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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고학적 해명: 하이데거와 니체

content6462 2025. 12. 31. 09:51

하이데거: 존재론의 문제틀

 

하이데거는 <존재와 시간>에서 니체의 <삶을 위한 역사의 효용성과 남용>에서 나타나는 세 가지 분류의 역사ㅡ위대한 기념비적 역사, 과거보존의 골동품의 역사, 비판의 역사ㅡ를 존재론적인 시간성에 통합하고 해석학적으로 전개했다.

 

그러나 하이데거는 40년대 이후부터 니체에 집중적인 연구를 했고, 1936년부터 1940년 니체강의를 개설했다. 하이데거의 <니체 I. II>는 1961년 출간되었다. 1권에서 하이데거는 이체의 철학을 소개하고 해헉하지만, 2권에서 하이데거의 니체비판은 상당히 거칠다 (Mehta, The Philosophy of Martin Heidegger).

 

<니체 1> 연구에서 하이데거는 힘에의 의지를 지배와 억압의 힘으로 해석하고 이것을 니체의 원죄로 비판했다. 어쩌면 이것은 하이데거 자신이 나치부역에 대한 죄책감에 연결될 수도 있다. 그러나 니체는 거꾸로 파시줌에 근접하는 철학자로 오독된다. 하이데거는 민족주의와 파시즘 정치 결단주의 (칼 슈미트), 생물학적 인종주의, 허무주의의 틀에서 리버럴주의와 볼세비즘을 허무주의 형식을 간주했다

 

하이데거는 칸트의 형이상학을 존재론적으로 비판했다. 그러나 칸트의 이성은 지성의 선험-경험적 차원과는 달리 무제약적인 보편자 이념에 대한 환상의 논리를 가지고 있다. 이성은 형이상학적으로 세계의 총체(우주론)와 자유의 이념 그리고 신 존재와 영혼불멸에 관여한다. 이것은 칸트의 형이상학의 본질이다. 이성이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서 제일원인 (causa sui) 즉 무제약자를 향해 나가고 추론하는 것은 형이상학의 역설이며 동시에 이율배반적 성격을 말한다.

 

그러나 하이데거는 칸트의 물자체를 존재자들과 동일시 함으로써, 칸트의 비판철학의 형이상학적 차원을 평가절하했다. 칸트에게 존재자체(물자체)는 시간과 공간의 형식을 통해 감각직관으로 들어올 수 없다. 예를들어 나무를 인식한다는 것은 감각지관에 들어온 나무의 현상이니 표상이 구상적 종합과 순환운동을 통해 지성의 개념에서 파악되는 것을 말한다.

 

니체는 칸트의 이성철학에 대립하지만 이러한 물자체는 여전히 유효하다. 인간의 인식은 나무의 현상에 대한 해석이나 관점주의에 속하지, 나무자체를 인식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힘에의 의지는 물자체를 대신한다. 칸트의 이율배반의 형이상학은 힘에의 의지와 영원회귀를 통해 해체된다.

 

하이데거는 존재론의 문제틀을 기초로 시간성과 세계내존재인 현존재를 부각시킴으로써 데카르트의 주체철학을 형이상학으로 비판하고 존재의 의미와 진리를 실존론적 해석학으로 규명하려고 했다. 하이데거가 보기에 니체는 형이상학의 전통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왜 니체는 그토록 서구 형이상학의 전통을 데카당스 내지 허무주의로 공격했는데, 하이데거에 의해 형이상학자로 평가절하 되는가?

 

니체의 형이상학: 생성과 존재

 

하이데거의 니체해석에서 동일자의 영원회귀와 힘에의 의지는 여전히 데카르트의 주체성의 전통에 사로잡혀있다. 힘에의 의지는 모든 존재를 힘에의 의지로 간주한다. 니체는 하이데거처럼 모든 존재자들의 존재가 아니라 모든 존재를 생성으로 보았다.

 

이러한 생성은 의지의 활동성을 특징지으며 (헤라클레이토스), 그 본질은 힘에의 의지다. 니체는 힘에의 의지를 기초로 영원회귀이론을 돌출하고 모든 가치들을 검토하고 전복하려고 했다. 힘에의 의지, 영원회귀, 모든 가치들의 전도ㅡ이것은 니체철학의 중심에 속한다. 니체는 망치를 든 철학자이다.

 

니체의 영원회귀는 허무주의의 극단적 형태이다. 이외의 모든 다른 허무주의 형식은 불완전하다. 영원회귀만이 허무주의를 완전하고 전적으로 만들고 극복한다. 영원회귀는 적극적 생성을 낳으며. 적극적 생성만이 존재를 낳는다. 영원회귀는 생성의 존재이며 생성을 재생산한다 (들뢰즈 <니체와 철학>, 136).

