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고스와 알레테이아
하이데거는 <존재와 시간> 7절 B에서 로고스 개념을 알레테이아를 통해 해명했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로고스는 다양한 의미를 갖는다; 그것은 이성, 판단, 개념, 정의, 근거 또는 관계 등으로 말해진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로고스는 어떤 것을 드러내거나 또는 어떤 것에 관한 말함(Rede)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말함의 기능과 내용을 화자나 소통하는 자들을 위해 고려한다. 진정한 말함(아포판시스)에서 소통은 말해진 내용을 명백하게 하고 상대방에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한다. 이것은 아리스토텔레스가 로고스를 해명하는 아포판시스 (드러내고 보게 하는 것)이며 로고스의 구조이다.
이러한 로고스는 구체적인 상황에서 언어의 말하는 성격을 가지며, 음성으로 나타난다. 로고스의 음성과 아포판시스에서 종합의 구조형식은 표상들의 결합이나 연결이 아니다. 그것은 어떤 것을 드러나게 하는 아포판시스의 의미를 갖는다. 이러한 진리개념은 인식론적 판단이나 범주를 통해 접근하는 것과는 다르다. 존재론적인 진리개념이 인식론적인 판단이나 일치에 선행한다.
여기서 하이데거의 탈취적 해석에서 문제가 등장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형이상학> IX. 10에서 아포판시스의 로고스가 진위를 판단하는 영역에 관련짖는다. 우시아 범주는 다른범주들(analogata)에 대해 일차적 유비(analogans)를 차지한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알레테이아/진리는 세 가지 측면에서 개념화된다.
1) 존재와 사물상태의 상응 (비례의 유비) 2) 우시아 (본질과 실존을 포함; 플라톤의 이데아/형상); 잠재태와 현실태의 변증법적 관계에서 진리 (완성으로서의 목적)에 대한 유비론적 인식론적 접근 (헤라클레이토스의 흐름과 변화의 변증법을 통합); 보톰 업 접근 3) 영원한 제일원인의 빛에서 잠재태-현실태의 매개없이 스스로 운동원인으로 드러나는 진리 (탑다운 방식) ( <Metaphysics> IX).
아리스토텔레스와는 달리 하이데거는 우시아를 인간의 관심과 이해관계 안에서 나타나는 관계들의 의미총제로 즉 실존론적으로 해석했다. 하이데거는 잠재태-현실태의 틀을 자연사물의 출현(나무가 성장하고 꽃이 피는 현상)에서 알레테이아 진리로 변형시켰다.
발생은 숨겨진 잠재태에서 드러냄이기 때문에 하이데거는 로고스의 진리개념을 아포판시스 구조를 넘어서서 존재/진리자체의 알레테이아로 변형시킨다. 진리는 존재자를 숨겨진 것에서부터 드러내며 발견한다. 로고스는 보게하는 것의 일정한 양식이기 때문에, 하이데거는 아포판시스의 상응구조에서 진리의 본래적인 장소를 말할 수없다고 한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잠재태와 현실태 사이에 변화가 존재하며 과정과 생성의 변증법이있다. 알레테이아의 드러남은 헤라클레이토스의 변증법의 과정을 거치면서 현실태로 나타나며 완성/목적이 된다. 알레테이아의 진위는 목적의 빛에서 검토되고, 목적은 정치경제 문화 전반에서 실천적 지혜(프로네시스)와 중용의 삶의 태도 그리고 경제적 정의에서 구현된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로고스는 어떤 것을 보게 하는 아포판시스로 진위를 판단하거나 우시아에 기초한 유비론적인 진리접근이다. 그러나 이것은 하이데거에 의해 거절된다. 하이데거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범주에 근거해 진리개념을 판단하고 규정하는 것을 오해로 말한다. 판단에 기초한 진리는 은폐된 것이나 참과 오류에 관련되지만, 이것으로 알레테이아의 진리를 파악할 수 없다.
그리스적인 의미에서 진리는 로고스 즉 보게하는 지각(아이스케시스--미학)보다 더 근원적이다. 지각은 색깔을 보고 발견한다. 듣는 것은 소리의 톤을 발견한다. 지각적인 차원에서 로고스는 이성이 될 수 있으며, 말함과 말해진 것의 관계에서 로고스는 근거나 이성이 된다.
