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체와 허무주의 문제
니체는 하이데거처럼 독일 민족주의나 파시스트 지도자의 위대한 정치 결단주의가 아니라 오히려 그리스의 고결한 귀족도덕이나 프랑스 혁명에서 미라보 백작과 같은 정치가를 옹호했다 ( < 도덕의 계보>, 김태현 옮김, 46). 미라보는 자코뱅 클럽 회원이었지만 영국과 같은 법적 합리성에 의해 다스려스는 사법적 군주제를 옹호한 정치가였다.
니체는 삶을 긍정함으로써 서구의 형이상학적 이성중심의 허무주의 (계몽주의와 근대성)와 이에 결부된 금욕주의(쇼펜하우어) 그리고 기독교적 플라톤주의의 모든 가치를 전도하려고 했다. 니체의 힘에의지는 몸의 중요성에 주목하며 몸은 지배하는 힘과 지배받는 힘과의 관계로 정의된다. 힘의 모든 관계(화학적, 생물학적,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등)가 인간의 신체의 사회학적 성격을 특징 짖는다.
그러나 하이데거가 보기에 모든 존재들의 기본구조가 힘에의 의지라면, 존재는 동일자의 영원회귀이다. 이러한 니체의 형이상학적 태도는 여전히 유럽의 허무주의를 극복하지 못한다. 니체가 보는 허무주의는 세계관이 아니라 서구의 역사에서 발생한 기본성격이다. 여기서 최상의 가치들은 스스로 퇴락한다. 기독교적 기준과 가치는 그레코-로만의 전통 이후 퇴락했고, 또한 이데아론과 도덕성은 플라톤 이후 철학에서 구속력을 상실했다.
허무주의는 기독교 이전 세계에서부터 시작했다. 이것은 역사적 운동의 기본양식이며, 심지어 창조적 힘을 갖는다. 부패나 생리학적 변질은 허무주의 원인이 아니라 해로운 귀결이다. 이러한 해로운 부작용을 완하시킨다고 해서 허무주의가 극복되지 않는다 (Nietzsche I: 25-6).
하이데거에 의하면 허무주의 극복은 이전의 타당한 가치들을 전복하는 카운터 운동에서 시작하며, 인간들을 새로운 가치와 태도로 인도해야한다. 이것은 한 순간에 일어나지 않는다. 진리에 대한 새로운 탐구와 실험적 시도를 해야한다 (ibid., 29).
이것은 이미 니체의 <짜라투스트라>에서 끊임없는 자기극복의 존재와 창조적 가치와 의미부여로 나타난다. 니체는 근대성이 만들어낸 마지막 인간성의 왜소함과 평준화를 넘어시기위해 초인의 고결한 윤리로 나갔다.
니체의 실험은 예술에서 삶의 촉진제를 보는 것이며 삶을 자극하고 증강하는 것이다. 더 나아가 니체에게 진리는 일종의 오류이며. 이러한 진리의 오류없이 삶을 살 수가 없다. 진리를 궁극적으로 결정하는 것은 삶을 위한 가치이다. 그러나 이것은 모든 오류가 진리라는 것을 말하지 않는다. 다양한 형식의 진리들은 서로 대립된다. 힘에의 의지가 삶을 위한 가치를 증강하며 예술은 삶에의 의지를 구성한다.
예술가는 중요하며 그의 작품과 더불어 이전에 숨겨진 존재가 조명되며 드러난다. 예술가가 된다는 것은 가장 중요한 삶의 방식이며, 니체에게서 "삶의 일반은 우리에게 가장 친숙한 존재이다"(ibid., 69). 존재의 내면적인 본질은 힘에의 의지이다. 우리는 예술가의 작품에서 힘의 의지의 가장 친숙하며 중요한 방식을 만난다. 그것은 존재자체를 조명하며 예술에 대한 명상은 결정적인 우위를 갖는다 (ibid., 70).
그러나 니체는 예술자체를 위해 예술울 옹호하는 심미주의자가 아니다. 오히려 진정한 예술가는 디오니소스적인 생의 원리를 증강하며, 반동적인 힘의 작용들 (자신보다 강한 자를 원한과 움모로 쓰러뜨리는 노예적인 큐피디타스의 불구자)을 넘어서는 고결한 정신의 소유자이다. 이런 점에서 니체는 19세기 부터 출현한 모던니즘 예술에 공명할 수 있다.
