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데거와 영지주의 존재론
한스 요나스는 하이데거의 존재론에서 영지주의 특징을 보았다. 하이데거의 현존재는 세계 내에 던져졌으며, 이것은 현존재의 근본성격이며 실존의 자기경험을 말한다. 현존재의 던져짐은 본래적으로 영지주의 기원을 갖는다.
한스 요나스의 분석이 설득력을 갖는 이유는 마르부르크 대학의 박사논문을 자도한 교수가 하이데거이기 때문이다. 요나스의 분석에 의하면, 만데안주의 문헌에서 삶은 세계로 던져졌으며, 빛은 어둠으로 던져졌으며, 영혼은 몸으로 던져졌다. 던져짐의 이미지는 실존일반의 역동적 성격을 부여하며 미래의 구원을 위해 자신을 기획한다. 과거와 미래 사이에 현재는 오로지 존재의 빛으로부터 오는 영지를 파악하는 계기와 순간이 된다. 이것은 종말론적 현재이다. 시간성으로 던져졌지만 인간은 영원성에 기원을 가지며 그곳을 향한 목적을 갖는다 (Jonas, Gnostic Religion, 334-5).
이러한 형이상학은 물질세계에 대한 영지주의적 허무주의로 나타나는데 한스 요나스는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에서 그러한 특징을 기본구조로 본다. 하이데거의 기초 존재론은 칸트의 객관적 범주와는 달리 세계내의 존재론적 구조에 입각하며, 자아는 존재일반과 관계된다.
하이데거의: 근대 인식론 해체
<존재와 시간> 6절에서 하이데거는 칸트의 도식론를 해체했다. 칸트는 <순수이성비판>에서 감각을 통해 들어온 내용을 시간의 질서에 따라 도식으로 배열한다. 이러한 도식작용은 구상력의 종합을 통해 지성의 범주와 판단으로 개념화된다. 칸트는 이러한 도식작용을 영혼의 심층에 은폐된 기술로 간주했다.
그러나 하이데거는 현존재를 주체의 의식이 아니라 세계 안에 있으며 시간의 지평에서 파악한다. 칸트의 도식론에서 존재물음은 현존재와 선험적 시간의 지평 (과거, 현재, 미래)에서 파악되지 않는다. 하이데거에 의하면 칸트의 도식론은 영혼의 숨겨진 기술이며 데카르트의 코기토 철학에서 기인한다. 데카르트의 코기토에서 무한자로서의 신(창조주)은 본질적으로 고대 존재론의 계기로만 보존된다.
그러나 하이데거의 평가와는 달리 데카르트는 <세 번쩨 성찰> 에서 무한자는 코키토의 우위에 있으며 하나님의 주권성은 신비한 체험으로 나타난다. 무한성은 코기토로 환원되는 것이 아니라 타자의 얼굴로 나타난다 (레비나스). 신비한 체험을 통한 진리의 드러남과 코기토에 대한 하나님 이념의 우위성은 타자의 영역을 개방한다.
더우기 칸트는 <판단력 비판>에서 자연사를 자연의 고고학으로 개념화하고 예술로 연결하지만, <보편사 이념, 1784> 네 번째 전제에서 자연은 사회안에 있는 인간의 적대감에 관여된다. 이러한 적대감은 "인간의 비사회적 사회성"을 의미한다. 인간은 욕구적 존재이며, 이기주의 성향과 투쟁, 그리고 지칠줄 모르는 경쟁과 소유욕과 지배욕에서 인간은 이성적 존재로 출현한다.
인간은 사회적 존재이며 시간안에 조건되며 경쟁과 투쟁과 비사회적 병리현상으로 특징된다. 이것은 칸트적인 의미에서 자연의 고고학이며 코나투스 존재론이다. 칸트는 욕구적 존재의 투쟁과 갈등에 대해 거리를 취하는 하이데거의 현존재의 심리적 배려와는 다르다.
더우기 그리스 철학의 전통은ㅡ 하이데거가 주장하는 것처럼ㅡ 존재자체와 연관된 현존재의 시간성과 역사성을 뿌리 뽑지 않았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세계로부터" 존재자체와 현존재를 이해하지 않았다. 이들은 관계의 친교를 통해 또는 목적론(잠재태와 현상태의 변증법)에서 파악했다.
예를들어 소크라테스는 <심포지움>에서 에로스적 욕구를 통해 사랑과 영원성의 진리와 의미에 접근하는 보톰 업의 방향 즉 발생론적 존재론과 신체 상호성의 의미를 보여준다. 에로스적 인간은 세계내 존재이다. 이러한 고대 그리스 철학의 존재론은 중세철학과 신학에서 그리고 데카르트의 코기토에서 제대로 파악되지 않았다. 오히려 에로스적 인간은 니체와 프로이트에게서 파악되었다.
