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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뢰즈: 영원회귀와 차이의 반복

content6462 2025. 12. 31. 01:26

차이와 반복

 

들뢰즈에게 차이와 반복은 논리적으로 그리고 형이상학적으로 표상에 기초한 개념적인 정체성 개념에 앞서있다. 차이의 반복은 정체성 (신, 이데아 세계, 자아, 영혼불멸 등)의 반복을 거절한다. 이것은 반 헤겔주의를 지향하는 철학이며, 차이와 반복개념은 비확실성과 예기치않는 효과와 산출을 갖는다. 다수성 개념이 실체와 본질을 대신하고, 하이데거가 주장하는 형이상학의 종언을 거절한다.

 

들뢰즈는 구조화된 기존질서나 상식에 문제틀을 하고 이러한 현실세계에서 밀려나간 잠재적인 것을 통해 전복하려고 한다. 생은 지속적으로 창조적이며 자기변형을 하며 열려있지만 일정한 삶의 양식에서 구체적으로 현실화된다.

 

들뢰즈는 생물학을 풍부하게 자신의 형이상학 즉 차이와 반복의 철학을 위해 통섭한다. 이러한 내재성의 철학은 헤겔의 동일성과 부정을 기초로하는 변증법과는 다르다. 내재성의 철학은 지평의 운동 또는 탈중심된 중심 또는 탈구된 주변부에서 반복과 차이가 드러난다 (Hughes, Deleuze’s Difference and Repetition, xxi).

 

과학에서 모든 현상이나 사건들을 기술할 때 법칙이나 사이클에 기초하여 일반성 개념을 사용하지만, 반복은 사물이나 사건의 유니크한 시리즈를 지적한다. 이것은 다차적 특이성에 대한 들뢰즈의 개념일 수가 있다.

 

예를들어 세르 반테스의 돈키호테는 문예비평에서 반복되고 재생산 내지 재창조 될 수 있다. 차이의 반복은 개념적 동일성과는 무관하지만, 이것은 특이성 개념과 연결되며 일반성의 법을 위반한다. 특이성은 생의 도약과 활력에 기초되며 보편성을 획득한다 (키에케고르와 니체).

 

이러한 특이성의 차이와 반복은 니체의 영원회귀나 또는 반복적 강압이나 파괴에서 (프로이드의 죽음충동)에서도 볼 수 있다. 역사적으로 전쟁도 반복된다. 과거의 텍스트가 현재의 텍스트에서 차이와 반복을 한다. 그러나 이러한 반복과 차이는 들뢰즈와는 달리 헤겔의 역사철학에서도 그대로 나타난다.

 

들뢰즈의 문제는 여기에 있다. 반복은 개념이 없는 차이이며, 모든 것은 시물라크라이며 타자의 반복으로 존재한다. 시물라크라의 차이는 대립과 다르다. 니체의 영원 회귀는 매순간마다 일어나는 실제경험에서 차이나는 발생의 반복이다. 영원불변의 법이 반복되는 것이 아니라 패턴이 나타난다.

 

현재 (습관)는 과거와 현재를 종합한다. 그런가하면 과거가 현재와 미래를 종합한다. 이것은 베르그송의 순수지속의 시간성과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나타난다 (ibid., 108). 마지막으로 미래가 니체의 생성을 기초로 과거와 현재를 종합한다 (영원회귀) (ibid., 119). 그렇다면 들뢰즈에게 영원회귀는 일반적 법이 될 수 없다. 오히려 알렝 비탈울 통해 특이성의 사건으로 영원회귀에 참여하고 되어가는 모든 생을 긍정한다. 자연과 력사의 경계는 허물어진다.

 

베르그송-니체의 시간성의 접합에서 들뢰즈는 내적인 힘안(힘에의 의지)안에서 상호작용하는 차이와 다양태를 부각시킨다. 이것은 자연과 역사의 과정에서 되어가면서 반복한다. 되어감의 반복에서 다양체는 개념적 정체성이 없으며 다차적 방식으로 변형되고 확장된다 (Difference and Repetition, 70-128).

 

특이성은 베르그송의 잠재성에 공명하며, 잠재적 다양체는 현실태의 이미지 즉 시물라크라 (모방 이미지)로 나타난다. 그러나 신과 이데아의 세계가 해체된다면 시물라크라는 단지 모사가 아니라 실재로서 의미를 갖는다. 여기서 들뢰즈의 되어감의 차이의 반복은 베르그송의 플라톤적 상기론을 제거한다.