 

그러나 하이데거는 니체가 자신의 주제를 일관성있게 전개하기 보다는 생성을 존재의 성격으로 각인 했다고 말한다. 진화과정의 반복과 총괄(recapitualtion)은 동일자의 영원회귀이며 지고한 힘에의 의지이다. 결국 생성은 존재로 돌아오며, 존재로 귀착된다. 생성은 존재에 가장 근접한 세계이다 (Nietzsche I: 19).

 

하이데거의 평가에 의하면, 존재와 힘에의 의지를 영원회귀로 사유하는 것은 존재를 시간으로 사유하는 것이다. 니체는 존재와 시간의 문제를 검토하지 못했다. 하이데거는 그의 <존재와 시간>의 문제틀에서 힘에의 의지와 영원회귀가 형이상학의 내용을 갖는다고 비판한다 (ibid., 21).

 

여기서 하이데거의 니체에 대한 양가적 태도가 나타난다. <존재와 시간>에서 하이데거는 니체의 삶과 역사의 관계를 실존론적-해석학으로 통합했지만, 이제 <니체>연구에서 하이데거는 니체의 힘에의자와 영원회귀를 허무주의를 초래하는 형이상학으로 바판한다. 힘에의 의지가 생성이라면 동일자의 영원회귀는 존재이며, 여기서 생성은 멈추고 정지한다. 이러한 대립에서 니체의 형이상학의 성격이 출현한다.

 

니체: 생의 영원회귀

 

하이데거는 니체의 영원회귀가 우주적 생의 원리에 기초하며 디오니소스적 상징에서 본 것을 간과했다. <우상의 황혼>의 마지막 장 4절에서 니체는 괴테가 그리스의 영혼과 문화를 이해하지 못했다고 비판했다.

 

니체에 의하면 그리스의 충동본능과 근본적 사실은 디오니소스의 신비 즉 생의 의지에서 재현되며, 이것은 바로 생의 영원회귀를 의미한다. 미래가 과거의 삶에서 출현하며, 죽음을 넘어서는 생에 대한 승리에 찬 긍정이 섹슈알리티의 신비에서 드러난다.

 

고대 아테네에서 행해진 디오니시아 축제는 영원한 생의 상징주의에 연결되며, 출산의 여인은 고통을 거룩하게 한다. 생의 출생의 영원한 기쁨이 존재하기위해, 다시말해 삶의 의지가 영원히 확인되기 위해 출산의 고통 또한 영원히 존재한다.

 

여기서 니체는 토라의 제 1계명 ㅡ생육하고 번성하라ㅡ에 접근하고 섹슈알리티와 생에 대한 기독교의 근본적인 무관심을 비판했다. 니체의 영원회귀는 윤리적 가치를 긍정한다. 나의 의지에게 영원회귀는 내가 이것을 무한히 하길 원하는지 반성하면서 한다면, 나의 욕구를 창조적으로 만든다.

 

불완전한 허무주의 (기독교나 쇼펜하우어)나 수동적 허무주의 (유럽의 불교)를 완전한 허무주의로 만드는 것은 모든 가치들의 전도이자 동시에 새로운 윤리의 가치를 창조한다. 더우기 니체의 동일자의 영원회귀는 플라톤의 영혼주기설에 가깝다.

 

동일자는 차이와 다름으로 생명의 세계에서 순환한다. 이러한 생명의 출현을 생태학적으로 가능하게 하는 것은 플라톤에게서 불멸하는 영혼의 선택이지만 니체에게는 힘에의 의지다 (들뢰즈, <니체와 철학>, 326).

 

하이데거: 존재와 무

 

하이데거의 허무주의 극복은 존재/무의 상호관계에 대한 반성에서 나타나며 헤겔의 존재와 무의 변증법을 수용한다. 하이데거는 <존재와 시간> (§60)에서 불안을 다루면서, 인간은 세계로 던져지며 삶과 죽음과 무에 직면한다고 말한다.

 

형이상학은 다양한 존재자들을 해석하지만 존재자체와 무의 본질을 망각한다. 간략히 말하면, 형이상학은 존재자체 (또는 물자체)를 사유하거나 인식하지 못하며 존재자체의 빛에서 현상계의 존재자들을 인식한다. 이것은 형이상학의 탐구에 속한다 (Nietzsche II: 207).

 

하이데거는 현존재의 관점에서 형이상학에 대한 비판적인 질문을 하고, 형이상학의 역사를 허무주의로 동일시했다. 형이상학은 인간의 이성을 중심으로 세계와 삶을 해석하는 철학이다. 니체처럼 하이데거는 일체의 이성중심주의나 계몽주의를 배격했다.

 

존재들의 총체성을 부정하는 무는 불안이라는 근본적인 분위기에서 그리고 이것을 통해 드러난다. 무의 행동은 현존재를 불안을 통해 억압하고 무화시키는 데, 이것이 무의 본질이다.

