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ublic Theology in Forum: Science, Civil Society, Life-World

카테고리 없음

아리스토텔레스 옹호와 하이데거의 미지의 신

content6462 2025. 12. 31. 00:57

아리스토텔레스: 우시아와 유비론

 

아리스토텔레스의 속성의 유비는 파르메니데스의 입장ㅡ모든 실재는 차별 없는 하나다ㅡ과는 다르다. 파르메니데스에 의하면, 보는 것과 보여진 것의 상관성은 존재와 지각과 더불어 있다. 자연(physis)은 사물의 출현과 꾾없는 현상을 의미하지만 파르메니데스의 일원론은 헤라클레이토스의 흐름과 차이와 생성의 변증법을 거절한다.

 

그것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유비론적 접근과 다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10가지 범주는 우시아에 근거하며 우시아의 변용들이며, 유비론에 관련된다. 우시아는 유미의 근거(analogans)로서 다른 9가지 범주(analogata)에 본질(이데아/형상)로서 관계한다 (Metaphysics, VI 2).

 

우시아의 틀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미완성과 완성의 존재론적 운동의 역동성을 파악하고 지성적 파악을 통해 부동의 일자(일차원인)에 관련지을 수 있었다. 이것은 모든 존재자가 열망하는 목적이며(보톰 업), 신은 탑 다운 방식으로 존재자들의 열망에 제일원인으로 관련된다. 여기서 존재론적 우위성은 아직 완성에 이르지 못한 존재자들에 대해 설정된다. 완성존재는 정치 경제적 영역에서 중용과 신중한 지혜를 실천하며 마지막에 신에 대한 관조로 참여한다.

 

하이데거는 <존재와 시간>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로고스를 아포판시스의 진술로 수용했다. 로고스의 말함은 드러나게 한다. 하이데거에 의하면 아리스토텔레스는 <형이상학> IX.10에서 알레테이아를 내적 존재론의 특질로 간주하고 인식론과 분리시켰다. 존재의 진리의 알레테이아가 인식에 앞선다. 존재의 드러남이 모든 사물의 존재에 고유한 특질이다.

 

그러나 이것은 하이데거의 (의도적인?) 오역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한 하이데거의 전형적인 탈취가 시작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 IX.10은 하이데거의 존재론의 철학에 중요한 토대를 마련해주었지만, 하이데거는 탈취과정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중요한 존재/인식론과 우시아를 향한 범주와 술어적 사유인 유비론적 접근을 사전 봉쇄했다. 하이데거는 오로지 영원한 것에 대한

참여를 진리의 알레테이아로 해석했다.

 

그러나 <형이상학>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모순율과 배중율울 통해 참과 거짓을 분명하게 정의한다. ㅡ인 것에 대해 있 지 않다고 하거나 ㅡ 이지 않은 것에 대해 이라고 하는 것은 거짓이다. ㅡ인 것에 대해 ㅡ이라고 하고, ㅡ이지 않은 것에 대해 ㅡ이지 않다고 하는 것이 참이다 (1011b25 -28). 이러한 배중율 이외에도 모든 것이 참이며 동시에 거짓이다라는 모순율(헤라클레이토스)은 상대주의에 불과하다.

 

하이데거가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에서 끄집어낸 것은 의미성이며, 진리는 의미연관체계에서 드러나는 것이다. 진리의 주제는 의미론적으로 드러나야하며 이것을 이해한 후 비로소 진위를 판단할 수 있다. 나의 현존재의 처해있음이 진위를 판단한다면 그것은 각자성에 따라 옳고 그름은 상대주의화가 될 수 있다.

 

하이데거는 특히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적 지식 (자연학, 수학, 지각적 이성, 에피스테메)를 간과한다. 에피스테메는 분리되어있고 운동하지 않는 것 즉 신적인 것을 철학적 지혜의 차원에서 다룬다 (1026 a10-15). 이러한 제일지식(에피스테메)은 신학과 동일시 된다. 이론적 지식은 다른 학문들에 비해 더 요구된다.

 

<진리의 본질에 관한> 에세이에서 하이데거는 현존재의 오류를 진리의 은폐에 연결짖고 신비로 정당화한다. 존재가 진리로 드러나는 것은 진리의 선함과 상관이 없으며 지식과 대상의 인식론적 상응과도 관계가 없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밖에 비가온다"ㅡ이 문장이 밖에 비가오는 현실을 표현한다면 상응이되고 진리가 된다. 그러나 하이데거의 존재론에서 이것은 존재적이거나 아니면 눈앞에 있음 정도로 취급될 것이다.