힘의 의지와 존재문제
하이데거는 니체의 의지가 영혼의 기능이며 심리적인 것으로 본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영혼은 삶의 경험이나 의식이 아니라 살아있는 존재자들의 원리이다. 그것은 살아있는 것을 살아있게 만든다. 만일 의지가 존재자체를 규정한다면, 몸과 마음도 심리적인 의지에 의존한다. 의지가 힘이고, 힘의 의지라면 니체의 힘에의 의지는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한다.
니체는 쇼펜하우어의 의지개념(물자체)의 우주적 차원과 삶에의 의지가 야기하는 고통의 문제와 금욕적 차원에 저항했다. 니체에게 의지는 힘을 향한 것이지만, 하이데거가 보기에 힘은 의지의 목적으로서 마치 의지의 외부에 있는 것으로 미리 설정될 수 없다. 오히려 의지자체는 자기를 넘어서서 스스로를 힘으로 가져가는 강함이다 (Nietzsche I: 41-2).
힘에의 의지가 효과의 본래적 존재형식이라면, 니체는 열정이나 느낌처럼 감정의 효과에 명쾌한 규정을 주지 못한다. 니체는 종종 감정의 효과와 열정과 느낌을 동일시 한다. 그러나 화는 감정의 효과이지만 싫어함은 감정적 열정이다. 서로 다르다. 서로 다른 두 가지를 느낌으로 부를 수도 있다. 화는 나를 붙들고 나에게 효과를 산출한다.
하이데거에 의하면 니체의 힘의 개념은 효과를 산출하는 세력으로 나타나는데, 이것은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 IX>에서 규정되는 역동적 힘(디나미스)이나 에네르기아 (힘의 드러냄)또는 엔텔레키아(목적에 도달한 완성적인 힘)와 별반 다를 바가 없다. 이 세가지 힘의 형식은 존재에 대한 최고의 규정이다 (Nietzsche I: 64). 니체의 힘의 개념은 형이상학적이며 목적론적인 전통에 서 있지만 존재의 문제와 사유의 관계를 포착하지 못했다.
그러나 니체의 힘의 의지는 아리스토텔레스와는 달리 계보학적이다. 힘에의 의지는 힘의 계보학적 요소이며, 이것은 관계 속에 놓여있는 힘들의 양적차이와 함께 관계 속에서 각각의 힘의 지배 방식을 사회학적인 차원에서 파악한다. 힘은 할 수 있는 것이며 힘에의 의지는 원하는 것이다.
힘의 관계는 지배와 예속의 관계이며, 이러한 힘의 이중적 관계에서 힘은 생성으로 나타나며 힘들의 관계에서 계보학적 즉 우세와 지배와 명령과 복종으로 배열된다. 니체의 힘에의 의지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아니라 쇼펜하우어의 삶에의 의지에 대립하여 파악될 필요가 있다 (들뢰즈 <니체와 철학>, 103).
이런 점에서 니체는 행복과 이성, 미덕과 정의 그리고 연민을 반동적인 힘으로 파악하고 힘에의 의지를 긍정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는 장애로 거절한다. 그러나 이러한 니체의 과장법은 그의 텍스트와 다른 부분과 교차하면서 신중한 독해를 요구한다. 아리스토텔레스ㅡ근대적 윤리형식에서 이러한 도덕이념들이 생과 분리되고 인간의 행동과 태도에 도덕적 억압을 행할때 비판 되는 것이다. 예를들어 공리주의에서 행복과 도덕감정은 니체와는 달리 반동적인 세력이 아니라 영국의 식민지배를 강력하게 옹호해준 생의 지배원리로 작동 되었다.
하이데거의 니체비판은 역사 사회학적이 아니라 존재론적인 기초에 있으며 니체의 힘에의지와 영원회귀에서 하이데거는 사회진화론의 우생학적 태도를 간파하고 파시즘적인 우월주의 투쟁으로 비난했다.
