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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사회학과 현상학의 지향성

content6462 2026. 1. 7. 00:57

역사 사회학과 현상학을 매개하는 것은 헤겔의 변증법으로부터 온다. 나는 헤겔의 <정신현상학>을 후설의 지향성에 매개하고 칼 마르크스와 막스 베버의 상관성을 이러한 틀에 장착한다. 사회로부터 개인의 삶을 보는 세 가지 비판이론적 전통이 있다. 첫 번째는 헤겔과 마르크스의 변증법적 접근에서 볼 수 있고, 두번쨰는 루소와 몽테스키외에서 오는 사회학적 입장이 있으며, 세 번째는 알렉시스 토크빌과 에밀 뒤르캠이 집단적인 또는 구조적인 시스템 방법원리를 제시했다. 변증법적 비판이론은 인식론에서 프랑스의 사회학적 접근과는 현격한 차이를 보이지만, 사회로부터 인간을 보는 공동의 관점이 있다. 왜냐하면 인간보다는 사회나 역사가 우위에 서 있고 사회적 존재로서 인간은 의식과 사유에 영향을 미쳐오는 인식론적 환경이나 문화나 역사적 배경를 피해갈 수가 없다. 사회적 관계의 총체성 또는 앙상블은 인식론적 문화의 중요성을 지적한다.

 

변증법은 구체적 보편성을 파악한다

 

마르크스는 “유대인 문제”에서 부르즈와지의 사적 소유권을 강화하는 보편적인 인권 개념을 비판했다. 그러나 인권은 보다 구체적으로 사회적 관계의 앙상블에서 파악 되어야 한다. 시민사회는 만인대 만인의 투쟁의 상태에 있고, 민주적인 국가는 시민사회와 대립된다. 마르크스는 국가와 시민사회의 관계를 검토하고, 인간을 시민 (보편국가의 구성원)과 부르주아지로 분리했다. 당대 유대인들의 인권이 인정받지 못하는 독일에서 보편적 인권개념은 별 다른 의미가 없다. 보편적인 유적인간은 시민사회 안에서 자유와 평등 그리고 연대로 구현 되어야 한다. 이런 점에서 종교는 국가부터 분리되어야하고, 더 이상 국가종교는 의미가 없다. 국가는 헤겔의 절대지처럼 종교위에 자리한다. 종교비판의 원리는 여기에 기초된다. 이른바 보편적 구체성 (Universal-concrete)은 변증법의 핵심내용이며 특징으로 나타난다.

 

물론 이것은 헤겔 (1770-1831)로부터 온다. 헤겔과 마르크스로 이어지는 철학의 전통에는 당대 프로이센 국가의 정치적 배경이 중요하다. 프리드리히 2세 대왕 (17 86-1797)의 시기에 계몽 절대주의가 중심에 있었다. 강력한 군사력을 기초로 수준높은 교육제도와 민법에 의한 지배, 고문폐지 그리고 정의의 문제 등에 군주는 독단적으로 개입하지 않았다.

 

칸트와 프랑스 혁명

 

이 시기에 임마누엘 칸트 (1724-1804)는 프랑스 혁명을 검토하면서 계몽의 의미를 중요하게 다루었다. 계몽군주는 공적인 영역에서 시민의 자유와 비판적 이성을 제한해서는 안된다. 칸트의 비판적 자유주의는 루소의 시민국가와 더불어 식민지에 대한 날선 공방을 벌인다. 그리고 공화제 민주주의를 기초로하는 코스모폴리탄주의가 제시되었다. 독일의 계몽 철학에서 칸트의 유산은 엄청나다. 그의 비판적 자유주의는 시민사회와 코스모폴리탄적인 윤리와 그리고 평화를 추구한다.