그러나 하이데거에게서 진리는 근원적인 의미에서 발견하고 드러나는 것이다. 이것은 순수한 노에인으로서 지각을 관통한다. 이러한 '노에인'은 은폐할 수 없으며 잘못될 수도 없다. 하이데거는 자신의 존재론적 구조를 위해 아리스토텔레스의 세 번째 의미의 알레테이아 (제일 원인의 탑다운 방식)를 탈취하고 파르메네니데스의 이방여신의 계시/알레테이아에 습합해 진리사건으로 모자이크화한다.
하이데거의 탈취방식 (Aneignung)은 플라톤과 다르다. 풀라톤은 파르메네니데스를 이데아의 세계로 배열하고 헤라클레이토스의 변화와 생성의 변중법을 현실계에 위치 시켰다. 그런가하면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파르메니데스의 이데아를 질료와 형상의 목적론의 틀에 설정했다. 그리고 헤라클레이토스의 변증법을 잠재태-현실태- 완성/목적에서 에네르기아의 힘/욕망 (엔텔레키아)으로 개념화했다. 알레테이아가 진리가 되려면 완성/목적에 부합되어야한다.
그러나 하이데거는 자신의 존재론을 위해 파르메니데스-헤라틀레이토스의 유사점을 탈취하고 이것을 로고스(제우스)의 음성과 파라메니데스의 이방여신의 계시/알레테이아에 모자이크화했다. 이제 진리사건은 (부패한 창조의 세계로) 던져짐/열림의 현존재(또는 탈존)를 트임의 장소로 파악한다. 이방의 알려지지 않는 신이 사방세계를 통해 인간을 구원한다. 한스 요나스가 지적한 것 처럼 전형적인 그레코-영지주의 구원 신화론이 등장한다.
하이데거: 아리스토텔레스의 탈취
하이데거는 전통적인 형이상학이 존재론 (일반 형이상학)과 자연신학 (특수 형이상학)을 포함 한다고 보았다. 그리고 이것을 존재-신학(onto-theology)으로 비판했다. 하이데거는 우시아를 본질(substantia)로 해석하고 실존에 대립시킨 중세철학의 입장을 거절했다. 그러나 하이데거와는 달리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우시아는 본질과 실존을 포함한다.
하이데거는 우시아를 존재자들의 존재성 또는 존재자의 존재로 번역했다. 우시아는 지속적인 현존 또는 현존의 지속성으로 피악된다. 우시아는 공간에서 객관적으로 눈앞에 있음이 아니라 (vorhanden) 인간에게 적절하게 속하고 인간은 여기에 관여한다.
그리스적 의미에서 우시아는 파루시아(파라+우시아)에 연결되며 플라톤에게서 이것은 이데아의 임재와 연관되며, 인간은 여기에 부분적으로 참여한다. 그러나 하이데거는 특히 아리스토텔레스의 우시아를 인간존재와 세계에 연관되는 것 즉 존재론적 현상학으로 오역했다.
존재론의 차원에서 보면 아리스토텔레스의 현실태는 잠재태나 완성/목적에 대해 우위성을 갖는다. 집을 지을려면 이전의 집의 현실태가 문화적으로 있어야한다. 이것을 기초로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치 공동체와 경제의 절제와 중용 그리고 윤리적 덕목들을 상호주관적으로 그리고 실천적으로 발전시켰다.
그러나 하이데거는 존재의 본질과 근원성 그라고 진리를 사건과 열어 밝힘으로 만드는 이방 신의 계시나 로고스(제우스)음성에 경청하는 방향으로 역행한다. 하이데거는 일차적으로 자연(physis)과 알레테이아의 관계에 주목하고 자연의 출현(나무의 성장/꽃의 피어남)이 은폐에서 알레테이아(드러남)를 지적한다고 보았다.
자연은 더 이상 사물이 아니라 모든 사물을 출현하게 허락한다. 자연의 '피'-지스(전개와 출현)는 가시적으로 드러내는 '파' (현상의 '파')와 접합된다. 자연의 츌현과 전개가 알레테이아가 된다. 이것을 하이데거는 현상학적으로 은폐된 것이 인간에게 탈은폐의 드러냄으로 이해했다. 사물의 출현은 현상으로서 자기 드러냄이다.
