다. 삶에 대한 주목은 의식적인 삶의 기본적 규제원리이다. 이것은 사고의 흐름을 명료하게 표현하며 기억의 기능을 규정하며 현재의 경험 안에서 살게한다. 이것은 외부대상에 대한 방향을 잡거나 또는 과거경험에 대한 반성적 태도를 통해 의미를 산출한다.

 

슈츠에 의하면 베르그송과 후설의 공통점은 외부세계 구성을 위해 신체의 움직임과 더불어 시간관점에 있다. 신체의 움직임은 시공간의 세계에서 사건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의식의 흐름에 대해 자발적 행동의 표명으로 볼 수있다.

 

이것은 순수지속의 흐름에 참여한다. 내적시간의 순수지속에서 인간의 현실적 경험은 파지와 기억에 의해 과거에 관련되며 예견과 기대를 통해 미래에 관여한다. 신체의 움직임을 통해 우리는 내적시간에서 외부의 우주적 세계로 이행하며 일과 활동성을 통해 두 가지 다른 시간에 참여한다.

 

이러한 일의 활동은 사건의 계열로서 외적/내적 시간의 차원을 하나의 흐름으로 연합한다. 이것을 슈츠는 생생한 현재(vivid present)로 부른다. 이러한 생생한 현재는 순수지속과 우주적 시간의 교차에서 현상학적으로 의미있는 활동의 시간 즉 질적인 시간으로 파악된다. 생생한 현재는 반성과 기억에 접근되지 않는 미래의 예견의 세계를 지적한다. 활동하는 현존재만이 생생한 현재에서 과거의 경험의 의미와 미래의 예견적 의식 (프로렙시스)에서 살아간다.

 

과거는 단지 지나간 것이 아니라 총체적 시간(순수지각)의 부분적 실현이며 현존재의 활동과 일을 통해 현실화되며 예견적 미래로 이어진다. 역사와 미래는 생생한 현재안에서 상관관계로 들어온다. 일과 실천을 통해 현존재는 자신의 행동에 선책의 자유를 가지며 책임적인 존재가 된다 (ibid., 71). 이것은 현존재가 살아가는 현상학적 사회학의 프로렙시스를 말한다.

 

베르그송에게 삶에의 주목은 직관에 기초하며 순수지속의 시간과 외부의 시간의 동시성은 감각에 의해 이미지로 파악된다. 과거일반의 존재론은 현재와 동시적으로 공존하며 잠재적 존재론의 과거가 생의 활력과 도약을 통해 현재로 드러나지만 현재를 쫒아가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현상학적으로 볼때 우리는 과거일반의 존재가 무엇인지 알 수가 없으며 그것의 침전이 데카당스하게 츌현할 때 인간은 비판할 수가 없다. 현상학은 과거복귀 존재론이 아니다. 오히려 슈츠는 반성과 기억의 단계을 통해 내적시간과 외적시간의 교차를 생생한 현재로 의미화하고 미래의 프로렙시스로 연결한다.

 

들뢰즈: "베르그송으로 돌아가기"

 

들뢰즈는 "베르그송으로 돌아가기"에서 베르그송의 형이상학을 삶과 사회를 위해 갱신하고, 자연과학을 변형하려고 한다. 그러나 형이상학은 자연과학을 거절하지 않는다. 과학이 기계론적 환원주의가 되지않는다면 그것은 형이상학을 필요로 한다 (Bergsonism, Afterword).

 

현상학에서 지속의 시간성과 직관방법, 지향성에 기초한 다양체이론 그리고 엄격한 학문은 베르그송에게 공명한다. 특별히 베르그송과 후설을 접합시켜 사회학으로 발전 시킨 사람은 앞서본 것처럼 알프레드 슈츠이다.

 

그러나 들뢰즈는 현상학자가 아니라 베르그송의 형이상학을 기초로 사회학의 차원에서 특히 프로이드의 오이디푸스와 다윈의 진화론을 전복한다. 들뢰즈가 슈츠와 다른 것은 순수지속 시간성은 잠재성을 강조하며 잠재성이 현실화와 다양체로 진화하며 차이를 창조한다.

 

지속성과 이질성과 단순성은 잠재성 개념 안에서 파악되고 화해된다. 의식의 사간흐름에서 잠재성은 다양체이지 일자와 다수성의 변중법적 관계가 아니다. 것은 후설과 헤겔의 현상학과 갈라선다.

 

베르그송의 형이상학적 구조는 스피노자의 실체-속성-양태에 근접하며 엘랑 비탈은 선한 삶을 향한 코나투스에 비교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르그송은 여전히 풀라톤의 일자와 다수성의 비변증법적 전통에 서 있다.

 

잠재성의 형이상학은 자연세계와 생활세계를 하나로 묶는다. 기억과 생은 잠재성에 기초한다. 들뢰즈는 일자와 다수성의 관계에서 일자(정립)가 다수성(반립) 그리고 다수성의 변증법적 일치(종합)를 거절한다. 변증법은 추상적 개념의 운동이며 대립에 기초해 자아와 타자를 매개한다.