하이데거는 자신의 존재론적 관심에 기초하여 니체의 개념적 한계를 검토했다. 하이데거는 허무주의를 극복하기 위해 존재자체와 존재자들의 관계로 이행한다. 현존재를 구성하는 기본양식은 힘에의 의지가 아니라 존재자체이다. 니체는 근대의 허무주의를 극복한 자가 아니라 자신이 만든 허무주의 형이상학에 빠져버린 자이다.
하이데거에 의하면, 니체는 영원회귀가 현재의 순간에 파루시아 (임재)로 오는데 이러한 현상을 존재자체의 드러남과 연결하여 사유하지 못했다. 니체는 존재를 진리에서부터 본래적으로 드러나는 존재자체의 사건임을 보지 못했다. 니체의 형이상학에서 존재자체와 진리사건의 문제틀은 망각되며 허무주의는 결국 극복되지 못했다 (Nietzsche II: 200).
이러한 극복은 하이데거에 의하면 존재와 시간의 관계에서 언어를 통해 해명되어야 한다. 허무주의에서 무(nihil)는 존재의 역사에서 검토되며, 허무주의는 존재자체를 명명한다. 존재는 무와 더불어 있다. 그러나 니체의 경험에서 존재란 힘에의 의지와 영원회귀의 현존의 방식에서만 가능해진다.
니체에게서 존재는 가치로 해석된다. 이러한 형이상학적 허무주의 이해에서 무는 존재와 더불어 고려되지 않는다. 그러나 하이데거는 존재자체에 무가 있다고 본다. 이것이 허무주의 본질의 역사이다.
하이데거는 묻는다. 니체의 형이상학에서 존재 자체에 무가 있는가? (Nietzsche II: 202). 하이데거에게서 무화는 헤겔의 변증법적 이성처럼 기존의 것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무자체가 존재자들을 무화시켜 죽음에 이르게 한다. 인간의 현존재는 무에 저항하고 살아감으로써, 다른 존재하는 것들을 넘어서서 초월적이된다. 존재 자체안에 존재자들에 대한 무화가 일어난다. “무는 부정의 기원이다” (“What is Metaphysics?.” Heidegger Basic Writngs, 105).
여기서 하이데거는 니체로부터 무의 개념을 자신의 존재개념안에 수용하고, 서구 형이상학 전반에 걸친 해체의 길을 시도한다. 니체의 허무주의는 생성을 존재의 성격즉 동일자의 영원회귀에서 날인하는 것이며, 이것은 니체의 형이상학에서 지고한 능력으로 채워진 힘에의 의지이다 (Nietzsche II: 202).
다시말해 니체의 허무주의는 헤라클레이토스의 변화의 생성 그리고 사라짐에 기초하며, 이러한 생의 허무주의는 영원회귀에서 다시 존재의 시작으로 형이상학화가 된다. 니체는 무의 본질을 존재안에서 사유한 철학자가 아니라, 생리학적으로 힘에의 의지에서 반동적인 힘과 활동적인 힘을 구분하여 생을 무조건 긍정하는 유물론적 경험론(데이비드 흄)과 힘의 쾌락주의에 가깝다.
포스트모던 해체
하이데거에 의하면 (본래적으로 큰) 존재는 세계안에 있는 현존재나 존재자들과 동일시되는 것이 아니라, 무와 더불어 사유된다. 그리고 시인들의 언어는 삶의 심연을 표현한다. 존재와 무가 같이 엮어있다. 이러한 하이데거의 철학은 프랑스 포스트모던의 해체철학의 발판을 제공했다. 그러나 하이데거에 대한 니체의 영향을 무시할 수 없다.
가다머가 주장하는 것처럼, <존재와 시간>에서 이미 하이데거는 니체의 플라톤주의 비판을 수용했고, 하이데거의 무를 포함하는 존재철학은 서구의 형이상학을 전도 시킨다. 이런 점에서 하이데거의 선구자는 후설이나 딜타이가 아니라 니체가 된다 (Gadamer, Truth and Method, 257).