해체와 현존재
하이데거는 존재물음을 통해 고대 그리스 존재론과 근대의 주체 인식론을 해체했다. 그는 근대의 주체철학을 존재망각의 역사로 비판하고, 고대 그리스 존재론의 전승된 내용과 한계를 해체한다. 하이데거는 존재의 근원경험을 해석학적으로 해명하려고 했다. 해체나 철학의 파괴는 과거를 무화하거나 현재에 대한 상대화가 아니라 개별적인 철학의 경계를 설정한다. 그리고 긍정적인 의도를 통해 하이데거는 존재망각과 의미를 해석학적으로 회복했다. 이것은 가다머의 <진리와 방법>으로 이어지고 비판적으로 폴 리쾨르에게 수용되었다.
이런 점에서 하이데거 해석학의 원리는 세계에 대해 전면부정하는 영지주의 원리와는 다르지만, 하아데거의 존재망각과 존재의 던져짐은 근대성의 부정에서 여전히 영지주의에 가깝다. 존재자체가 세계의 우위에 있으며, 현존재는 존재로부터 세계안에 던저져있다. 하이데거는 존재에서 살아있는 신체의 의미와 욕구적 존재의 중요성을 망각했다 (칸트-후설).
칸트와는 달리 하이데거의 실존성은 내적시간의 카테고리로서 세계내에서 시간성의 의미를 가지며 존재의 진정한 의미를 분석한다. <존재와 시간> 61절에서 시간성은 세계내 현존재의 본래성을 특징지우며, 그것은 죽음을 향한 본래적인 염려의 존재론적인 의미를 갖는다. 실존성은 시간의 세 가지 지평 즉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 사이에 펼쳐있다.
실존론적으로 진정한 현재는 자아가 과거와 미래에 관련된 차원을 통해 상황의 현재를 지적한다. 그것은 결단의 빛에서 플레시처럼 나타나며, 기획된 미래는 주어진 과거(던져짐)에 반응한다. 세계로 떨어짐은 일상인들과 더불어 잡담과 호기심과 애매함에 빠진 비본래성과 소외를 의미한다. 던져짐은 현존재를 구성하며 진리와 비진리안에 있다 (<존재와 시간>, 38.44).
신 죽음과 허무주의
플라톤에게서 형상의 세계는 시간의 흐름 안에서 영원히 임재하며 초월해있다. 니체의 신죽음 선언에서 이러한 영원성의 상실은 현재의 몰락을 설명한다. 이데아와 이념의 세계는 사라진다. 하이데거는 니체의 신죽음 선언에서 플라톤과 유대 기독교의 종말을 보았다. 실재론에 대한 유명론의 승리가 나타난다. 이것은 니체의 허무주의와 하이데거의 실존철학의 뿌리에 놓여있다 (Gnostic Religion, 338).
진리나 선함 그리고 아름다움에서 가치가 더 이상 유지 될 수 없다면, 그것은 의지에 기초한 프로젝트에 의해 죽음의 목적과 함께 미래를 기획한다. 결단을 위한 노모스(법)는 없으며, 그것은 무에서 무로 진행되는 프로젝트가 된다.
한스 요나스의 영지주의 하이데거 해석은 하버마스와 유사점을 갖는다. 하버마스에 의하면 하이데거는 항상 존재를 존재자로부터 분리시킨다. 존재자는 존재자체로부터 버림을 받는다. 인간은 존재자체로부터 멀어지고 소외된다. 현존재는 자신의 구원에 대한 선택의 책임이 있으며 본래성과 비본래성의 양자택일에 놓여있다. 이것은 불안에 대한 실존의 염려로 나타난다 (하버마스 <현대성의 철학적 담론>, 168).
이러한 세속화된 구원의 모티브에는 영지주의 요소가 깔려있다. 영지주의 인간은 반-인간주의 태도와 우주에 대립하며 세계로 떨어졌다. 영지주의 인간에 적대적 세력은 여전히 유대 기독교 전통의 신인동형론적이다. 유대-기독교는 영지주의적 실존이해 (신적섬광의 프뉴마의 각성과 세계초월적 일자로 돌아감)에 대립한다. 세계의 실증성은 부정적인 초월의 영지주의적 세계와 질적으로 대립한다. 세계에 대한 영지주의의 적대적 태도는 현대의 자연과학과 기술진보에 냉담하다.
과학과 기술에 대한 근대의 허무주의는 영지주의 원리에 공명하며 하이데거의 계몽철학과 근대성 그리고 기술진보 비판에 맞물린다. 1935년도 하이데거는 민족사회주의 혁명이 기술의 잠재력을 새로운 기획을 위해 사용할 수 있다고 신뢰했다. 그러나 이후 하이데거는 니체를 통해 기술의 본질이 공작(Gestell)이며 파시즘이 기술 형이상학의 지배방식으로 알아차릴 수가 있었다 (ibid., 1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