 

만일 들뢰즈의 논리를 세포의 생에 적용한다면 세포에서 드러나는 관계의 네트워크는 각 구성분들의 실제적인 차이들을 보여주며, 차이들은 세포 존재 안에서 발생한다. 그러나 세포의 네트워크를 베르그송의 순수지속의 시간성과 니체의 영원회귀로 설명이 가능한가? 세포는 들뢰즈의 차별화된 시물라크라일 수 있다. 모든 존재하는 것들은 물자체의 시물라크라이며 존재론적 차이와 위ㅣ계질서는 벗겨진다.

 

그러나 들뢰즈의 차이와 반복과는 달리 세포의 생은 공생과 매개와 촉매작용울 통해 생의 풍부한 변증법적 시스템을 보여준다. 시스템적 사고는 들뢰즈의 형이상학에 제동을 건다.

 

영원회귀와 시간

 

시간이해에서 들뢰즈는 반복이 일어나는 세 가지 다른 계기들로 파악한다. 반복의 측면에서 현재만이 존재하며 과거와 미래를 포함한다. 현재안에 과거와 미래는 기입된다. 습관과 기억이 지속되는 현재에서 과거와 미래를 종합한다 (ibid., 83).

 

그러나 현재의 습관과 기억에 여전히 비어있는 잠재성의 시간은 현재 안에 기입된 세번째 층인데 시간의 반복을 깨트리고, 위대한 상징적 사건이나 궁극적 사건을 지적하며, 편재한다. 이러한 엘랑 비탈을 통해 개인은 자아를 지어버리고 영원한 회귀에 참여한다 (ibid., 90).

 

이런 점에서 들뢰즈는 니체의 영원회귀가 동일자의 영속성이나 반복이 아니라, 절대적인 차별자에 대한 새로운 사유이며, 차이와 반복의 원리로 이해한다. 힘의 의지가 영원회귀 즉 차이나는 것들을 되돌아오게한다.

 

힘에의 의지는 관계 안에 놓여있는 힘들의 양적차이이며, 힘들의 종합이고, 또한 이러한 관계에서 나타나는 힘의 성질 (지배 관계)을 표현하고 생성한다. 시간과 관련하여 권력의지는 힘들과 힘의 차이들을 종합하고 재생산함으로써 영원회귀의 근거가 된다 (들뢰즈, <니체와 철학>,103).

 

니체의 계보학은 발생론적 방법을 구현하며, 힘에의 의지는 들뢰즈의 차이의 철학의 근거가 된다. 생산적이고 긍정적인 것은 변증법이 아니라 차이에 기초한 비변증법적인 힘들에 의해 형성된다. 진화는 창조적이며, 근접한 가능성은 질서가 아니다. 로히려 무질서에서 보다 많은 다양성과 다름으로 나타난다. 존재하는 것 보다 비존재에서 많은 것들이 출현한다.

 

들뢰즈의 한계는 계보학틀 니체의 역사적 감수성에 연관하여 다루지 못한다. 니체는 <시기애 맞지않는 성찰>에서 역사를 세 가지로 분류하고 (기념비적 위대한 역사, 문화 보존의 골동품적 역사, 비판적인 현재의 역사), 역사의 의미부여를 부각시켰다. 그리고 니체의 역사적 계보학은 <짜라투스트라>의 "구원"에 연결된다.

 

니체: 역사 계보학

 

벤야민은 <역사철학 테제>에서 니체의 계보학과 유효한 역사를 고려한다. 니체의 <시기에 맞지않는 성찰>에 수록된 <생을 위한 역사의 유용성과 남용>을 벤야민은 희생자들의 삶을 회복하려고 한다. 보편 진보역사는 정지되어야 하고 과거에 진보란 이름으로 희생자들 자들의 역사를 지금시간(Jetztzeit)에서 기억의 위험성에서 불러낸다.

 

니체에 의하면 역사적 감수성의 결여는 모든 철학의 본래적인 오류임을 말한다. 우리는 속지 말아야 한다. 시간은 진보한다. 모든 것이 시간과 더불어 진보한다고 착각한다. 그러나 인류는 진보하지 않는다. 인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은 니체의 허무주의에 대한 사고실험이다 (Arendt, The Life of Mind, 259-60).

 

<선악을 넘어서>19절에서 니체는 의지를 명령과 복종으로 규정한다. 명령을 하는 의지의 자유는 복종하는 의지에 대해 우위성을 갖는다. 명령/복종의 의지의 이중성에서 니체는 주체의 느낌에 우위성을 부여했다. "나는 할 수있다"ㅡ이것은 쾌락을 동반하며 의지자체안에 있다. 이것은 수행을 통해서 오는 일에대한 쾌락과는 다르다 (ibid , 161).