 

그러나 하이데거와 달리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모든 것이 의미론적 연관체계 안에 있다고 해도, 모든 것이 진리는 아니다. 의미진리가 선함과 이분화될 때 인간의 삶은 쇠창살에 포획되거나 미중유의 살해정치로 나타날 수 있다. 결핍은 폭력을 통해 존재의 완성의 도성에서 배제될 수 있다.

 

후설에게서 존재론적인 문제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IX. 10절에 연관된다. 후설의 hyle(물질)은 직관에 기초한 감각자료이다. 이것은 의미현전(노에마)으로서 지각된 대상이다. 범주적 직관 또는 본질은 의미현전으로 주어진 것을 기초로하며, 의미 존재가 주어진다.

 

후설은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상질료를 지각을 통해 의미영역으로 들어오며, 의식의 지향성은 질료를 의미현전과 더 나아가 본질직관으로 전개한다. 형상은 의미현전에서 나타나며 의식의 지향성은 의미지평을 원근법과 자기반성 그리고 생활세계와 더불어 확대된다. 현존재는 생활세계내 존재이며 의미 연관성안에 놓여있다. 후설의 현상학은 하이데거의 존재론의 배경이된다. 후설은 상호 주관적 인격의 윤리를 중요하게 고려했다(Sheehan, Making Sense of Heidegger, 63).

 

그러나 하이데거에게서 노에시스/노에마의 상관성은 별다른 의미가 없다. 후설처럼 사태자체로 되돌아간다면 거기에는 존재물음이 없다. 하이데거의 존재는 사건이며 "존재" 단어는 빗금이 쳐진다. 사건은 단어로 고정시킬 수 없다. 하이데거의 물음은 무엇이 지각된 존재를 의미현전으로 허락하고 드러내는 가하는 존재자체에 있다. 지각된 의미현전의 배후는 무엇인가?

 

이것은 존재의 기원 또는 본질에 관한 것이며, 사건으로서 현존재의 세계로 던져짐과 숲속에서 현존재의 열어밝힘의 장소 즉 탈존에서 드러난다. 현존재의 던져짐과 열린영역에서 존재자체는 은폐와 탈은폐의 사건으로 스스로를 드러낸다. 하이데거의 존재론적 현상학은 후설의 지향성이나 태도 변경과는 다르다. 사물들은 현상들이며ㅡ'피' 지스는 파(현상)이다 ㅡ이것들은 인간의 관심과 해석에 관련되어있다. 일상성의 세계에서 현존재의 자연적인 태도가 존재론적/존재적 구분을 통해 본래성과 시간성을 위해 실존 범주화가 된다.

 

이런 측면에서 하이데거는 아리스토텔레스를 현상학적 존재론적으로 재해석한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사물은 현상이며 인간의 지성(로고스)에 관련되고 의미를 갖는다. 인간의 로고스와 지성적 이해 그리고 의미부여가 없이 사물들의 존재는 여전히 숨겨지고 은폐되어있다.

 

물자체는 존재론으로 이행되고 물의 존재에대해 묻게되고 또한 존재의 기원 즉 본질을 추구한다. 존재의 본질은 플라톤에게 형상이며,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실체의 활동인 에네르기아 (또는 우시아의 완성인 엔텔레키아)로 즉 현실태로 나타난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x의 본질은 x를 x로 있게 드러내는 것이다. 그러므로 본질은 그것을 설명( logos)하는 언어적인 정의에서 파악된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형이상학은 물자체에 관한 물음이며 첫 번째 원리이며 최고의 원인자에 관계된다. 그것은 제일 에피스테메로서 신학이 된다. 그러나 하이데거의 관심은 존재를 의미있는 현존으로 파악하며, 어디에서 그리고 어떻게 사물의 의미있는 현전이 드러나는 가에 있다. 어떻게 사물의 존재는 현전 하는가? 존재의 본질과 기원은 존재자체를 드러나게 허용하는 것이며 이것은 존재를 넘어서서 사건으로 드러난다.

 

이러한 사건은 탈존의 구조이며 현존재의 던져짐/열어밝힘의 장소에서 드러내고 현전한다. 예를들어 비가오는 현실을 지각하고 나의 의식에 비의 의미를 가능하게 하는 존재론적 근거는 무엇인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상응으로서 술어적으로 표현되는ㅍ진리는 순진한 실재론에 불과해진다. 비가 내리는 것이 나의 존재와 관련되어 해석이 되고 의미부여가 될 때 존재는 사건으로 현전하고 드러난다.