아리스토텔레스: 인식/존재와 시간성
물론 앞서 본 것처럼 알레테이아 개념은 아리스토텔레스 <형이상학 >IX에서 중요하게 논의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론적 사유에서 잠재태에서 현실태로 진행되는 과정에서 질료(존재자)는 출현과 에네르기아를 기초로 목적의 완성(존재)을 향해 진행된다.
이러한 존재의 운동에서 완전하지 않은 것(독사)이나 결핍이 현상하며, 점차적으로 존재의 전개와 변화와 더불어 인식론적 차원에서 진리에 접근한다. 에네르기아는 선한 열망의 힘(코나투스)일 수가 있다. 불완전한 것은 완성을 향한 도상에 서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론적 사유에서 헤라클레이토스의 변화와 흐름의 변증법이 작동하며, 불완전한 것은 완성태의 진리의 빛에서 상대화가 된다. 이런 점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존재자의 출현과 운동과정 그리고 점차적인 알레테이아에서 진리에 대한 접근과 완성의 예기안에서 인식과 존재를 접합했다. 운동 가운데 있는 존재는 헤겔이나 후설의 현상학에 근접한다.
다시 말해 아리스토텔레스 시간개념은 잠재테에서 현실태 그리고 완성/목적에 이르는 여정에서 하라클레이스의 변화의 변증법을 지각과 기억을 통해 개념화했다. 지각을 통해 현재를 인식하며 기억을 통해 과거의 경험을 이끌어낸다. 기억은 과거에 듣거나 지각되고 생각한 것에 관련된다 지작의 현재와 기억의 과거에서 인간의 영혼은 미래를 예견한다 (On Memory, ch,1).
시간은 이전과 이후에서 고려해 볼 때 변화의 수를 의미한다. 우리는 이전과 이후를 지각하면서 시간에 대해 말을 한다. 변화와 시간의 관계에서 차이와 비동일성이 나타나며, 인식의 여정에서 인간은 잠재적인 형상과 차이와 비동일성을 우시아의 개념에 비추어 현실화해 나간다.
우시아는 변화의 과정에서 존재론적인 차원에서 이데아를 의미하며, 자연과 인간의 목적론적 과정에서 드러나는 알레테이티아의 차원은 고정된 것이 아니다. 그것은 변화의 차이와 비동일성의 가정을 거치며 우시아를 향해 접근한다. 존재하는 것은 잠재적이거나 현실태적이다. 그리고 변화의 과정에서 존재는 많은 지각된 의미를 갖는다 (Physics, ch.6).
아리스토텔레스의 인식과 존재 그리고 시간의 변화에서 알레테이아는 지각과 기억 그리고 미래의 예견에 따라 완성을 향해 나가는 과정에 있다. 이것은 하이데거의 존재자들을 존재로 만들어가는 이미 주어진 계시/알레테이아는 다르다 하이데거는 이리스토텔레스의 목적론적 사유에서 변화의 시간에서 드러나는 차이와 비동일성과 우시아를 향한 접근을 간파하지 못했다. 헤라클레이토스의 변화와 생성의 변증법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론적 사유에 매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존재인식론에서 존재자체는 일의적이거나 애매한 것이 아니라 유비론적으로 존재자들과 연관을 맺는다. 속성의 유비(analogy of attribution)에서 모든 다른 의미는 유비론적으로 우시아(형상)의 존재원리를 지적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하이데거의 탈취와 모자이크식 구원신화에 맞선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철학의 본분은 미지의 이방의 신의 계시의 음성을 진리로 경청하지 않는다. 철학은 나의 삶의 잠재성을 문화적인 생활세계와 더불어 실행하고 경제정의와 공공선 거버넌스 그리고 윤리적 중용과 삶의 배려를 수행하는 실천적 태도를 말한다. 진정한 존재론은 사회와 문화안에서 윤리적인 태도를 가지고 살아가는 현존재의 시간성안에 있다.
하이데거: 파르메니데스와 영지주의
<존재와 시간> 출간 10주년을 맞이 하면서 하이데거는 1937년 <존재에 관한 물음>에서 두 가지 중요한 문제를 해명했다. 존재질문은 두가지 의미를 갖는다. 첫번째 의미는 사물의 존재에 관한 질문이다. 이것은 서구철학이 관심하고 해명했다.