 

칸트 철학의 유산은 피히테 (1762-1814)를 통해 이어지고, 그는 프랑스 혁명이념에 우호 적이있다. 그러나 18 06년 예나전투에서 나폴레옹이 프로이센을 격파하고, 독일 남부지역이 나폴레옹 지배령에 들어갔다. 피히테는 <독일 민족에게 고함>이라는 강연을 통해 (1807-8) 독일 의 민족주의를 강조하고 나폴레옹에 대항 저항을 고취하기도했다. 칸트의 비판적 자유주의와 공화제 민주주의 안에서 피히테는 군사적 힘이 아니라, 언어와 문화와 도덕 그리고 교육개혁에 기초한 민족주의를 강조했다. 이것은 칸트의 코스모폴리탄 비전에 기초한 애국주의로 표현되는 것이 더 적합할 수도 있다. 그러나 피히테와 헤겔의 시대에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 (1797-1840)는 유약한 왕 이었다. 1806년 프로이센은 나폴레옹과의 예나 전투에서 패배를 한 후, 영토의 1/3을 잃었고 프로이센은 프랑스의 속국으로 전락했다.

 

정치 개혁가들은 농민을 농노로부터 해방했고 개혁 입법들이 도입되었다. 유대인에게 완전한 시민권을 허락하는 법령이 공포되기도 했다. 1807년 융커에게 예속된 농노들에게 인신의 자유가 허용되었다. 법률을 왕의 자의적 권력으로부터 독립시켜 나갔다. 알렉센더 훔볼트 (17 69-1859)에 의한 교육개혁이 이루어지고, 김나지움 교육이 1812년 대학 입학에서 필수과정이 되었다. 보편적이고 민주적인 교육개혁에 못 미쳤지만, 이 시기 설립 된 훔볼트 대학은 유럽의 근대적 대학의 기틀을 마련했다. 당대 피히테와 교류하던 클라우제 비츠는 1810년 군대의 전면개편을 지지하고 전쟁을 “다른 수단을 통한 정치적 교섭”에 불과 하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헤겔과 나폴레옹

 

나폴레옹은 1806년 10월 예나를 점령했다. 말을 타고 지나가는 그를 보고 헤겔이 세계 영혼으로 부른 건 유명하다. 이 시기에 헤겔은 <정신 현상학> (1806)의 초고를 탈고했다. 괴테 (1749-1832)는 초기에 프랑스 혁명에 적대적이었고 나폴레옹의 프랑스를 지상의 지옥으로 혐오했다. 그러나 괴테는 칸트의 계몽철학으로부터 지대한 영향을 받았고, 당대 칸트의 매우 중요한 제자였던 프리드리히 쉴러와 괴테의 친교는 잘 알려진 사실이다.

 

괴테는 이후 자기보다 스무살이나 어린 나폴레옹을 1808년 에푸르트에서 직접 알현하고 그의 문학에 대한 나폴레옹의 이해와 관심에 흡족해했다. 그는 나폴레옹을 자신의 황제로 부를 정도로 경탄했다. 나폴레옹은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애독했고 독일의 문인들과 예술인들을 자신의 문화제국주의 정책에 끌여들이고 있었다.

 

나폴레옹의 정치에서 헤겔은 독일의 봉건적 군주제 정치가 끝나고 새로운 역사의 진보를 위해 근대적 시민법전이 실현될 것을 보았다. 당대 독일은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 다수의 선제후들과 영주들, 51개의 자유 시들로 구성되어 있었고, 대략 300개의 조그만 영주국가들로 나뉘어져 농노제가 시행되는 봉건 전제주의가 지배했다.