포스트모던 철학에 대해 니체와 하이데거는 물을 것이다. 모든 것이 해석된 거라면 무엇을 해체하는 가? 해체도 하나의 해석이라면 거기에 윤리나 아니면 현존재에 대한 세계내 존재의 틀에서 반성이 있는 가? 해체주의는 이미 여기서 항상 영향을 주는 세계 외부로 나가서 위치하는 유령과 같은 존재의 특권의 자리를 갖는가?
하이데거의 존재론과 니체의 고결한 윤리
하이데거는 <니체> 연구에서 민족주의와 파시즘 정치 결단주의 (칼 슈미트), 생물학적 인종주의, 허무주의의 틀에서 리버럴주의와 볼세비즘을 허무주의 형식으로 비판했다 (Heidegger, Nietzsche I:).
하이데거는 칸트의 형이상학을 존재론적으로 비판했다. 그러나 칸트의 이성은 지성의 선험-경험적 차원과는 달리 무제약적인 보편자 이념에 대한 환상의 논리를 가지고 있다. 이성은 형이상학적으로 세계의 총체(우주론)와 자유의 이념 그리고 신 존재와 영혼불멸에 관여한다.
이것은 칸트의 형이상학의 본질이다. 이성이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서 제일원인 (causa sui) 즉 무제약자를 향해 나가고 추론하는 것은 형이상학의 역설이며 동시에 이율배반적 성격을 말한다.
그러나 하이데거는 칸트의 물자체를 존재자들과 동일시 함으로써, 칸트의 비판철학의 형이상학적 차원을 평가절하했다. 칸트에게 존재자체(물자체)는 시간과 공간의 형식을 통해 감각직관으로 들어올 수 없다. 예를들어 나무를 인식한다는 것은 감각직관에 들어온 나무의 현상이니 표상이 구상적 종합과 순환운동을 통해 지성의 개념에서 파악되는 것을 말한다.
니체는 칸트의 이성철학에 대립하지만 이러한 물자체는 여전히 유효하다. 인간의 인식은 나무의 현상에 대한 해석이나 관점주의에 속하지, 나무자체를 인식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힘에의 의지는 물자체를 대신한다. 칸트의 이율배반의 형이상학은 힘에의 의지와 영원회귀를 통해 해체된다.
하이데거는 존재론의 문제틀을 기초로 시간성과 세계내존재인 현존재를 부각시킴으로써 데카르트의 주체철학을 형이상학으로 비판하고 존재의 의미와 진리를 실존론적으로 규명하려고 했다. 하이데거가 보기에 니체는 형이상학의 전통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왜 니체는 그토록 서구 형이상학의 전통을 데카당스 내지 허무주의로 공격했는데 하이데거에 의해 형이상학자로 평가절하 되는가?
니체의 형이상학: 생성과 존재
하이데거의 니체해석에서 보면 동일자의 영원회귀와 힘에의 의지는 여전히 데카르트의 주체성의 전통에 사로잡혀있다. 힘에의 의지는 모든 존재를 힘에의 의지로 간주한다. 니체는 하이데거처럼 모든 존재자들의 존재가 아니라 모든 존재를 생성으로 보았다. 이러한 생성은 의지의 활동성을 특징지으며 (헤라클레이토스), 그 본질은 힘에의 의지다. 니체는 힘에의 의지를 기초로 영원회귀이론을 돌출하고 모든 가치들을 검토하고 전복하려고 했다. 힘에의 의지, 영원회귀, 모든 가치들의 전도ㅡ이것은 니체철학의 중심에 속한다. 니체는 망치를 든 철학자이다.
니체의 영원회귀는 허무주의의 극단적 형태이다. 이외의 모든 다른 허무주의 형식은 불완전하다. 영원회귀만이 허무주의를 완전하고 전적으로 만든다. 영원회귀는 적극적 생성을 낳으며. 적극적 생성만이 존재를 낳는다. 영원회귀는 생성의 존재이며 생성을 재생산한다 (들뢰즈 <니체와 철학>, 136).
그러나 하이데거는 니체가 자신의 주제를 일관성있게 전개하기 보다는 생성을 존재의 성격으로 각인 했다고 말한다. 진화과정의 반복(recapitualtion)은 동일자의 영원회귀이며 지고한 힘에의 의지이다. 결국 생성은 존재로 돌아오며, 존재로 귀착된다. 생성은 존재에 가장 근사한 세계가 된다 (Nietzsche I: 19).