그러나 두번째 의미는 존재차체의 본질 (우시아)이다. 이것은 존재를 발생하게하는 본질에 대한 질문이며 하이데거의 관심에 속한다. 존재본질의 문제는 형이상학을 가능하게 한 토대에 관한 것이며, 의미현존의 근원에 관한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존재론은 형이상학적이며 목적론의 틀에서 질료의 발생과 진리에 대한 인식론적 접근 (보톰 업)을 취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알레테이아를 우시아의 범주에 유비론적으로 연결한다. 이러한 발생론적 접근은 에네르기 (또는 엔텔레키아)의 역동성을 통해 목적의 완성에 이른다. 이것은 부동의 일자인 신 즉 제일원인에 참여한다.
신은 다른 존재를 움직임으로써 탑 다운 방식으로 존재자들의 운동에 관여한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진리는 인식론적 접근과 존재의 드러남을 하이데거처럼 분리되지 않는다.
하이데거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 IX, 10>과 <니코마코스 윤리, VI>을 집중적으로 연구하고 알레테이나에서 많은 것들이 어떻게 진리에 관계되는 것을 분석했다. 진리는 많은 것들이 존재자체안에서 스스로를 드러내게 하는 것이다. 이것은 진리의 기본적인 의미를 탈은폐에서 규정한다. 진리는 스스로 드러냄이며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존재자체의 주도적 의미는 현전이다.
현상학은 탈은폐에서 스스로 드러내는 것을 현전에서 명백하게 하는 것이다. <존재와 시간>에서 하이데거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로고스의 알레테이아 (아포판시스)를 수용했다. 알레테이아는 인간의 비판적 이성 즉 로고스의 언어에서 현상한다. 그리고 알레테이아는 목적론의 틀에서 잠재태의 현실태 과정에서 진리로 현상한다. 이것은 후설의 현상학과 헤라클레이토스의 시간에 공명한다.
그러나 하이데거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 IX.10에서 인식론적 진리접근과 상관없는 존재진리의 드러냄에 주목했다. 아리스토텔레스를 넘어 하이데거는 존재의 본질를 제일원인이 아니라, 선험적으로 현존재를 세상에 내던지고 또한 열어 밝히는 영지주의 틀에서 개념화했다.
현존재는 탈존으로서 던져지고 또한 존재의 열어밝힘으로 이끌리는 사건으로 파악된다. 이런 방향에서 하이데거는 파르메니데스의 알레테이아를 유용화했다. 파르메니데스는 존재의 열어 밝힘을 그의 단편 1.29에서 "사방으로 균형잡힌 알레테이아" 다시말해 열림의 알레테이아를 언급했다.
파르메니데스의 계시
엘레아 학파의 파르메니데스는 기원전 515년 경 출생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는 스토아 학파를 창설한 제노의 선생이며 플라톤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다. 진리는 지각을 통해서 파악될 수 없다. 지각은 오류와 억견에 노출되기 때문에 오로지 로고스 (이성)만이 세계의 진리를 이해할 수 있다. 현상에 배후에 놓여있는 영원불변한 알레테이아에 대한 지식은 이성을 통해서 온다. 지각 (시각, 청각, 미각 등)은 로고스를 통해 비판적으로 판단되어야 한다.
그의 잔존하는 시들 가운데 "진리의 길" (알레테이아)은 미지의 여신으로부터 받은 계시를 담고있다. <알레테이아>는 90%가 보존되어있고, 진리는 여신의 계시 즉 드러남으로 말한다. <알레테이아>에서 젊은 사람 (파르메니데스)이 태양의 딸과 함께 전차를 타고 어둠에서 빛으로 여행을 한다. 젊은이는 미지의 여신의 신전에 도달하고, 여신은 말을 한다. 젊은이는 여신이 말한 모든 것을 배우고 진리는 공론의 환상에 의존하지 않는 것을 알게된다.