 

그러나 하이데거는 기초존재론을 니체의 관점주의 즉 힘에의 의지(주관주의)나 영원회귀 (객관성)로 해소하지 않는다. 하이데거는 헤겔을 통해 존재계시로 나갔고 존재의 드러남은 진리로서 가까이 있지만 여전히 멀리있다!

 

그러나 하이데거와는 달리 니체는 문화분석의 심리학자일 수 있고, 니체는 언어의 사회적 기능을 통해 도덕의 문제를 계보학적으로 분석한 사회비판가였다. 이러한 통찰은 미셀 푸코에게 지식과 권력의 연계를 담론 분석에 해명하는 통찰을 제공했다. 니체는 하이데거의 독일 중심주의와는 달리 오히려 반 독일적이며, 비스마르크를 비판했으며 프랑스 문학과 예술에 친화력을 갖는다.

 

니체와 허무주의 문제

 

니체는 하이데거처럼 독일 민족주의나 파시스트 지도자의 위대한 정치 결단주의가 아니라 오히려 그리스의 고결한 귀족도덕이나 프랑스 혁명에서 미라보 백작과 같은 정치가를 옹호했다 ( < 도덕의 계보>, 김태현 옮김, 46). 미라보는 자코뱅 클럽 회원이었지만 영국과 같은 법적 합리성에 의해 다스려스는 사법적 군주제를 옹호한 정치가였다.

 

니체는 삶을 긍정함으로써 서구의 형이상학적 이성중심의 허무주의 (계몽주의와 근대성)와 이에 결부된 금욕주의(쇼펜하우어) 그리고 기독교적 플라톤주의의 모든 가치를 전도하려고 했다. 니체의 힘에의지는 몸의 중요성에 주목하며 몸은 지배하는 힘과 지배받는 힘과의 관계로 정의된다. 힘의 모든 관계(화학적, 생물학적,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등)가 인간의 신체의 사회학적 성격을 특징 짖는다.

 

그러나 하이데거가 보기에 모든 존재들의 기본구조가 힘에의 의지라면, 존재는 동일자의 영원회귀이다. 이러한 니체의 형이상학적 태도는 여전히 유럽의 허무주의를 극복하지 못한다. 니체가 보는 허무주의는 세계관이 아니라 서구의 역사에서 발생한 기본적인 성격이다. 여기서 최상의 가치들은 스스로 퇴락한다. 기독교적 기준과 가치는 그레코-로만의 전통 이후 퇴락했고, 또한 이데아론과 도덕성은 플라톤 이후 철학에서 구속력을 상실했다.

 

그러나 허무주의는 기독교 이전 세계에서부터 시작했다. 이것은 역사적 운동의 기본양식이며, 심지어 창조적 힘을 갖는다. 부패나 생리학적 변질은 허무주의 원인이 아니라 해로운 귀결이다. 이러한 해로운 부작용을 완하시킨다고 해서 허무주의가 극복되지 않는다 (Nietzsche I: 25-6).

 

하이데거에 의하면 허무주의 극복은 이전의 타당한 가치들을 전복하는 카운터 운동에서 시작하며, 인간들을 새로운 가치와 태도로 인도해야한다. 이것은 한 순간에 일어나지 않는다. 진리에 대한 새로운 탐구와 실험적 시도를 해야한다 (ibid., 29).

 

이것을 이미 니체의 <짜라투스트라>에서 끊임없는 자기극복의 존재와 창조적 가치와 의미부여로 나타난다. 니체는 근대성이 만들어낸 마지막 인간성의 왜소함과 평준화를 넘어시기위해 초인의 휴머니즘으로 나간다.

 

니체의 실험은 예술에서 삶의 촉진제를 보는 것이며 삶을 자극하고 증강하는 것이다. 더 나아가 니체에게 진리는 일종의 오류이며. 이러한 진리의 오류없이 삶을 살 수가 없다. 진리를 궁극적으로 결정하는 것은 삶을 위한 가치이다. 그러나 이것은 모든 오류가 진리라는 것을 말하지 않는다. 다양한 형식의 진리들은 서로 대립된다. 힘에의 의지가 삶을 위한 가치를 증강하며 예술은 삶에의 의지를 구성한다.

 

예술가는 가장 중요하며 그의 작품과 더불어 이전에 숨겨진 존재가 조명하며 드러난다. 예술가는 된다는 것은 가장 중요한 삶의 방식이며 니체에게서 "삶의 일반은 우리에게 가장 친숙한 존재이다"(ibid., 69). 존재의 내면적인 본질은 힘에의 의지이다. 우리는 예술가의 작품에서 힘의 의지의 가장 친숙하며 중요한 방식을 만난다. 그것은 존재자체를 조명하며 예술에 대한 명상은 결정적인 우위를 갖는다 (ibid., 70).

