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적 진화와 특이성
앙리 베르그송의 창조적 진화개념은 들뢰즈에게 중요하다. 생명의 약진 (엘랑 비탈)에서 의식은 과거영원성 (순수지속의 시간성과 순수기억)에 침여하는 자유로운 본질즉 특이성이 된다. 순수지속의 시간성은 현재에 병합되고 현재화에서 다양체로 출현한다.
다윈의 자연선택과 생존투쟁은 잠재성(순수지속의 사간성)과 현재화의 다양체를 파악할 수가 없다. 공동조상(하나)과 다수성의 변용과 개체변이는 잠재적 다양체와 엘랑 비탈에 기초한 진화의 창조성을 파악하기 어렵다. 엘랑 비탈은 활력적인 자극이며, 인간의 자연적인 창조적 생의 도약으로 이해된다.
여기서 시간성은 순수 지속으로서 잠재성이며 개인의 주관적인 시간경험에 토대가 된다. 이것은 시계로 측정되는 물리학의 우주적 시간과는 다르다. 순수기억은 의식의 본질이며 과거의 누적된 기억은 불가역적이며 이러한 마음의 본능은 인간의 이성과 현재의 체험보다 더 강하다. 이것은 모래시계에 비교할 수 있다. 위 부분이 비어지면 아래 부분이 채워진다 (Creative Evolution, 18).
지속으로서의 시간은 오로지 직관을 통해 이해된다. 만일 삶이 지속과 기억에 의해 유지가 된다면, 이것은 원초적 반복으로서 모든 생의 지속과 다양체의 분화에서 나타난다. 잠재성과 현실의 변형태에서 반복과 차이는 창조적 진화로 출현하며, 이것은 다윈의 공동조상과 개체변양태에서 점진적인 시간개념과는 전혀 다르다. 잠재성의 다양체에서 볼 때 특이성과 더불어 오히려 다양한 조상들이 있을 수 있다.
엘랑 비탈에서 모든 살아있는 것들의 창조성을 이해한다면, 생의 다원성과 분화가 진화를 설명한다. 인간의 지식은 감각의 활동에서 지성의 형식과 구조에서 출현한다. 그러나 지성은 본능과 충동과는 분리된다. 베르그송의 창조적 진화는 직관에 기초하며 욕망기계론적인 생의 이해에서 나타나는 특이성과 집단적 다양체를 위해 형이상학적 배경이 될 수 있다.
들뢰즈는 베르그송의 창조적 진화에서 현재 의식의 지속은 질적인 다양체로 구성되며, 서로 다른 의식의 상태가 겹치고 진보하면서 풍부한 내용을 담는다. 창조적 진화에서 자유에 대한 경험이 일어난다. 생명의 전체 진화 과정에서 자유는 창조성이 되며, 자유의 실현은 물질의 속으로 들어가서 진화의 가지를 펼쳐나간다. 삶은 자기 창조행위가 되며 분화와 다양체와 복잡성으로 나타난다.
창조적 진화는 들뢰즈에게서 다양체의 중요성을 제공한다. 잠재성(the virtual)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잠재태와는 달리 순수지속과 기억이며, 현실태에서 완전히 실현되는 가능성이 아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차이는 잠재태에서 현실태로 나가는 목적을 의미하지 타자성이나 다양성과는 분리된다.
그러나 들뢰즈의 잠재성은 이미지(시물라크라)로 현실화되면서 실재적인 것이 된다. 차이와 반복은 잠재성과 시물라크라의 관계에서 볼 수 있다. 들뢰즈는 현실화되지않고 배제된 것들의 잠재성의 다양체를 부각시킨다. 충족되지 않은 잠재성을 복권 시킬 때, 우리는 비로서 현재를 새로운 미래로 변형시킬 수 있다. 이러한 정치적 태도는 68혁명의 배경을 가진다.
과거의 잠재적인 것은 다름의 관계들의 영역을 지적하며, 이러한 다름의 관계들은 현실적인 영역으로 이전되면서 현재화가 되고 시물라크라로 실재화가 된다. 과거의 잠재태는 현실태와 동시에 존재하며, 전체과거는 동일한 것이 아니라 차이와 다름으로 현실의 변양태에서 반복된다.