 

하이데거는 <존재와 시간>에서 후설의 <이념 2> 을 알면서도 의도적으로 회피했다. 후설은 하이데거에 앞서 신체의 현존재와 지각 그리고 생활세계를 알고 있었다. 그러나 하이데거는 <이념 1>의 정적 현상학의 기술방식을 집중적으로 공격했다. 자신의 선험적 존재론을 보편적으로 정초하기 위해 하이데거는 후설과 아리스토텔레스를 탈취하고, 의식에 주어진 것을 가능하게 하는 열린영역 즉 존재의 열어밝힘으로 나간다. 존재사건이 현존재에게 열어밝힘을 준다.

 

이러한 존재사건은 진리의 알레테이아로 개념화되고, 더나아가 하이데거는 아리스토텔레스를 존재론적으로 탈취하면서, 존재사건을 파르메니데스의 모든 공간을 둘러싼 흠없는 알레테이아의 세계와 모자이크한다.

 

또한 전혀 다른 사유체계인 파르메니데스의 동요하지 않는 알레테이아가 헤라클레이토스의 은폐의 로고스에 습합된다. 헤라클레이토스의 로고스의 음성(제우스)은 파르메니데스의 알레테이아로 동일시된다. 그렇다면 미지의 신이 나에게 진리와 의미 사건으로 나타안다면 현존재는 경건한 복종의 태도를 가지며 더 이상 미지의 여신의 선함을 뮬을 수 없다.

 

파르메니데스: 탈존의 영지주의

 

<존재와 시간>에서 하이데거는 세계로 떨어짐과 본래성의 상실에서 현존재의 환상과 왜곡의 상태를 본다. 여기서 벗어나기 위해 하이데거는 파르메니데스의 진리와 존재개념에 의존했다. 진리의 여신은 파르메니데스의 신비체험을 담은 시 <알레테이아>에서 탈은폐와 은폐의 두 개의 길에서 선택을 요구한다. 하이데거의 현존재의 "던져진" 상황은 양자택일을 요구하는 염려의 구조이다.

 

현존재의 프로젝트를 위해 하이데거는 현재의 시간양식으로서 순간을 말하며 이것은 과거와 미래의 지평에서 창출된다. 과거와 미래의 두 지평의 만남을 거절하는 것은 익명의 일상인들이 잡담이나 호기심에 떨어진 변질상태를 말한다. 현존재의 진정성은 현사실성 (과거로부터의 던져짐과 죄책)과 과거의 실존적 양식과 다르다. 현재를 넘어서 앞서가면서 죽음의 무를 예견하며 염려를 하는 것은 미래의 실존적 양식이다 (Gnostic Religion, 336).

 

여기에 양심의 부름이 현존재의 염려 즉 본래성을 위해 개념화된다. 양심의 소리는 오류나 범죄를 저지른 행위에 대한 도덕적 책임성이나 희생자에 대한 죄책과는 일차적으로 상관이 없다. 양심은 존재론적인 차원에서 현존재의 일정한 존재방식이며 가장 고유한 존재 가능성이다. 이것은 양심안에서 불려진 죄책을 실존론적으로 파악하는 것이며, 이러한 해석은 염려하는 현존재와 타자와 더불어있음을 특징짖는다. 부르는 자는 비결정적이지만 양심의 부름안에서 드러내 밝혀져야 한다 (<Sein und Zeit> 58절).

 

그럼에도불구하고 하이데거는 이러한 양심의 부름과 죄책의 책임성을 그때 그때 현존재의 각자성에 맡겨버린다. 공적인 양심이나 세계양심 또는 일반적으로 구속적인 양심의 소리는 일상인들의 소리로 간주하고 저급하게 취급한다. 양심의 책임성이나 죄책이 실존론적으로 타자와 더불어 있음에서 파악되고 이해된다면 이러한 해석은 양심의 부름에 대한 반응이며 공적인 양심과 분리될 수 있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현존재(개별실체)는 자신의 각자성 이전에 양심을 가정에서 그리고 교육과 사회화 과정에서 배우며 이러한 문화적 현실태에서 도덕적이거나 윤리의 보편적 성격을 갖는다. 진정한 의미에서 책임성은 인격적인 주위세계와 더불어 살아가면서 어떤 응답을 취하고 해석하는데서 책임성과 연대감이 출현한다.

 

이러한 입장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에서 현존재는 도시국가의 공동체안에서 사는 시민이며 사회학적인 성격을 갖는다. <정치학> 4권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실제적 헌정질서와 다양한 변형들을 다루면서 정치학의 연구는 최선의 정치질서를 좋은 입법자와 시민들을 고려하면서 다룬다. 특히 1장 4절에서 정치학자는 주어진 정치잘서를 발생과 지속의 과정을 사실주의적으로 연구하고 국가일반에 관한 가장 적합한 형태의 정치질서에 관한 지식을 제공해야한다. 또한 실제로 시행 가능한 형태의 정치질서를 연구해야한다.