 

들뢰즈는 니체에 근거하여 플라톤의 이데아 세계를 허물지만 베르그송에게는 여전히 플라톤적 차원이 있다. 플라톤에게서 일자(파르메니데스)는 다수성(헤라클레이토스)이며 다수성은 일자이다. 존재는 비존재이다. 다수성의 일치는 무엇이며 일자의 다수성은 무엇인가? 일자 (정립)와 다수(반립)를 변증법적으로 결합하는 것은 허구이다. 유능한 재단사와 훌륭한 의복은 잠재성에서 현실태의 관계와 같지 변증법적 논리로 파악할 수 없다. 오히려 순수지속은 일치와 다수성의 종합이다 (Bergsonism, 45).

 

이런 점에서 들뢰즈는 베르그송의 혁명을 본다. 우리는 현대에서 과거로 진행하지 않는다. 지각에서 순수기억으로 나가지 않는다. 오히려 과거에서 현재로 그리고 순수기억에서 지각으로 나간다 (ibid., 63).

 

반복과 차이: 영원회귀

 

들뢰즈에 의하면 순수지속은 실제로 의식안에서 흐름이지만 그것은 모든 개별 과거들과 현재의 계기에 잠재성이 공존한다. 이러한 공존과 더불어 반복은 순수지속으로 재도입된다. 이것은 물질에 대한 신체적 반복이 아니라 다른 타입들에 대한 심리적인 반복이다.

 

현실적 반복이 아니라 잠재적 반복이다. 과거전반은 반복되고 다시 시작된다. 우리는 도약을 통해 과거일반 존재로 도약하고 일정한 과거의 영역으로 들어간다. 순수기억에 대한 호소는 내가 잠재성과 특별한 과거의 영역에 자신을 위치 지우는 것이다.

 

여기서 들뢰즈는 존재자체의 영역 다시말해 과거일반의 존재론적 영역을 언급한다. 모든 것들은 시간의 흐름에서 영원한 과거와 공존하며 개별 현재의 계기들에서 반복한다. 들뢰즈는 다음처럼 요약한다:

 

1) 존재론적 도약 (알렝 비탈; 도약의 역설), 2)현재와 과거의 정도 차이 (존재자체의 역설), 3) 과거 존재론은 현존재를 쫒아가는 것이 아니라 현재와 공존한다 (공존의 역설), 4) 현재의 계기와 공존하는 것은 과거일반의 총체이며 수축과 이완의 작용으로 나타난다 (심리적 반복의 역설) (ibid., 61).

 

이러한 역설들은 불교의 연기처럼 서로 엮어있고 상호의존된다. 그러나 불교의 연기를 둘러싼 논쟁에서 나가르주나의 중관학파의 공과 비움은 여래장울 기초로 나타나는 요가카라 의식학파의 아리아식과는 다르다. 그런가하면 중국의 화엄불교에서 이사무애와 사사무애의 논쟁에서 종밀의 체계화는 사법계보다는 이법계의 차원에 주목한다. 티벳 불교에서 달라이 라마의 초점은 나가르주나의 공을 대자대비 (마하 카루나)동일시한다. 그러나 일본 교토학파에서 공은 절대무로 이전되고, 연기는 윤리와는 상관없이 일제의 식민지배 이론을 옹호된다.

 

둘뢰즈가 동일자의 반복(신과 이데아 또는 영혼불멸 등)을 비판하고 차이나는 반복을 부각 시킨다면, 이것은 자성을 부정하는 중관학파에 접근할 수 있다. 그러나 공이 고정된 실체가 없이 자성을 부인할 때 이것은 난징대학살의 사건으로 나타났다.

 

베르그송-들뢰즈의 영원한 과거의 형이상학은 베단타 철학이나 불교와 비교될 수 있지만 둘뢰즈의 관심은 니체의 영원회귀를 차이와 반복으로 해석하는데 있다. 헤라클레이토스의 순수생성의 사유가 영원회귀의 기초가 된다면,

생성을 시작하지않는 제우스/로고스는 되돌아온다.

 

이것은 생성되고있는 것의 존재자체이다. 영원회귀는 생성의 세계( 헤라클레이토스)와 존재의 세계(파르메니데스)에 최대로 접근한다. 그렇다면 영원회귀는 동일자 즉 제우스/로고스의 회귀가 되어야 하지만 둘뢰즈는 차별자의 반복으로 말한다 (들뢰즈, <니체와 철학>, 98).

 

그러나 니체는 힘에의 의지를 근거로 영원회귀를 디오니소스적 생의 출산과 반복에서 사실주의적으로 해석했다.힘과 힘의 관계는 지배와 예속에 기초하며 니체의 계보학은 관계 속에 놓여있는 힘의 생성에 주목한다. 이러한 힘힌 디오니소스적 생을 긍정하는 의지로 나타나며 고결한 초인의 윤리로 구성된다.

 

그러나 들뢰즈는 짜라투스트라를 영원회귀와 초인과 관련하여 열등한 위치에 설정한다. 들뢰즈가 하이데거의 니체해석에 거부감을 갖는 이유는 하아데거가 영원회귀와 초인사상을 자신의 존재와 현존재의 관계로 이행시키기 때문이다. 하이데거는 니체의 계보학의 비판적 사유를 무시한다 (<니체와 철학>, 318. 주. 100).