 

힘의 의지와 존재문제

 

하이데거는 니체의 의지가 영혼의 기능이며 심리적인 것으로 본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영혼은 삶의 경험이나 의식이 아니라 살아있는 존재자들의 원리이다. 그것은 살아있는 것을 살아있게 만든다. 만일 의지가 존재자체를 규정한다면, 몸과 마음도 심리적인 의지에 의존한다. 의지가 힘이고, 힘의 의지라면 니체의 힘에의 의지는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한다.

 

니체는 쇼펜하우어의 의지개념(물자체)의 우주적 차원과 삶에의 의지가 야기하는 고통의 문제와 금욕적 차원에 저항했다. 니체에게 의지는 힘을 향한 것이지만, 하이데거가 보기에 힘은 의지의 목적으로서 마치 의지의 외부에 있는 것으로 미리 설정될 수 없다. 오히려 의지자체는 자기를 넘어서서 스스로를 힘으로 가져가는 강함이다 (Nietzsche I: 41-2).

 

힘에의 의지가 효과의 본래적 존재형식이라면, 니체는 열정이나 느낌처럼 감정의 효과에 명쾌한 규정을 주지 못한다. 니체는 종종 감정의 효과와 열정과 느낌을 동일시 한다. 그러나 화는 감정의 효과이지만 싫어함은 감정적 열정이다. 서로 다르다. 서로 다른 두 가지를 느낌으로 부를 수도 있다. 화는 나를 붙들고 나에게 효과를 산출한다.

 

하이데거에 의하면 니체의 힘의 개념은 효과를 산출하는 세력으로 나타나는데 이것은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 IX>에서 규정되는 역동적 힘 또는 능력(디나미스)이나 에네르기아 (힘의 드러냄; 활동성)또는 엔텔레키아(목적에 도달한 완성적인 힘)와 별반 다를바가 없다. 이 세가지 힘의 형식은 존재에 대한 최고의 규정이다 (Nietzsche I: 64).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디나미스는 일차적인 의미에서 질료에서 나타나는 운동을 일으키는 힘 또는 능력 즉 변화의 원리이다 (potency). 이차적으로 능력 (가능태 potentiality)으로 나타난다. 라틴어를 읽을 수 있는 능력은 실제로 라틴어 문장을 읽는 능력/활동(에네르기아)는 구분된다. 이러한 구분에서 에네르기아는 실현과 완성에 관련되는 확대적인 의미를 갖는다. 활동이 능력에 비해 우선적이다. 활동의 차원에서 볼때 적용인 즉 활동자인 사람이 사람을 낳는다.

 

아리스토텔레스적 관점에서 니체의 힘의 개념은 형이상학적이며 목적론적인 전통에 서 있지만, 하이데거가 보기에 니체는 존재의 문제와 사유의 관계를 포착하지 못했다. 그러나 니체의 힘의 의지는 아리스토텔레스와는 달리 계보학적이다. 힘에의 의지는 힘의 계보학적 요소이며, 이것은 관계 속에 놓여있는 힘들의 양적차이와 함께 관계 속에서 각각의 힘의 지배 방식을 사회학적인 차원에서 파악한다.

 

힘은 할 수 있는 것이며 힘에의 의지는 원하는 것이다. 힘의 관계는 지배와 예속의 관계이며, 이러한 힘의 이중적 관계에서 힘은 생성으로 나타나며 힘들의 관계에서 계보학적 즉 우세와 지배와 명령과 복종으로 배열된다. 니체의 힘에의 의지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아니라 쇼펜하우어의 삶에의 의지에 대립하여 파악될 필요가있다 (들뢰즈 <니체와 철학>, 103).

 

물론 아리스토텔레스의 힘의 개념은 사원인의 상호작용에서 질료형상의 복합체에서 출현하는 힘의 변화의 원리와 능력(디나미스)과 활동 (에네르기아) 그리고 현실태(엔텔레키아)를 구분하며 파악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니체의 힘에의 의지와 계보학에 인식론적ㅡ윤리적 차원을 보충할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은 니체의 도덕의 계보학과 귀족과 노예도덕의 애매함을 구체적으로 검토하고 해명해줄 수 있다. 니체의 귀족주의나 영웅주의 또는 반 민주주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경제비판과 공공선을 기초로 참여 민주주의 방향으로 비판적으로 갱신될 수 있다. 완성을 향한 가능태를 고려할때 분배정의는 사회 민주적인 차원을 갖는다 (마르타 누스바움).

 

어째튼 하이데거는 자신의 존재론적 관심에 기초하여 니체의 개념적 한계를 감토한다. 하이데거는 허무주의를 극복하기 위해 존재자체와 존재자들의 관계로 이행한다. 현존재를 구성하는 기본양식은 힘에의 의지가 아니라 존재자체이다.

 

니체는 영원회귀가 현재의 순간에 파루시아 (임재)로 오는데 이러한 현상을 존재자체의 드러남과 연결하여 사유하지 못했다. 니체는 존재를 진리에서부터 본래적으로 드러나는 존재자체의 사건임을 보지 못했다. 니체의 형이상학에서 존재자체와 진리사건의 문제틀은 망각되며 허무주의는 결국 극복되지 못했다 (Nietzsche II: 200).