 

알렉시스 토크빌은 그의 저작 <앙시앙 레짐과 프랑스 혁명>에서 유럽의 농노제를 분석하면서 17 88년 독일의 농민들은—라인 주의 농민들의 상대적인 자유와 토지의 소유농을 제외하고— 프랑스의 자유 농민들과는 달리 거의 영주에 예속된 노예들로 말한다. 농노해방은 독일의 영주들이 프랑스 혁명에 저항을 하고 두려움을 가진 이유이기도 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나폴레옹의 통치기간 (1806-1814)에 개혁의 시기가 마련되었다. 나폴레옹에 의해 오랜 신성 로머제국으로서 독일의 역사는 끝났다. 역사적으로 볼 때, 서로마 재국의 몰락 후 (475) 로마교회는 샤르마뉴 대제의 의한 프앙크 왕국의 통일 (이탈리아 북부, 프알스, 독일)과 우호관계를 맺고, 교황 레오 3세는 샤류마뉴 대제를 서 로마제국의 황제로 대관식(800)을 행했다. 샤류마뉴 대재에서 발전된 서유럽의 초기 문예부흥에서 로마교회는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그의 사후 프랑크 왕국은 독일과 프랑스 그리고 아탈리아 북부로 분열되고 독일의 오토 1 (962-973)세는 로마교회로부터 신성 로마재국의 왕위가 인준되었다. 비록 신성 로마제국의 왕위는 독일의 재후들에 의해 선출되고 사실상 장치적 실권이 없었지만, 로마교회로 부터 이전의 서 로마재국의 전통을 대변하는영적권위를 부여했다. 독일의 신성 로마재국은 나폴레옹에 의해 해체 되었다 (1806).

 

헤겔은 나폴레옹 황제에 대한 개인숭배보다는 혁명이념을 추종한 그를 통해 유럽 전반에 드러날 자유의 진보를 보았다. 1818년 베를린으로 옮긴 후, 헤겔은 빌헤름 3세의 비호를 받았고, 나폴레옹 몰락 후 프로이센 왕정복고, 좀더 정확히 표현하면 민족주의 철학자로 등극했다.

 

빌헤름 3세는 나폴레옹 몰락 후 유럽정치의 반동적 재편을 위해 1815년 비엔나 체제를 적극적으로 옹호하고 오스트리아 수상 메테르니히를 추종했다. 자신의 권력강화를 위해 많은 반대와 저항에도 불구하고 다수의 루터교회와 소수의 개혁교회를 하나로 묶는 프로이센 개신교 연합교회를 만들었다. 왕은 연합교회를 지배하는 주교로 등극했다.

 

그러나 헤겔이 이상국가로 생각한 입헌 군주제를 반동적인 왕정복고의 군주제와 일치 시키기 가 어렵다. 그의 후기 철학에서 드러나는 사회 비판적인 내용때문이다. 헤겔에 의하면 오히려 시민사회의 삶은 비판적인 이성의 척도와 보편적인 법에 의해 지배되는 인륜국가에서 보호되고 실현 되어야 한다. 그에게서 국가는 윤리적 삶의 실현을 위해서 필수적인데, 이것은 개인의 도덕성과는 다른 차원의 공동체적 인륜성을 말한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인간을 정치적 동물로 정의할 때, 그것은 정치적 주체로서 시민이 자기실현을 통해 공동체의 목적에 부합하는 삶을 말한다. 인간은 공동체를 구성하며 살아가는 정치적 동물이고, 이러한 공동체를 통해서 자기를 실현해가는 존재이다. 이런 전통에 헤겔은 서 있었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윤리적 실체로서 국가의 역할을 이성의 척도와 보편적인 법에 의한 지배로 보았다. 국가의 변증의 보편이념은 이성과 합리적인 법에 의해 지배되는 구체성으로 구현 되어야한다. 여기서 비판적 자유주의와 민족주의가 접합된다. 여전히 헤겔에게서 구체-보편성이 작동한다.

 

역사 사회학적 반성

 

헤겔과 마르크스의 변증법을 헤겔의 현상학적 태도 즉 보편과 구체의 공명으로 파악하는 것은 역사 사회학의 반성에서 특히 공공선과 내재적 비판을 다룰 때   결정적이다.  이제 나는 후설-퐁티의 현상학을 베버의 선택적 친화력에 접합시키고, 이념이 어떻게 사회 구성원들의 물질적 이해관계에서 각인되는 지를 검토한다. 이념은 물질적 이해의 스펙트럼에서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종교 등) 계층화가 되며, 권력의 지배로 나타난다. 이념은 물질적 이해와 권력지배의 그물망에서 사회적 지배담론으로 정당성을 갖는다.