 

들뢰즈의 니체해석에는 베르그송의 과거일반 존재론과 순수지속의 잠재성이 배경에 서 있다. 니체는 형이상학자로 해석된다. 그러나 열역학 제 2 법칙과 현대 물리학에서 시간의 화살이론이나 우주 팽창론은 베르그송의 과거 일반존재론으로의 도약과는 다르다.

 

문제틀: 차이와 반복

 

베르그송의 프로젝트는 모든 부정의 형식과는 달리 차이를 사고하는 것이다. 존재에는 부정이 아니라 차이가 있다. 부정은 추상적 개념에 불과하며 지나치게 일반적이다. 모든 부정의 공동뿌리는 잠재성에 기초한 차이에 있다 (Bergosonism, 46).

 

그렇다면 역사에서 일어나는 전쟁이나 파시즘 또는 핵폭탄이나 체르노빌사태 그리고 자유콩고 국가에서 유럽에 의해 자행된 천만명의 살해정치등은 삶에 대한 부정이 아니라 단지 차이에 뷸과하며 잠재태의 실현과정에 있는 것인가?!

 

베르그송의 형이상학에는 역사 사회적인 영역에서 물질적인 이해관계와 권력의 지배방식에서 나타나는 갈등과 대립 그리고 투쟁이 없다. 재단사와 의복 사이에는 이미 사회적 매개가 존재한다. 만일 순수지속이 현실태와 다양체 그리고 차이를 종합하는 근원이라면, 엘랑 비탈이 과거 일반존재로 도약하고, 진화의 과정에서 창조적 능력으로 나타난다.

 

이것은 오로지 직관으로 파악된다. 그러나 인간의 직관은 원초적 생의 본능이 아니라, 역사의 영향과 사회적 조건에서 삶의 전기와 다큐멘트에 의해 결정될 수 밖에 없다. 슈츠의 현상학은 지각과 신체 또는 의지와 감정의 작용에서 지향성과 의미를 반성을 통해 역사 사회적인 영역에서 생생한 현재로 불러낸다. 그러나 베르그송의 생의 주목은 잠재성에서 파생되고 현실화되며 여전히 순수지속의 시간성에 의해 조건된다.

 

베르그송-들뢰즈의 형이상학에서 과거일반은 존재론적으로 순수기억과 지속의 잠재성에 속하며 우리는 과거를 현재에서 파악하지 않는다. 과거일반은 영원하며 모든 개별 시간들을 가능하게 만드는 존재론적 도약의 성격을 갖는다. 이것은 역사와 자연을 넘어서 있는 존재론적 잠재성이며, 인간은 과거존재를 향해 도약한다. 이것은 물자체 즉 과거의 존재자체로 도약하는 존재론적 기억이다.

 

생을 향한 도약 즉 알렝 비탈을 통해 순수기억은 심리적으로 현실화된다. 현실태는 순수기억의 이미지가 되며

플라톤적인 의미에서 회상될 수 있다. 잠재성의 세계가 이러한 이미지/회상 안에서 구현될때 이데올로기 비판은 어떻게 가능한가? 다시말해 순수기억이 이미지화 하면서 현재와 합성이될 때 이러한 수축과정에서 진리는 엘랑 비탈에서 드러나지만, 역사적 상황에서 생의 도약은 언제든지 파시늠과 집단 이기주의에서 출현할 수있다. .

 

다시한번 현상학적 태도로 !

 

현상학은 태도를 변경하고 지향성을 기초로 생생한 현재를 위해 의미를 구성한다. 잠재성의 존재론에 예속되지 않는다. 엘랑 비탈은 지각과 의지 그리고 신체의 지향성에서 의미와 생활세계를 윤리적으로 실천하는 데서 나타난다. 이것은 활력주의가 아니라 합리적 반성과 의미있는 행위에 주목한다.

 

현상학은 생활세계에 기초하며 생물학을 원초적 생의 근원을 파악하는 학문으로 존중하지만 베르그송처람 잠재성과 엘랑 비탈로 형이상학화 하지 않는다. 생활세계와 자연세계는 상호성안에 있다. 생의 세계가 인식과 존재를 규정한다. 여기서 니체의 계보학과 초인의 고결한 윤하와 큐피디타스에 뻐져버린 자들에 대한 구원의 모티브는 설정된다.

 

인간은 이성적 존재이며 신체를 통해 세계를 지각하고 의미를 통해 타자와 공감하면서 상호주관적으로 공동세계를 실천적으로 산출해나간다. 존재를 향한 진정한 도약은 생활세계와의 관계와 상호주관적 실천 그리고 문화의 침전도에서 나타나는 과거의 잠재성의 불명료함과 무질서 그리고 편견 그리고 독단적 일원론울 책임적으로 비판한다. 이것은 미래를 향해 프로렙스적 해방의 기획에 헌신하는 삶의 의미를 추구하는 철학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