 

그러나 들뢰즈는 하이데거의 존재론적 비판에서 니체의 비판적인 계보학이 실종된다고 말한다. <차이와 반복>에서 디오니소스는 영원회귀의 반복에서 특이성으로 모든 도덕법과 헤겔의 변증법에 대항하면서 반복적으로 나타난다. 마르크스에게서 반복은 운동이며, 역사는 무대이며 이러한 역사의 무대에서 반복은 희극과 비극과 더불어 나타난다.

 

이것은 마르크스의 프랑스 혁명에대한 분석에서 나타나는데, 오히려 마르크스는 들뢰즈의 형이상학과는 달리 헤겔의 역사 변증법을 패러디한다. 인간은 주어진 역사적 조건과 사회적 배경에서 역사의 무대를 만들어간다. 물질의 이해관계와 권력지배방식에서 인간은 엮어지며 역사의 무대는 희극으로 또는 비극으로 아니먄 반동과 부메랑을 거치면서 전개된다.

 

들뢰즈의 니체해석에서 부각되는 것은 특이성이 보편화되는 것이며 이것은 개념적 명료함이 없는 예술작품과 같다. 반복은 생의 도약처럼 기적의 사건으로 다시말해 힘의 이름으로 나타나며, 법을 위반하는 특이성을 표현한다. 이것은 존재일반의 반복이나 선악에 기초한 도덕법의 반복과는 달리 생을 긍정하고 법을 위반하는 특이성의 힌에 기초한다. 하이데거의 존재론적 규명이 존재 일반에 주목한다면, 들뢰즈에 의하면 영원회귀는 특이성과 힘에 의지에 기초해 생을 긍정하는 법의 위반과 저항의 사건으로 해석된다. 들뢰즈는 영원회귀를 특이성의 힘의 반복으로서 사건의 계보학으로 해석한다.

 

그러나 형이상학의 극복은 하이데거에 의하면 존재와 시간의 관계에서 언어를 통해 해명되어야 한다. 허무주의에서 무(nihil)는 존재의 역사에서 검토되며, 허무주의는 존재자체를 명명한다. 존재는 무와 더불어 있다. 그러나 니체의 경험에서 존재란 힘에의 의지와 영원회귀의 현존의 방식에서만 가능해진다.

 

니체에게서 존재는 가치로 해석된다. 이러한 형이상학적 허무주의 이해에서 무는 존재와 더불어 고려되지 않는다. 존재자체에 무가 있다. 이것이 허무주의 본질의 역사이다. 하이데거는 묻는다. 니체의 형이상학에서 존재 자체에 무가 있는가? (Nietzsche II: 202).

 

하이데거에게서 무화는 헤겔의 변증법적 이성처럼 기존의 것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무자체가 존재자들을 무화시켜 죽음에 이르게 한다. 인간의 현존재는 무에 저항하고 살아감으로써, 다른 존재하는 것들을 넘어서서 초월적이된다. 존재 자체안에 존재자들에 대한 무화가 일어난다. “무는 부정의 기원이다” (“What is Metaphysics?.” Heidegger Basic Writngs, 105).

 

여기서 하이데거는 니체로부터 무의 개념을 자신의 존재개념안에 수용하고, 서구 형이상학 전반에 걸친 해체의 길을 시도한다. 니체의 허무주의는 생성을 존재의 성격즉 동일자의 영원회귀에서 날인하는 것이며, 이것은 니체의 형이상학에서 지고한 능력으로 채워진 힘에의 의지이다 (Nietzsche II: 202).

 

그러나 하이데거에 의하면 (본래적으로 큰) 존재는 세계안에 있는 현존재나 존재자들과 동일시되는 것이 아니라, 무와 더불어 사유된다. 그리고 시인들의 언어는 삶의 심연을 표현한다. 존재와 무가 같이 엮어있다. 이러한 하이데거의 철학은 프랑스 포스트모던의 해체철학의 발판을 제공한다.

 

가다머가 주장하는 것처럼, <존재와 시간>에서 이미 하이데거는 니체의 플라톤주의 비판을 수용했고, 하이데거의 무를 포함하는 존재철학은 서구의 형이상학을 전도 시킨다. 이런 점에서 하이데거의 선구자는 후설이나 딜타이가 아니라 니체가 된다 (Gadamer, Truth and Method, 257).

 

현존재와 무: 헤겔

 

현존재는 무나 죽음에서 피할 수가 없다. 형이상학이 존재자들을 넘어서 있는 것들에 대한 탐구라면, 무에 관한 물음은 형이상학적 탐구에서 일어날 수가 없다. 전통적인 형이상학에서는 무에서 무가 존재한다. 그러나 기독교 전통에선 무로부터 피조된 존재가 나온다. 그러나 하이데거에게서 무는 존재자체에 속한 것이다. 하이데거는 라이프니츠 테제를 반박한다: "왜 무가 아니라 존재가 있는가?"