이러한 입장은 현상학적으로 볼때 급진적인 반성을 통해 과거의 유효한 역사를 생생한 현재로 기술하는 것과 먼 거리에 있지 않다. 그러나 들뢰즈는 칸트의 통각의 선험적 일치—헤겔이 극찬하고 이러한 선험적 일치를 개념적으로 파악했다—를 거절되고, 선험적 영역은 일치가 아니라 다양체 즉 다름과 차이로 말한다.
충족되지 않은 잠재적인 것이 현실적인 것의 충분한 근거가 되며, 모든 실제 경험의 출현조건이 되며, 과정의 산물이다. 미래에 새롭게 되어가기 위해 우리는 아직 현실화되지 않은 잠재적인 것들 (아직 아닌 것들)을 삶에서 회복해야한다.
이러한 형이상학적 틀에서 들뢰즈는 니체의 영원회귀와 힘에의 의지를 계보학적으로 발전시킨다. 그러나 여전히 실재성과 시물라크라의 현실태에서 니체의 역사적 감수성과 유효한 역사에 대한 사회학적 검토는 약화된다. 초인의 고결한 윤리는 노마드 욕망주체의 집단성과 법의 위반으로 이동한다.
들뢰즈: 하이데거 비판
<차이와 반복> 1장에서 들뢰즈는 파르메니데스에서 하이데거에 이르는 존재자체의 일의성과 음성을 비판한다. 존재의 동일한 음성은 현존재의 모든 다양성을 포함하며 차이 자체로 말해진다. <차이와 반복> 1장의 "하이데거의 차이의 철학에 대한 노트"에서 들뢰즈는 차이로서 존재에 주목한다.
하아데거의 존재론적 차이는 모든 존재자들과 구별되는 존재자제의 드러남이다. 존재는 트임이며 드러냄이다. 존재는 존재자들에게 차이를 만들어내는 차이이다. 존재론적 차이는 질문에 상응하며, 차이는 표상의 대상이 아니다.
표상은 형이상학에서 차이를 정체성에 예속 시킨다. 그러나 형이상학은 차이자체를 생각할 수 없다. 차이안에는 종합이나 매개나 화해가 없다. 존재자체는 진리의 드러남에서 존재의 차이를 열어 밝힌다. 차이의 열어밝힘에서 존재자들은 존재안에 보존된다. 차이는 형이상학에서 표상을 통해 정체성에 예속되는 것이 아니라 존재의 동일성에 속한다. 존재동일성은 차이를 통해 모아진다. 존재의 동일성은 차이와 더불어있다. (존재와 존재자들 간의) 존재론적 차이에는 상응이 있다.
존재론적 차이와 악마성
들뢰즈에 의하면 존재에서 존재자들과의 차이는 여전히 위계질서를 포함하며 서로 화해될 수 없다. 들뢰즈는 존재론적 차이와 위계질서에서 일자-다수의 관계를 악마적으로 본다. 이것은 일의성의 존재의 오만과 존재자들의 아나키로 등장한다.
들뢰즈에 의하면 플라톤주의는 물자체(이데아)/이미지(시물라크라)의 이원론에 기초한다. 차이는 물자체안에서 사유되는 것이 아니라 이데아에 예속된다. 플라톤주의를 극복하는 것은 모사에 대한 형상의 우위성을 거절하는 것이다. 시물라크라와 반영을 높이는 것이다. 니체의 영원회귀는 개별자들이 시물라크라로 반복하면서 돌아오는 것이다.
들뢰즈는 영원회귀를 형상이 없는 존재의 힘으로 해석하고, 시물라크라를 존재의 진정한 형상으로 간주한다. 여기서 들뢰즈는 스피노자의 양태존재 즉 내재적 동등성에 주목한다. 시물라크라의 영원회귀는 동동한 존재지만 다양체로 시간의 흐름과 생성에서 반복된다. 니체-스피노자의 틀에서 들뢰즈는 하이데거의 존재론적 위계질서를 극복한다.
그러나 들뢰즈는 니체의 헤라클레이토스보다는 그의 순수시간성 개념으로 인해 파르메니데스-하이데거의 전통을 충분히 넘어서지 못한다. 하이데거는 <존재와 시간> 25절에서 배려의 존재론은 주위세계의 연관성에서 파악되며 교류와 접촉은 배려의 존재방식에서 나타나는 다양체에 관계된다. 이것은 사물의 도구성을 분석한다.
더우기 하이데거는 <존재와 시간> 76절에서 니체의 역사적 감수성과 계보학을 슈프랑거-딜타이의 역사와 생의 문제를 존재론적으로 개념화했다. 하이데거는 들뢰즈의 형이상학에 역사적 의미를 비판적으로 보충할 수 있다.