 

베버의 이념은 후설에게 본질에 근접하며 본질은 구체적인 개별들에 대한 개념적 관계를 형성하며 모든 경험자료들과 관련된다. 이것은 퐁티가 말한 것처럼, 어부가 그물을 바다의 깊은 곳에 내려서 많은 어류와 해초를 포획하는 것과 같다 (PP, xv). 본질은 개념적 명료함을 통해 어떤 이념이 역사 사회적 과정에서 어떤 영역에서 그리고 어떤 그룹에 의해 그믈망처럼 펴지는 지에 주목한다. 본질은 이념이 물질관계나 권력지배에서 어떤 연대효과와 정당성이 현상 하는지 검토하며 (의미설정), 다른 한편 어떤 반작용과 부메랑효과를 산출하는 지 분석한다.

 

베버는 이념과 물질의 선택적 친화력에서 신분 행위자들의 활동에 주목하고, 지배방식을 다루는 연구에서 가부장적 지배와 카리스마스적 지배 그리고 법적 관료제의 지배를 분석했다. 베버에게 경제적 분석은 행위자들의 의미있는 활동과 연결되며 상부구조의 법적 질서에 통합된다. 이런 지점에서 배버는 자본주의를 합리적 유형과 제국주의 유형으로 분류했다.

 

그러나 베버의 합리성의 유형은 혼란을 초래하고 개념적 명료함이 없다. 그리고 경제적 영역에서 신분의 활동은 계급분석을 무시할 필요가 없다. 정치가 경제적 관계를 지배한다고 하지만 후기 자본주의에서 경제적 영역은 시민사회 안에서 알정한 자율성을 갖는다.

 

여기서 퐁티의 몸의 물질성은 화육된 코기토의 중요성을 지적하며 헤겔의 욕망과 충족의 변화체계에서 문화사회 전반에서 신체 사회학으로 전개될 수 있다. 퐁티는 베버의 사회학을 루카치의 사적유물론의 차원에서 파악하고 생산력보다는 생산관계의 중요성 (합리롸, 전문화, 분화)에 주목한다. 동시에 루카치의 지나친 프로렐타리아트의 동일성 다시말해 헤겔의 절대지처럼 역사의 주체와 객채의 동일성을 허구로 비판한다.

 

마르크스의 사적유물론과 사회구성

 

마르크스가 사적유물론과 사회구성을 다루는데 프로렐타리아트는 전혀 언급이 되지 않는다. <정치경제학 비판 서문>은 1857-8년 사이에 씌여진 <강요, Grundrisse>의 서문으로 볼 수가 있다. 여기서 마르크스는 라인주 신문의 편집장으로서 1842-3년에 처음으로 물질적인 경제문제를 경험했다고 말한다. 그것은 라인주 의회에서 땔감절도와 지대소유를 둘러싼 재퍈과 논쟁에 관한 것이었다.

 

마르크스는 <헤겔의 법철학>을 검토하면서 시민사회를 기초로 국가와 법의 문제를 삶의 물질적인 조건에서 파악하고, 시민사회를 정치경제학 안에서 해부하려고 했다. 마르크스에 의하면, 인간의 삶의 사회적 생산에서 인간은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일정한 관계로 들어간다. 이러한 생산관계는 물질적인 생산력의 발전에 일정한 단계에 조응한다. 생산관계들의 총계는 사회의 경제구조를 구성하며, 이러한 토대위에서 법적이며 정치적인 상부구조가 출현한다. 그리고 여기에 일정한 사회의식의 형식이 조응한다.