 

이러한 존재질문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형이상학에서 시작된다. 이것은 형이상학의 본질에 속한다. 이런 점에서 형이상학은 최고의 존재를 전제하는 신학이며 스콜라주의에서 나타난다. 여기서 신은 인간 존재에 상응하여 규정되며 형이상학의 존재신학(ontotheology)이 된다.

 

아퀴나스와 존재신학

 

토마스 아퀴나스의 주석에 의하면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은 지성의 질서에 따라 원인을 통해 해명된다. 원인들에 대한 지식은 최고의 지성의 단계에서 간주된다. 모든 것들의 제일원인을 고려한는 점에서 형이상학은 제일철학이 되며 거룩한 신성한 학문 즉 신학이 된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철학은 존재를 존재를 통해 탐구하는학문이며 속성들은 존재의 본질에 속한다.

 

아퀴나스에게서 신의 존재 (esse)는 모든 존재자들의 작용원리가 된다. 여기서 유비론적 술어가 개념화되는데 첫 번째는 개념에 의해서만 표현된다. 건강개념은 사람이나 동물 또는 음식 등 다양한 방식으로 원인과 결과로 표현된다. 두번째는 개념이 아니라 실제존재에 의해서인데, 많은 것들은 공동의 속성의 개념안에서 동일하게 표현된다. Body 개념은 부패하든 부패하지 않던 모든 bodies에 적용된다.

 

세번째는 개념과 실제존재를 술어적으로 표현하는데 이것은 존재와 개념에 동등하지 않은 경우에 나타난다. 이것은 실체와 우연성에서 완전성의 차이에 따라 표현된다. 예를들어 진리와 선함 또는 아름다움 등은 유비론적으로 하나님과 피조물에 비슷하게 그러나 다르게 사용된다. 이것은 속성의 유비를 말한다. 그러나 비례의 유비는 하나님과 피조물의 유사점에 기초하는데 피조물의 신적인 선함에 참여를 의미한다. 살아있는 모든 존재는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에 참여한다. 이성적 존재는 거의 하나님에 가깝게 존재와 삶과 지식을 소유한다. 이러한 유사점은 비례성을 말하며, 하나님과 불 사이에 유사점이 있다. 불이 몸을 태우듯이 하나님은 악을 태운다. 아퀴나스는 하나님을 유비론적으로 표현하며 속성과 비례의 유비는 그의 존재신학을 특징 짖는다 (An Aquinas Reader, 90-1).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는 비례의 유비를 나무가 침대에 관련되듯이 청동은 청동상에 관련된다고 말한다 (A:B =C:D). 신과 인간존재의 유사점을 하나님의 형상론에 기초하지 않는다. 신에 대한 참여는 지성의 관조를 통해서 나타나며 속성의 유비를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실체를 표현할때 범주를 통해 속성이나 우연성을 술어적으로 말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관심은 X를 하나로 만드는 것은 X의 본질이며 하나가 아니다. 실체를 하나의 실체로 드러나게 하는 것은 본질이며 존재론적 의미를 갖는다. 일차적 의미에서 본질을 갖는 것은 밤주들 가운데 실체 밖에 없다. 본질은 형상에 관련되며 또한 목적론적 현실태로 출현한다. 존대론적 형상과 목적론적 완성은 본질을 이중적으로 규정한다. 진리는 이러한 과정에서 본질사건으로 알레테이아로 즉 존재사건으로 현상한다. X의 본질은 X를 있는 것으로 즉 존재자로 만드는 측면을 말한다. 현존재는 본질이 되며 술어적으로 다양한 범주를 통해 존재하는 속성들로 표현된다.

 

일차적 실체는 형상과 질료로 구성되는 개별자 (개별형상; 개인 소크라테스)이며, 아리스토텔레스의 힘의 개념은 능력과 활동과 선한 삶의 완성을 위해 스피노자의 코나투스에 공공명할 수있다. 스피노자의 신(실체)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제일원인일 수가 있다.

 

라리스토의 부동의 동자는 제일원인으로서 살아있고 영원하고 선하지만 인간을 창조하지 않았고 또한 세계도 창조하지 않았다: 오히려 세계의 영원성이 부각된다. 부동의 동자는 파르메니데스의 랄레테이아의 미지의 여신과 다르다. 오히려 지성의 관조를 통해 스피노자의 신에 대한 지적 사랑과 영원성의 관점으로 통합될 수 있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원인들의 상호작용과 변화의 생성의 변증법은 스피노자의 양태존재론과는 다르다.