신비한 연합의 체험에서 주체와 객체의 구분은 사라진다. 생각하는 것과 존재에 대한 사유는 동일하다. 사유와 존재도 동일하다. 존재와 무는 동일하지만 동일하지가 않다. 모든 것들의 길은 뒤로 돌아가는 하나에 있다. 무는 무로부터 나오기 때문에 존재 (x)는 영원하며 과정을 통해 되어가는 존재(x)가 될 수 없다. 과정의 존재 (x)는 결코 무(not-x)가 될 수가 없다.
파르메니데스의 일자는 영원 불변하다. 만유-일자가 나에게 존재론적으로 오며, 나의 이성을 통해 이해된다. 세계는 일자이며, 영원 불변하며, 파괴되거나 나눌 수가 없다. 현상들의 움직임과 변화는 일자의 드러남에 불과하다.
그의 신화론적 시 <알레테이아> 에서 나타나는 진리 개념은 일원론적이며 전통적인 그리스의 신화론에서 찾기어렵다. 이것은 여신의 계시로부터 온 것이며, 흔들릴 수 없는 진리의 마음이며, 인간의 역견과는 다르다. 파르메니데스는 헤라클리에토스의 변화의 변증법과 초월적-내재적 로고스를 거절하고, 진리를 세계의 일자로서 알레테이아로 말한다. 진리는 로고스의 이성을 통해 판단과 일치를 통해 파악되는 것이 아니라 (아포판시스), 진리는 스스로 드러나면서 발견한다.
하이데거의 존재 신화론
파르메니데스의 <알레테이아>는 하이데거의 진리개념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그는 후기논문 <The End of Philosophy and the Task of Thinking>에서 알레테이아를 숲의 트임에 연결했다. <존재와 시간>은 이제 트임과 현전으로 등장한다. 존재는 자유롭게 열린 장소로서 숲에서 트임과 빛으로 드러난다. 이것은 존재의 열어밝힘이며 여기에 응답하는 현존재는 사방세계에서 탈-존이된다. 사방세계에서 하늘과 땅과 짐승과 식물 그리고 신들의 세계와 더불어 사는 탈존으로 현존재는 영자주의 신화에서 구원받은 존재이다. 선악도 없으며 인식론적인 판단도 없다. 윤리는 사방세계에 거주하는 것이다. 사방세계는 유대 기독교의 창조의 세계를 타락과 허무주의로 거절한다.
현존재의 da는 존재의 트임이 자유롭게 열리는 장소이다. 존재의 트임은 자연적 이성의 빛(인식)이나 신적인 빛(플라톤의 이데아)에 선행한다. 이러한 존재의 트임 안에서 존재자들은 현전한다. 존재의 트임 안에서 하이데거는 은폐와 탈은폐의 상호작용을 말한다. 그러나 플라톤은 하이데거와는 달리 자신의 이데아론에 수용하고 헤라클레이토스의 변화와 생성의 변중법을 현실세계에 적용했다.
그러나 하이데거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알레티아 진리개념을 아포판시스와 진리에 접근하는 유비론적 접근에서 탈취했다 (Aneignung). 그리고 탈취한 아리스토텔레스 개념을 헤라쿨레이토스와 파르메니데스의 알레테이아 개념에 모자이크를 시켰다. 헤라클레이토스에게 알레테이아는 내재적으로 숨겨져있음이다. 그러나 헤라클레이토스는 왜 은폐되는지 해명하지 않았다 하이데거는 헤라클레이토스 개념을 사물의 현상운동과 출현의 가장 내밀한 본질로 재구성했다. 이것은 존재사건이며, 탈존의 던져짐과 열림은 공개되지않음(Ent-eignis)과 연결된다. 이런 탈취과정과 모자이크에서 하이데거는 그리스적 사유를 영지주의 형이상학으로 변형시킨다.
파르메니데스는 알레테이아를 잘 균형잡힌 열림으로 해석했지만 열림을 가능하게 하는 것을 신의 계시로 동일시했다. 파르메니데스의 시에서 나타나는 밤의 여신의 신화는 바벨론의 태양 신과 융합된 것이다. 이것은 플라톤의 이데아의 세계와 창조자 데무르고스와는 다르다. 어둠과 태양 또는 현전과 무가 하나가 된 영지주의 신화론적 세계로부터 하이데거는 존재의 음성을 듣고 진리를 체험하려고 한다. 존재의 빛과 트임에서 자유 공간이 열리며 숲은 나무들로부터 자유롭게 된다. 이것을 하이데거는 원형현상(괴테)으로 말한다.