 

정치학의 틀에서 사회적 동물로서 현존재의 양심의 문제는 선함과 상호주관적으로 그리고 합법적인 법률과 더불어 고려된다. 이것은 하이데거의 양심의 존재론적 구성과 다르다. 하이데거는 양심문제를 존재가능성을 위해 개인의 각자성에 맡겨버리는데서 윤리적 주위세계와 중용에 기초한 윤리의 현실태를 간과해버린다. 하이데거의 현존재는 세계의 무로 던저져있으며 일상성의 세계에 (잡담, 호기심, 애매성)빠져있고, 이러한 본래성에서 벗어나기 위해 실존결단을 필요로 하는 존재이다. 이런 존재가능성이 양심에 토대가 된다.

 

하이데거는 <존재와 시간> 74절과 75절에서 현존재의 민족의 결합과 전통 그리고 세계사적 연관성에서 던져짐의 실존구조를 파시즘의 계기로 만들어간다. 현존재의 역사성은 자기기획으로서 미래를 예견하는 결단으로 특징되며, 민족과 공동체에 던져진 존재를 운명으로 받아들인다. 현존재는 던져짐의 배후로 되돌아갈 수 없으며, 진정한 현존재의 발생은 자신의 세대의 고통스런 운명과 같이하는데서 구성된다.

 

던져짐을 받아들이고 현재의 계기를 위해 미래예견적 결단을 통해 영웅들은 선택한다. 현존재가 역운으로 존재하고 역운이 현존재의 역사성을 구성한다면, 세계사적 의미는 현존재의 미래로부터 온다. 죽음앞에서 행하는 결단에서 현재는 진정한 내용을 갖는다. 죽음의 제로 그라운드로 내려가는 현존재의 결단안에 "집단적 우리"와 삶의 연관성이 출현한다.

 

하이데거 비판

 

하데거는 존재의 의미물음을 통해 서구의 형이상학 전통에서 존재망각을 날카롭게 비판했다. <존재와 시간> 44절에서 하이데거는 파르메니데스가 진리를 존재와 동일시했다고 본다. 이것은 사태자체가 아니라 (후설)존재자체를 통해 진리를 탐구하는 것이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는 이것을 진리에 관한 철학으로 개념화하고 아포판시스(소통)의 차원에서 규명했다. 철학은 진리에 대한 에피스테메(인식과 지식)가 되며, 존재자들에 대한 탐구를 말한다. 진리는 잠재태에서 현실태로 스스로를 실현화는 현존재의 완성과 목적으로 드러난다. 현존재는 선함과 좋은 삶을 지향하는 윤리적 존재이며 실천적 지혜를 갖는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론과 부동의 동자로서 제일원인은 파르메니데스와 헤라클레이토스의 하이데거적 모자이크와 습합되기 어렵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치학>에서 그리스 신화론의 신들을 거절했고, 도시국가의 삶에서 종교의 사회적 도덕적 기능을 위해 정치적으로 허용했다. 제일원인으로서 부동의 동자는 형이상학이며 신성한 학문에 속하지만 <자연학>에서 형상과 질료를 기초로 한 원인론의 틀에서 귀납적으로 추론된다. 심지어 <니코마코스 윤리> 9권 9장에서 아리스토텔레르는 자기애와 필리아를 접합시키며 자기 (선함과 이성)을 사랑하는 사람은 일차적으로 자기에게 친구가 되며 이차적으로 친구와의 관계에서 나타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신에 대한 관조의 행복한 사람 (마카리오스)은 개인주의나 사회를 도피해서 머무는 은자가 아니라 친구와 더불어 있으며 그의 존재를 기뻐하며 관조한다. 이것은 함께 사는 삶을 완성시키는 줄거움으로서 자기 사랑과 필리아가 신적인 행복의 관조에 연결된다. 이것은 인간의 사회성을 완성시키는 줄거움을 갖는다. 사랑하는 타자는 말과 생각을 나누는 또 다른 자기이다.

 

그러나 하이데거의 현존재는 정치적 동물 또는 더불어 살어가는 사회적 행복을 추구하지않고 오히려 죽음을 예견하고 세계의 무앞에 처해있는 섬뚯함 가운데 있는 염려하는 존재이다. 물론 그는 존재 가능적 존재이며 자신의 현실태를 실존적 결단을 통해 실현한다. 하이데거에 의하면 진리가 본질적인 의미에서 존재와 일치한다면, 진리현상은 기초 존재론의 문제틀과 현존재의 분석에서 다루어야 한다고 본다.