 

니체의 신죽음

 

니체의 힘에의 의지는 존재자 자체의 본질을 다루며, 동일자의 영원회귀는 오히려 신학적 성격을 갖는다. 이것은 부정의 신학이며 "신은 죽었다"로 표현된다. 이것은 무신론이 아니라 형이상학적 존재신학에 대한 비판일 수가 있다. 이러한 비판에서 허무주의가 완성된다 (Nietzsche II: 210).

 

그러나 하이데거처럼 니체의 신죽음의 선언을 존재신학의 형이상학에 대한 비판으로 보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있다. 니체에게 유대-기독교의 신의 관념은 삶의 비하와 무의 의지를 강화한다. 유대교의 의식이 원한이라면 기독교의 의식은 가책이다. 기독교는 우리가 신을 죽음에 처하게 만들었다고 가르친다. 니체는 예수를 바울로부터 분리시키고 예수를 불교적으로 이해했다.

 

니체의 공격은 역사적 예수를 옹호하고 바울의 칭의론과 예수의 부활을 향한 공격이다. 기독교가 바울의 신화학을 버리고 역사적 예수의 실천으로 되돌아가길 바란다 (들뢰즈, <니체와 철학>, 274). 그러나 니체의 문제는 유대인으로서 예수를 불교적으로 오해했고, 바울을 로마 카톨릭의 교권주의로 착각한 것이다.

 

형이상학에서 존재론과 신학은 서로 의존 되지만 하이데거는 니체와 더불어 거절한다. 여기서 존재자체가 사유되지 않기 때문이다. 신학은 일차원인자를 존재론에서 추출한다. 존재신학적인 형이상학은 존재자체로부터 사유하지 않는다. 형이상학의 본질은 존재자체에 대해 무가 있음을 말하는 철학의 역사이며, 이것이 허무주의다 (ibid., 211). 존재자체와 무가 사유되지 않는다면 형이상학은 오류다.

 

그러나 존재의 진리는 숨겨져 있지만 무에서 스스로를 드러내며 현전한다. 형이상학은 존재의 은폐를 사유하지 못한다. 하이데거는 존재의 은폐와 탈은폐의 변증법에 주목한다. 무가 존재자체에 적용된다. 신은 존재의 진리이지만 동시에 죽음이다. 여기서 하이데거는 헤겔의 테제—순수 존재와 순수 무는 동일하다—를 자신의 존재론에 수용한다. 그러나 존재자체에 대한 물음이 아니라 존재자들에 대한 물음을 통해 접근된다.

 

그러나 헤겔의 현상학은 하이데거의 존재와 무의 결합과는 다르다. 헤겔에게서 ‘이다’는 모든 사물의 술어이고, 이런 술어는 장미와 같은 사물로 규정될 수 없다. 모든 것은 존재하지만 (is), 이러한 존재는 어떤 것이 아니다 (is not). 어떤 것이 아닌 것은 무이다. 따라서 순수 존재는 순수 무이다(마르쿠제, <이성과 혁명>, 149).

 

헤겔은 무를 기존의 사물에 대한 거절내지 비판적 부정으로 말하지, 하이데거 처럼 존재와 무가 같이 있는 동일성의 원리로 말하지 않는다. 헤겔에게 순수 존재는 무와 동일하며, 존재의 모든 계기마다 무 (아직 존재하지 않는 것)가 있고 이로인해 동시에 존재가 있다. 사물은 생성, 소멸하는 점에서 존재하며 되어감으로 인식된다. 존재와 무의 공존은 모든 존재자의 구조안에 있으며 존재의 부정에서 생성의 변증법적 과정이 전개된다.

 

그러나 하이데거는 헤겔의 변증법적 논리를 생성과정에서 나타나는 부정과 비판 그리고 매개와 지양이 아니라, 현존재와 존재(무)의 존재론적 관계로 가져간다. 무로부터 모든 존재자들은 존재하게 된다. 현존재의 무와 죽음안에서 만 모든 존재자들은 존재하게 된다.

 

비판적 반성: 하이데거, 영지주의, 허무주의

 

하이데거는 항상 존재의미의 질문에 관심했고 현존재의 존재방식을 시간성과 더불어 실존론적으로 분석했다. 여기에 주관주의 경향이 나타난다. 존재는 무엇인가라는 물음에서 하이데거는 인간은 무엇인가를 분석한다.

 

<존재와 시간>에서 하이데거가 현존재의 개방성과 초월성을 기초로 존재에 접근한다면, <니체>에서 존재자체를 통해 인간을 정의한다. 존재론적 차이가 존재와 현존재 사이에서 일어난다. <인간주의 서한>에서 인간의 사유는 존재에 관한 것이며. 존재에 경청한다. 이러한 인간의 경청에서 존재자체의 침묵의 요구는 언어로 변형된다.