 

물질적인 삶의 생산양식이 사회와 정치와 지적인 삶의 과정일반을 조건짖는다. 인간의 존재를 결정하는 것은 의식이 아니라 반대로 사회적 존재가 의식을 결정한다. 발전의 일정한 단계에서 사회의 생산력은 기존의 생산관계와 갈등하게 되며, 이것은 재산관계와 법적 표현에도 마찬가지다.

 

생산력의 발전에서부터 생산관계와 상부구조는 생산력의 족쇄가 되며. 사회혁명의 시대가 시작된다. 경제적 토대의 변화와 더불어 상부구조는 급격히 변형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생산력을 결정하는 것이 자연과학이며, 마르크스는 이것을 이데올로기적 상부구조와 구분 짖는다. 인간의 의식은 물질적인 삶의 대립에서 설명되며 이것은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긴장과 갈등에서 볼 수 있다.

 

여기서 마르크스는 사회혁명에서 계급투쟁이 아니라 과학기술의 진보를 통한 생산력의 발전을 혁명의 원인으로 파악하고 있다. 아시아적, 고대, 봉건적, 그리고 근대의 부르주아 생산양식에서 경제적 사회구성에서 진보적인 시기가 진행되었다. 부르주아의 생산관계가 사회적 생산과정에서 마지막 적대적 형식이며, 이것은 개인간의 적대적 형식이 아니다. 오히려 개인들의 사회적인 삶의 조건에서 출현하는 적대형식이다. 자본주의 사회의 자궁에서 발전되는 생산력이 이러한 사회적 적대형식을 해소하는 물질적 조건을 창출한다.

 

마르크스에 의하면, 과학의 입구에도 지옥의 입구와 마찬가지로 요구되는 것이 있다. 마르크스는 단테의 <신곡>의 귀절을 인용한다: "여기서 모든 불신은 뒤에 내려놓아야한다. 여기서 모든 겁장이들은 사라져야한다."

 

이러한 측면에서 머릴로 퐁티는 소쉬르의 시니피앙과 시니피에의 관계를 적용한다. 생산관계가 무한한 시니피앙의 교차와 연쇄를 통해 사회학적인 과정 (합리화, 전문화 그리고 관료지배)로 분화된다. 생산력은 기의처럼 작동하지만, 이것을 결정하는 것은 기술 합리성과 과학의 진보에 있다.

 

머릴로 퐁티는 스탈린주의 스타카토프 노동 기계인간을 거절했다. 더우기 마르크스에게 집단수용소나 테러정치는 불가능하다. 이런 정치적 임장으로 인해 사르트르의 스탈린주의에 저항하고, 다른 동료들을 폭력으로 처단하는 사르트르의 무책임한 '반인간주의'에 대립했다. 사르트르의 "실존주의 =인간주의"는 "실존주의=스탈린주의"로 전이된다. 여기서 타자는 지옥이다.

 

머릴로 퐁티는 소비에트 공산주의 문제를 마르크스의 관점에서 문제틀했다. 그리고 마르크스의 휴머니즘은 특히 1937년 부하린의 재판에서 나타나는 공산주의 폭력과 테러와는 상관없다고 본다. 마르크스의 휴머니즘은 인민 독재개념에서 실종될 수 없다. 부하린의 재판에서 부하린의 죄목인 사보타지와 스파이짓은 입증되지 않았고 최고 권력자 스탈린의 남용에 의한 것이었다. 프랑스 혁명의 자코뱅 공포정치가 반복된다. 휴머니즘은 중지되고 테러정부가 출현했다 (<Humanism and Terror>, 27-29, 34).

 

머릴로 퐁티의 지각과 몸의 현상학에서 푸코의 권력관계와 계보학 그리고 마르크스의 노동자 몸의 소외가 현상학적인 차원에서 수용될 수 있다. 신체의 지향성과 의미부여의 힘은 에로틱의 세계에 관여하며 언어의 사회학적 차원은 몸의 중요성를 표현한다. 이것은 푸코의 담론과 권력관계에 비판적으로 열려있다. 지향성의 곡선 (아치)과 의미부여는 힘에의 의지와 계보학에서처럼 모든 것을 힘으로 환원 시키지 않는다. 지향성의 서클이 의미부여의 토대가 된다 .