어째튼 베르그송-들뢰즈의 순수지속의 시간성은 크로노스와 상관없다. 헤라클레이토스의 생성과 소멸의 변증법 너머에 있다. 그러나 헤라클레이토스의 생성의 변증법은 니체의 중심원리로 작동한다. 원인과 결과가 없다면 의지도 거절된다. 초인은 생성의 과정에서 모든 오류와 이분법을 극복하고 이러한 동요로 부터 구원된 사람이다. 남겨진 것은 존재하는 모든 것들을 축복하고 긍정을 말하는 것이다 (The Life of the Mind., 171-2).
니체와 구원
니체는 과거에 대해 의지의 무력함을 말하지만 현재의 구원 의미를 언급한다. <짜라투스트라> pt. 2. "구원에 관하여"에서 매우 중요한 내용을 제시한다. 불구자들이 짜라투스트라를 찾아와서 자신들의 질병을 고치주면 믿겠다고 말한다. 그러나 눈먼 자를 고치면 그는 세상의 너무도 나쁜 것들을 보고 치료해준 사람을 저주할 것이다.
짜라투스트라는 너무나 많은 것을 결여하고 하나만 지나치게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전도된 불구자로 부른다. 이들은 눈의 탐욕과 남을 함담하는 커다란 입과 모든 것을 배속에 삼켜버리는 큐파디타스로 인해 많은 것을 갖지 못한다. 니체의 구원은 큐파디타스에 빠져있는 불구자들을 구원하는 휴머니즘 전통에 서 있다.
그러나 니체의 <권력에의 의지>862-3절은 하이데거에 의해 "파시즘"적 인종주의자로 공격 당했다. 니체는 말한다. "강자는 강화되며 이 세상에서 기진맥진 한 자들은 무력해지고 파멸하는 것이다. ...<강한 인간과 약한 인간의 개념>이라는 개념은 강한 인간의 경우에는 많은 힘이 유전되어있다데 환원된다...인간의 경우에는 그 유전이 부족한 것이다." 보다 좋은 인간유형으로 교배시킨다는 니체의 생각은 우생학적 교배와 연약한 자들의 절멸이라는 파시즘의 인종정책과 사회 진화론의 우생학적 백인 우월주의로 귀결된다.
니체의 계보학은 일반화되기 보다는 역사의 영역과 힘에의 의지 그리고 초인의 윤리와 구원에서 미세한 방식으로 구체화된다. 힘은 세분화된다. 들뢰즈와는 달리 니체는 영원회귀를 디오니소스적 생 즉 그리스 여인들의 출산행위에서 보았다. 생명이 영원히 반복되며 차이를 가지고 나타난다. 이러한 디오니소스적 생의 원리는 해라클레이토스의 변화와 생성 그리고 사라짐의 변증법에서 여전히 생명존재로 돌아온다.
이것이 니체로 하여금 헤라클레이토스를 기초로한 헤겔의 역사 변증법과 갈라서게한다. 니체는 디오니소스적 생의 원리를 귀족윤리와 그리고 초인의 고결한 윤리를 구성한다. 니체의 계보학에는 역사와 생을 연결하는 역사적 감수성과 형이상학적 위안이 있다. 여기서 니체는 계보학적인 해석학 다시말해 사회학적 계보학을 열어준다.
이것은 들뢰즈의 차이와 반복을 통한 영원회귀에 대한 접근과는 다르다. 들뢰즈에게는 고결한 자들의 윤리보다는 생산적 욕망기계에 기초한 노마드의 정치가 있다. 이러한 정치는 <안티 오이디푸스>에서 자본주의 정신분열증을 비판하고 특이성의 집단성으로 부각된다.
특이성은 자본주의 법과 권력에 저항하며 새로운 욕망의 영토를 창출하는 집단적인 다양체로 등장한다. 이러한 욕망의 정치에서 들뢰즈는 계보학의 역사적 감수성을 간과한다. 그러나 자본주의는 경제행위와 국가지배 그리고 해외시장에서 분화에서 무엇이 자본주의를 물신숭배와 기술합리성 그리고 지배방식을 통해 정신 분열증을 초래하는지 검토할 필요가 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모두가 다 정신분열이라면 노마드 주체도 욕망를 향한 분열증 환자가 되고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