하이데거의 평가에 의하면, 존재와 힘에의 의지를 영원회귀로 사유하는 것은 존재를 시간으로 사유하는 것이다.니체는 존재와 시간의 문제를 검토하지 못했다. 하이데거는 그의 <존재와 시간>의 문제틀에서 힘에의 의지와 영원회귀가 형이상학에 불과하다고 비판한다(ibid., 21).
힘에의 의지가 생성이라면 동일자의 영원회귀는 존재이며, 여기서 생성은 멈추고 정지한다. 이러한 대립에서 니체의 형이상학의 성격이 출현한다. 그러나 하이데거는 니체의 영원회귀가 우주적 생의 원리에 기초하며 디오니소스적 상징에서 본 것을 간과했다.
영원회귀는 출생성에 대한 긍정
<우상의 황혼>의 마지막 장 4절에서 니체는 괴테가 그리스의 영혼과 문화를 이해하지 못했다고 비판했다. 니체에 의하면 그리스의 충동본능과 근본적 사실은 디오니소스의 신비 즉 생의 의지에서 재현되며, 이것은 바로 생의 영원회귀를 의미한다. 미래가 과거의 삶에서 출현하며, 죽음을 넘어서는 생에 대한 승리에 찬 긍정이 섹슈알리티의 신비에서 드러난다.
고대 아테네에서 행해진 디오니시아의 축제는 영원한 생의 상징주의에 연결되며, 출산의 여인은 고통을 거룩하게 한다. 생의 출생의 영원한 기쁨이 존재하기위해, 다시말해 삶의 의지가 영원히 확인되기 위해 출산의 고통 또한 영원히 존재한다.
여기서 니체는 토라의 제 1계명 ㅡ생육하고 번성하라ㅡ에 접근하고 섹슈알리티와 생에 대한 기독교의 근본적 오예적 원한을 비판한다. 기독교적 노예의 원한은 자신보다 강한 타자를 쓰러뜨리기 위해 반동적인 힘 즉 원한과 부정성을 말하며 이들은 정신적으로 불구자에 속한다.
니체에게 인간은 이런 태도를 넘어서려는 ㅡ심연의에 놓여있는ㅡ줄과 같으며 동물과 초인 사이에 묶여있다. 니체의 초인의 윤리는 디오니소스적 생의 긍정에 관련된다. 니체는 출생성의 신비에 주목하며 이것을 자신의 생철학의 틀로 설정했다. 이것은 오히려 어거스틴에게서 출생성과 새로운 자유를 돌출한 한나 아렌트의 출생성의 정치철학에 가깝다.
이런 점에서 니체의 영원회귀는 윤리적 가치를 긍정한다. 나의 의지에게 영원회귀는 내가 이것을 무한히 하길 원하는 지 반성하면서 한다. 이것은 나의 욕구를 창조적으로 만든다. 짜라투스라의 윤리는 영원회귀에 기초하며, 특히 서문의 6절에서 감동적으로 나타난다.
광대놀이하다가 뒤따라오는 동료의 경쟁과 욕설로 인해 떨어져 죽은 광대에게 짜라투스라는 그의 직업의 소명을 소중히 여긴다. 사경을 해매는 광대는 오랫동안 악마의 괴롭힘을 껵으며 지옥에 대한 공포를 가지고 있었다. 짜르투스트라는 그를 치유를 한다. 육체이전이 영혼이 먼저 죽는다. 악마와 지옥은 존재하지 않는다.
초인의 삶의 방식은 패시미즘 (쇼펜하우어)나 수동적 허무주의 (유럽의 불교)를 완전한 허무주의로 만든다. 그 이유는 선악에 붙들려있는 노예도덕을 넘어어서 고결한 인간의 도덕을 창츌하려고 한다. 이것은 모든 가치들의 전도이며 동시에 새로운 윤리의 가치를 창조하려고 한다다.
더우기 니체의 동일자의 영원회귀는 플라톤의 영혼주기설에 가깝다. 동일자는 차이와 다름으로 생명의 세계에서 순환한다. 이러한 생명의 출현을 생태학적으로 가능하게 하는 것은 플라톤에게서 불멸하는 영혼의 선택이지만 니체에게는 힘에의 의지다 (들뢰즈, <니체와 철학>, 326).