하이데거는 파르메니데스의 <알레테이아>의 단편 1, 28절을 인용한다.
"너는 모든 것을 배워야만 한다:
탈은폐의 떨림이 없는 마음.
그것은 둥글게 균형 잡혀있다.
그리고 죽을 수 밖에 없는 인간들의 의견에는
알레테이아를 신뢰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 (Heidegger Basic Writings, 444).
하이데거는 존재본질의 문제에대한 대답을 사건으로 파악한다. 이것은 현존재/탈존을 세계로 던져지고 또한 열어 밝힘의 영지주의 틀에서 이방의 "열려지지 않은 신" 으로 유용화한다. 존재는 존재의 열어밝힘 즉 알레테이아의 계시에서 본질과 진리를 얻는다.
존재자체는 열어밝힘에서 발생이 된다. 하이데거는 존재의 본질로 이행(형이상학의 극복)하면서 존재의 본질을 열어밝힘으로 파악한다. 또한 열어밝힘을 넘어서 존재사건 (탈존의 유용화)으로 재구성한다. 존재의 열림과 밝힘은 원현상 (괴테)이며 본래적 사태(Ur-sache)인데 이것은 열린 공간이며 사방세계이다. 하이데거의 탈취와 모자이크 방식에서 존재/알레테이아/진리는 이방의 알려지지 않은 신의 계시와 동일시된다. 존재물음은 이방 신의 형이상학으로 이행한다.
비판적 반성
하이데거의 존재 신비주의는 존재의 던져짐과 파르메니데스의 신화론적 세계에 접합해있다. 그의 명상적 사고에서 알레테이아는 존재의 트임으로 경험되며, 알레테이아에 대한 파르메니데스의 경험을 강조한다. 알레테이아 안에서 존재와 사고는 공속하며 하나로 존재한다. 인간은 존재(알레테이아)의 목자가 되며 존재의 역운을 존경하고 여기에 귀속된다. 공허한 복종의 태도가 드러난다. 행동은 존재를 사유하는데만 있다.
이미 <존재와 시간> 74절에서 개인의 운명은 공동체와 민족의 운명에 엮어진다. 존재역운은 민족의 상관관계에서 현존재의 운명을 지배하고 민족사회주의 혁명은 독일민족의 현존재에 대한 전적인 변혁으로 수용된다. 군중 개인성(현존재)은 "모든 것의 하나"라는 파르메니데스의 신화론을 재현하는 파시즘의 지도자에 복종을 한다. 파르메니데스의 알레테이아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아포판시스/알레테이와는 달리 열림과 여신의 계시로 동일시했다.
하이데거는 누가, 무엇이 알레테이아에서 본질과 사건으로 드러나는지 묻지 않는다. 알려지지않은 신의 계시에 경건한 사고의 태도를 취하는 것은 현존대ㅡ재의 역운이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는 제일원인을 통해 신의 계시를 진리로 수용하지 않았다. 인간은 지성의 관조를 통해 신의 삶에 참여하지, 현존재는 이방신의 계시를 전달하는 사제가 아니다. 또한 헤라클레이토스와 달리 자연(피지스)은 모든 존재자들의 은폐된 근원이지만.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자연은 은폐된 근거가 아니라 질료로서 특별한 사물의 영역이며 자기전개의 출현이다.
그리스어에서 알레테이아는 진리를 의미 하는가? 오히려 그것은 사물의 드러냄이며 인간의 마음에 의미로 현전한다. 알레테이아는 부정적인 의미 즉 피해가는 것 또는 은폐된 것을 동시에 포함한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열림-은폐의 과정에서 진리가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진리는 사물의 열림과 드러남에서 그리고 완성의 목적에서 본질 즉 우시아에서 파악된다. 알레테이아는 선언적인 명제와 문장에서 인식과 사물간의 상응관계를 지적하며, 옳고 그름이 나타난다 (로고스 아포판시스). 아것이 그리스적인 의미에서 알레테이아/진리의 의미이다.