 

언어는 존재의 언어이며, 구름이 하늘의 구름과 같다. 언어는 존재의 장소이며 사유는 주관주의적이거나 내적인 창조성이 아니다. 사유는 존재의 명령에 복종하는 응답이며 현상의 세계는 인간을 존재로부터 소외시킨다. 존재의 세계는 나무와 숲의 관계와 비교할 수 있다. 나무들은 숲을 숨기지만 여전히 숲은 나무들에 의해 구성된다. 존재망각은 인간과 존재의 관계에 속하는 본질적인 것이다.

 

아렌트에 의하면, 하이데거는 <존재와 사간>과는 달리 인간의 사유를 비주관주의화하고 주체를 제거하며 현존재를 존재의 기능으로 변형시킨다. 모든 효력과 영향은 존재에서부터 현존재로 흐르며. 사유는 존재에 의해 요구되며 존재의 진리를 표현한다.

 

하이데거에개서 사유와 의지는 같이 있으며 의지는 인간을 과거의 망각으로 가게한다. 이로인해 사유는 회상An-denken) 또는 명상으로 전이된다. 의지는 결코 시작을 가질 수 없으며 망각을 통해 본질적으로 포기한다 (Arendt. The Life of Mind, 173-4).

 

후기 하이데거의 존재론은 밀교적이며 파라미데스의 존재신비와 무에 휨싸인다. 무엇보다더 한스 요나스는 하이데거의 존재론에서 영지주의 특징을 본다. 하이데거의 현존재는 세계내에 던져졌으며 이것은 현존재의 근본적 성격이며 존재의 자기경험을 의미한다. 하이데거의 현존재의 던져짐은 본래적으로 영지주의 기원을 갖는다.

 

만데안주의 문헌에서 삶은 세계로 던져졌으며, 빛은 어둠으로 던졌으며 영혼은 몸으로 던져졌다. 던져짐의 이미지는 실존일반의 역동적 성격을 부여하며 미래의 구원을 위해 자신을 기획한다. 과거와 미래사이에 현재는 오로지 영지자체의 계기가 된다. 이것은 종말론적 현재이다. 시간성으로 던져졌지만 인간은 영원성에 기원을 가지며 그곳을 향한 목적을 갖는다 (Jonas. Gnostic Religion, 334-5).

 

이러한 형이상학은 물질세계에 대한 영지주의적 허무주의로 나타나는데 한스 요나스는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에서 그러한 특징을 본다. 하이데거의 기초 존재론은 칸트의 객관적 범주와는 달리 존재론적 구조에 입각하며, 자아는 세계 안에서 존재일반과 관계된다. 실존성은 내적 시간의 카테고리로서 급진적인 시간성의 의미를 가지며 존재의 진정한 의미를 갖는다. 실존성은 시간의 세 가지 지평 즉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 사이에 펼쳐있다.

 

실존적으로 진정한 현재는 자아가 과거와 미래에 관련된 차원을 통해 상황의 현재를 지적한다. 그것은 결단의 빛에서 플레시처럼 나타나며, 기획된 미래는 주어진 과거(던져짐)에 반응한다. 이러한 만남에서 하이데거는 현재의 시간 양식으로 순간을 말하며 이것은 과거와 미래의 지평에서 창출된다.

 

아러한 과거와 미래의 두 지평의 만남을 거절하는 것은 익명의 일상인들이 잡담이나 호기심에 떨어지고 변질되는 상태를 말한다. 현존재의 진정성은 현사실성 (과거로 부터의 던져짐과 죄책)과 거거의 실존적 양식과 다르다. 그러나 현재를 넘어서서 죽음을 예견하며 염려를 하는 것은 미래의 실존적 양식이다 (ibid , 336).

 

현재는 과거와 미래의 위기 사이에서 있으며, 현존재는 죽음을 직면하면서 결단을 통해 이러한 죽음의 무를 거쳐 미래를 향해 돌진한다. 죽음을 출생시키는 결단에서 현재는 진정한 내용을 갖는다. 죽음의 제로 그라운드로 내려가는 현존재의 환원주의에서 사물들은 실존의 프로젝트와 염려를 위해 이용가치를 가질 뿐이다.

 

그것은 중립적이며 무관심한 대상들이다. 자연과 사물들에 대한 실존주의적 평가절하가 있다. 이것은 자연과 대상들에 대한 영지주의적 폄하에 공명한다. 실존주의처럼 자연과 타자에 대한 경멸을 담는 철학은 드물다.

 

플라톤에게서 형상의 세계는 시간의 흐름안에서 영원히 임재하며 초월해있다. 니체의 신죽음 선언에서 이러한 영원성의 상실은 진정한 현재의 몰락을 설명한다. 이데아와 이념의 세계는 사라진다. 하이데거는 니체의 신죽음 선언에서 플라톤과 유대 기독교의 세계의 종말을 보았다. 실재론에 대한 유명론의 승리가 나타난다. 이것은 니체의 허무주의와 하이데거의 존재철학의 뿌리에 놓여있다 (Ibid., 33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