 

슈츠: 다차적 실재둘과 생생한 현재

 

마찬가지로 알프레드 슈츠의 다차적 실재들(multiple realities)은 사회적 영역들에서 환원되지 않고 자기 고유성을 갖는다. 뉴옥에서 만나는 백인 비즈니스맨과 백인 티벳불교의 스님은 자본주의 잘서 안에서 전혀 다른 의미와 관심 안에서 살아간다.

 

생생한 현재는 반성을 통해 과거의 사건이 현재화 되는 것을 말한다. 시간의 흐름은 과거와 미래 사이에 있으며 프로렙시스적 예견은 과거의 묻혀진 유효한 역사를 아남네시스적 반성을 통해 생생한 현재로 만들어간다. 생활세계는 존재론적으로 주어지지만 나의 삶의 실천에서 출현한다. 이것은 예속된자들을 메시야의 시간에서 벤야민의 아남네시스에 연결된다.

 

상호성에 기초된 진정한 담화는 역사 사회적 경험과 내용으로 채워지며 라캉의 담화와 구분된다. 라캉의 담화는 역사사회적인 경험과 내용에 기초하지 않는다. 담화는 일종의 시니피앙이나 유형에 근접한다. 그러나 후설은 문화의 침전을 하비투스를 통해 정신분석에 비판적으로 보충해줄 수가 있다.

 

역사 사회학과 지향성

 

역사 사회학의 틀에서 현상학의 의미의 고고학과 삶의 관여는 현실의 질서와 사회구성에 변증법적으로 전개될 수가 있다. 여기서 헤겔-마르크스의 변증법의 의미가 재구성될 수 있다. 판단중지나 현상학적 환원은 상징계의 분화질서에 문제틀로 등장한다.

 

퐁티의 기호학에서 시니피앙 시스템은 상호 관계안에서만 의미를 갖는다. 여기서 파롤의 주체는 상징적 관계를 설정한다. 이러한 기호학적 입장은 생산력과 생산관계에서 일방적으로 경제적 계기로 환원되지 않고 가치가 산출되는 사회 문화적 관계에 주목한다. 프로메테우스적 혁명실천은 사회문화적 상징적관계를 벗어나지 못한다. 역사나 사회는 상징구조이며 규칙과 변형 그리고 관료제의 방식으로 묶여있다. 이 안에서 인간은 접촉하고 소통하고 자신의 의도성을 표현한다.

 

의미는 언어와 정치와 종교적 제도 뿐만 아니라 친족관계 와 생산과 자연적 배경, 다시말해 인간교류의 모든 양식에 내재한다. 역사는 언어처럼 싸인 시스템이다. 마르크스의 사적 유뮬론은 이러한 언어학적 틀에서 설정된다.

 

더 나아가 현상학의 틀에서 프로이드를 둘러싼 비판이론 (마르쿠제)이나 라캉-지젝의 정신분석 정치이론은 중요하게 수용될 수 있다. 그러나 문화침전과 하비투스에 대한 분석을 통해 사회의 병리현상과 집단 이기주의와 인지장애와 나르시즘 현상은 징후발견적 차원에서 생활세계의 사회학에서 비판적 분석대상으로 들어온다.

 

역사 사회학은 베버-에른스트 트뢸취에서 시작하지만, 뒤르캠의 종교사회학은 베버의 사회학에 중요한 보충을 한다. 이러한 역사-사회학의 기본틀은 후설의 현상학을 통해 철학적으로 풍부하게 된다. 슈츠에게서 실재에대한 사회학적 구성과 퐁티의 지각의 현상학은 역사 사회학의 영역에서 생을 제어하는 신체의 정치학과 문화에 대한 정신분석의 차원을 열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