이것은 하이데거의 존재론적인 진리와 다르다. 하이데거의 알레테이아는 탈존의 구조에서 나타나는 열림이며, 던져진-열린 현존재에서 알레테리아는 이방 여신의 계시와 신비로 남는다. 그러나 하이데거가 파르메니데스의 탈은폐를 진리로 규정한다면, 이것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로고스 아포판시스의 진리를 파악할 수 없다. 존재 신비주의가 존재물음과 진리의 근거가 된다. 하이데거는 알레테이아를 다신의 존재론을 위해 무분별하게 남용했다 (Making Sense of Heidegger, 78).
하이데거의 탈취와 모자이크 방식에서 은폐와 탈은폐에서 진리를 규정하는 것은 그레코-영지주의적 계시사건이다. 그의 시방세계에서 나타나는 신들의 세계는 그리스 인들의 "알려지지 않는 신"의 열림과 밝힘으로 드러나는 계시를 의미한다. 이러한 신은 하늘의 모습 속에 다시말해 에테르의 푸른 깊이 속에 감추어져있는 성스러운 영역이다. 알려지지 않는 신의 모습은 자연의 세계에서 알려지며 또한 은폐된다. 여기서 페르메니데스의 알레테이아 의 신비 계시가 있다.
그렇다면 진위를 판단하는 알레테이아 (로고스 아포판시스)나 목적론의 틀에서 진리에 접근하는 인식론적 차원은 하이데거의 존재론적 차원에 통채로 먹혀버린다. 하이데거의 존재론에서 진리개념은 존재론적인 탈은폐이며 흠없고 영원하다. 알레테이아의 여신이 탈존에게 요구되는 것은 복종이다. 이 여신은 알려지지 않는 신이다 탈존으로서 현존재는 여기에 초연하게 내맡겨야한다. 하이데거의 철학은 이방의 알려지지 않은 신을 기다리는 것이며, 오직 하나의 신만이 우리를 구원할 수 있다. 이렇한 신은 유대-기독교신을 전복하는 미지의 그레코 영지주의 신이다.
한스 요나스는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에서 영지주의 신화론이 매우 은밀히 작동하며 결국 파시즘의 존재론으로 귀결되는 운명을 보았다. 이것은 요나스가 마르부르크 대학에서 하이데거가 파시즘으로 전향하기 전 하이데거의 지도로 제출된 논문이어서 설득력을 갖는다.
요나스는 이후 하이데거가 파시즘으로 전향할때 <존재와 시간>의 영지주의가 파시즘 존재론의 배경임을 알아 채릴 수 있었다. 하이데거에게 윤리와 세계에 대한 책임성은 없다. 진리는 위대한 민족 이데올로기에 복종하는 양심이며 결단이다. 나는 양심에 맞게 결단했고 모든 실수와 오류는 뉘우침의 대상이 아니라 존재의 운명에 속한다.
하이데거의 존재 신화론은 스킬라 (영지주의)와 카립디스 (고대 그리스 신화론) 사이에서 만유일자라는 거대담론과 파시즘의 알레테이아(허무주의)에 끊임없이 노출 되어있다. 하이데거는 형이상학을 극복하기 위해 존재망각을 비판하고 나섰다. 그러나 그의 고향은 영지주의 신화론을 통해 무차별하게 근대성을 공격하면서 히틀러의 파시즘이 열어주는 자얀과 민족존재의 열어밝힘의 사방세계였다.
그러나 오늘날 알레테이아의 진리개념이나 또는 모든 것이 하나라는 신화론은 역사와 사회 안에서 변화와 갈등의 네트워크를 피해갈 수 없다. 진리는 다양한 삶의 형식과 영역에서 소통과 윤리와 공공선을 추구하는 규칙과 연대에서 의미가 나타나며, 진리의미는 인식론적 절차와 존재의 참여에서 사회적으로 경험된다.
진정한 존재물음은 사회적인 삶에서 인식론적인 문제틀과 비판을 통해 어떤 의미와 해방의 진리를 추구하는가에 의존된다. 생활세계안에서 삶은 다양하게 나타나며 영주지의 총체적 일원론으로 해소되지 않는다. 그러나 하이데거의 허무주의는 여전히 인종중심주의에 사로잡힌 자들에게 사회의 분열증세로 드러난다. 존재물음은 역사 사회적 차원에서 몸을가진 현존재의 삶에서 사실주의적으로 구성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