하이데거: 존재와 죽음
하이데거의 허무주의 극복은 존재/무의 상호관계에 대한 반성에서 나타나며 헤겔의 존재와 무의 변증법을 수용한다. 하이데거는 <존재와 시간> (§60)에서 불안을 다루면서, 인간은 세계로 던져져있으며 삶과 죽음과 무에 직면한다고 말한다. 형이상학은 다양한 존재자들을 해석하지만 존재자체와 무의 본질을 망각한다. 간략히 말하면, 형이상학은 존재자체 (또는 물자체)를 사유하거나 인식하지 못한다. 오히려 그것은 존재자체의 빛에서 현상계의 존재자들을 인식한다. 이것은 형이상학의 탐구에 속한다 (Nietzsche II: 207).
하이데거는 현존재의 관점에서 형이상학에 대한 비판적인 질문을 하고, 형이상학의 역사를 허무주의와 동일시했다. 형이상학은 인간의 이성을 중심으로 세계와 삶을 해석하는 철학이다. 니체처럼 하이데거는 일체의 이성중심주의나 계몽주의를 배격했다. 존재들의 총체성을 부정하는 무는 불안이라는 근본적인 분위기에서 그리고 이것을 통해 드러난다. 무의 행동은 현존재를 불안을 통해 억압하고 무화시키는 데, 이것이 무의 본질이다.
그러나 하이데거는 기초존재론을 니체의 관점주의 즉 힘에의 의지(주관주의)나 영원회귀 (객관성)로 해소하지 않았다. 하이데거는 헤겔을 통해 존재계시로 나갔고 존재의 드러남은 진리로서 가까이 있지만 여전히 멀리있다!
그러나 하이데거와는 달리 니체는 문화분석 심리학자이며 허버트 스펜서의 사회진화론이나 인종주의와는 거리가 있다. 니체의 근대성의 비판은 인간을 평준화하고 왜소하게 만드는 서구문명과 형이상학에 근거한다. 니체는 하이데거의 죽음을 향한 현존재가 아니라 영원한 생의 긍정을 부각시킨다.
이런 점에서 언어가 아니라 생이 존재의 집이며, 니체는 언어의 사회적 기능을 통해 도덕의 문제를 계보학적으로 분석한 탁월한 사회비판가였다. 이것은 언어가 존재의 집으로 보는 하이데거의 존재신비주의와는 달리 사살주의적 사회비판적 성격을 갖는다.
이러한 통찰은 미셀 푸코에게 지식과 권력의 연계를 담론 분석에서 해명하는 통찰을 제공했다. 푸코는 역사와 사회에서 자배계급에 의해 밀려나가고 예속된 자들의 삶과 지식을 정상화시키려고 한다. 권력관계에 기초한 푸코의 계보학은 니체의 귀족도덕과 노예도덕의 이분법을 넘어서서 일체의 지배계급에 대한 저항의 윤리 (파레시아)를 담고있다. 푸코는 벤야민에 가깝게 서 있다.
그러나 니체는 디오니소스의 생의 원리를 초인의 윤리와 결합하며, 자신보다 겅한 자를 원한과 부정으로 쓰러뜨리는 지배계급의 탐욕과 정신적 불구자들을 치유하려는 고결한 윤리를 구상한다. 인간은 자기극복의 존재이며 이것을 위해 인간은 하강하는 존재 다시말해 반동적인 신념들 (원한, 부정성, 큐피디타스)을 파괴하는 존재이다. 니체의 하강의 존재는 노예적 지배계급의 큐피다타스와 민주주의 문화가 만들어낸 왜소한 존재를 역겨워한다. 이들은 구원되어야할 존재이다.
나체는 하이데거의 독일중심주의와는 달리 오히려 반 독일적이며, 비스마르크를 비판했으며 프랑스 문학과 예술에 친화력을 갖는다. 그러나 니체의 도덕의 이분화는 파시즘의 귀족지배를 옹호하는 것같은 많은 오해를 불러일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