 

의지의 모든 행동 (의지의 지향성)에는 느낌의 다수성이 있으며 그리고 사유가 나온다. 의지의 지향성에 명령하는 사고가 있으며 사고는 의지의 모든 행동과 구분되지 않는다. 명령의 감정이 나타난다. 의지의 자유는 복종하는 자에 대해 우월성을 느끼는 감정이다.

 

나는 자유롭고 그는 복종한다. 의식은 의지안에 놓여있다. 모든의지의 지향성은 힘 (명령)을 대상으로 가지며, 우리 모두는 명령과 복종이라는 의지의 지향성을 갖는다. 의지는 명령하는데서 힘의 느낌에서 증강을 향유한다. L'effect, c'est1 moi.

 

여기서 니체는 고대철학의 쾌락주의를 쫒아간다. 즐거움은 필요와 욕망과 무관하며, 또한 쾌락은 살아있는 몸의 감각적 욕망이 된다. 즐거움은 고통과 욕망에서 자유로울 때 경험될 수있다. 이러한 주이상스는 디오니소스 원리에서 넘쳐나는 충만함이다. 디오니소스의 원리는 생의 충만함을 말하지만 감각적 욕망과 집착에서 파괴로 나간다. 생에대한 무조건적 긍정은 최고의 가치로 고양되며, 여기에 따라 모든 다른 것들이 평가된다.

 

이것은 니체의 의지-영원성이며, 영원회귀안에서 살아가는 초인을 만들어낸다. 영원회귀는 모든 생성과 변화의 과정의 덧없음과 죄없음 그리고 책임과 죄책으로 부터의 자유를 선포한다. 기독교의 도덕적 세계관은 생성의 죄없음에 침해하고 죄와 처벌로 전염시켰다.

 

의지는 뒤로 갈 수 없으며 시간의 수레바퀴를 멈출 수가 없다. 이러한 의지의 무능함에서 모든 인간의 악ㅡ보복과 원한과 처벌 ㅡ이 나타난다. 인간의 정의는 의지의 무능함으로 인해 타자를 처벌하고 지배하는 권력욕망이다. 이러한 의지의 무능함으로 인해 니체는 뒤를 돌아보고 기억하고 생각하길 원한다.

 

생이있는 곳에 의지가 있다. 이것은 생의 의지가 아니라 힘에의 의지이다. 생의 충만함으로 인해 자기극복은 가능해지며 이러한 활동성은 창조성이며 보복욕망을 극복한다. 이러한 생의 충만함으로 인해 의지는 과거와 현재룰 넘어서서 미래를 개방한다.

 

초인은 자기를 초월하고 극복할 수 있는 존재이다. 모든 과거의 것을 "나는 그것을 원했다"로 재창조하는 것ㅡ이것을 니체는 구원으로 부른다. 내가 생의 충만한 진정한 세계를 선악을 통해 판단하는 순간 허무주의가 된다. 허무주의를 극복하기위해 가치를 전도하고 현상계를 유일한 세계로 보는 것을 거절해야한다. 세계와 인간을 변혁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와 인간을 평가하는 방식과 가치를 전도시킨다.

 

일차 원인이 제거 된다면 인간은 되돌아갈 원인이 없다. 인과율이 제거 된다면 시간의 구조와 계열도 의미가 없다. 모든 것은 사라진다. 모든 과거를 삼켜버리는 시간으로부터의 해방은 다음을 확인한다: 사라진 것은 회귀한다. 되어감은 궁극적 상태를 목표로 하지 않는다. 되어감은 단지 현상의 상태가 아니다. 존재자들의 세계가 단순한 현상이다. 되어감은 매 순간 동일한 가치를 갖는다.

 

모든 것은 사라지며, 시간의 법 (크로노스)은 자신의 자녀둘을 잡아 먹는다. 이것이 정의다. 모든 과거들은 단편이며 의지는 해방자이다. 왜냐하면 내가 그렇게 의지했고 현재도 의지하며 앞으로도 의지하기 때문이다. 힘에의 의지는 시간과의 화해보더 더 고결하다.

 

니체의 영원회귀는 들뢰즈와 다르다. 들뢰즈에게서 모든 것은 순수시간 안에서 움직이고 변한다. 순수 시간자체는 변하거나 움직이지도 않는다. 그렇다고 영원하지도 않다. 그러나 시간은 변하고 움직이는 모든 것의 형상이지만 여전히 변하거나 움직이는 형상이 아니다 (Deleuze, Critique et inique, 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