 

그러나 하이데거는 헤라클레이토스 (53 5-475)의 로고스론과 진리문제를 생성과 변화의 변증법에서 규명하지 않았다. 헤라클레이토스는 로고스를 질서와 지식의 원리를 표현하고, 그것은 신적인 합리적 지성이며 하나님의 마음으로 보았다. 모든 것이 무한한 흐름에 있고 음양의 관계처럼 변화와 대립의 역동성을 갖는다. 인간은 같은 강물에 두 번 들어갈 수 없다. 그러나 로고스는 숨겨진 조화원리로서 대립의 일치를 의미한다. 로고스의 빛에서 보면 모든 것은 하나다 (플라톤, Cratylus 402a=A6).

 

이러한 로고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로고스의 아포판시스와 다르다. 헤라클레이토스의 흐름과 변화의 세계관은 파르메니데스의 불변의 세계와도 대립한다. 후자에게서 움직임과 변화는 실제적인 것이 아니다. 실제자체는 고정되고 불변한다. 그러나 헤라클레이토스에게서 대립(전쟁/평화)의 역동적인 관계는 우주의 본성에 속한다. 전쟁에서 평화가 나오며, 평화에서 전쟁이 나온다.

 

플라톤은 이데아의 세계를 위해 파르메니데스를, 그리고 물질계를 위해 헤라이클레이토스를 수용했다. 근대철학에서 헤라클레이토스는 특히 헤겔의 논리학에서 결정적인 자리를 갖는다 (Hegel's Lectures on the History of Philosophy, 1830, 278).

 

<존재와 시간>이후 하이데거는 비로서 1944년 강연에서 헤라클레이토스의 로고스 이론을 자신의 은폐와 탈은폐의 관점에서 다루었다. 헤라클레이토스의 로고스는 우주적이며 신성하며 말씀과 음성이다. 원초적 로고스는 말하며 인간은 경청해야한다. 인간은 말과 예술에서 로고스에 응답한다. 신적 로고스에 대한 인간의 관계는 상응이 존재한다. 로고스가 갖는 인간에 대한 우위성에서 진리의 상응이 나타나며, 하이데거적인 신화론적 형이상학을 드러낸다 (Heidegger, Heraclitus: The Inception of Occidental Thinking).

 

이제 알레테이아와 인간편에서 상응이 결합된다. 그렇다면 아리스토텔레스의 아포판시스의 로고스와 유비론적 (상응) 진리접근 그리고 제일원인의 탑다운 방식으로 존재자들과 관여하는 것과 구조적인 면에서 무엇이 다른가? 알레테이아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학>에서 잠재태와 현실테에서 디나미스와 애네르기아를 통해 스스로 드러난다.

 

차이가 있다면 아리스토텔레스가 잠재태에 앞서 현실태를 존재론적 우위에 놓고 형이상학을 사실주의적으로 그리고 윤리적으로 접근하는 데 있다. 진리는 인식의 영역과 존재의 영역에서 구분된다. 진리는 선함과 분리되지 않는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신은 살아있고 선하며 영원하다. 신은 삶의 현실태이며, 삶은 신에게 속한다 (Meta- physics, XVV.7).

 

아리스토텔레스: 신의 문제

 

<형이상학 XII 6>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실체는 자연적인 것이 있으며 또한 부동하고 영원한 것이있다. 운동은 언제나 존재했으며 생성되거나 소멸되지 않는다. 시간 역시 지속적 연속으로서 생성하거나 소멸하지 않는다. 운동 특히 천계의 원운동과 시간의 영원성과 연속성에서 영원한 실체인 신을 돌출한다.

 

제일 천계를 움직이고 구성하는 제일원인은 부동의 동자이다. 제일 천계가 부동의 동자를 아름다운 것, 자체로 욕구되는 것, 사랑의 대상으로 판단한다. 이것은 신플라톤주의적 유출이나 모방과는 다르다. 플라톤의 이데아들은 영원한 실체이지만 그안에 운동의 원리를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러나 제일원인 또는 실체로서 부동의 동자는 질료를 포함하지 않지만 활동을 본질로 가져야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본질적 활동성을 영원성으로 파악하며, 그것은 질료를 포함하지 않는 순수 형상이다. 이러한 접근은 질료-형상관계를 능력과 활동의 관계로 파악하는데 상응한다. 존재자들은 제일원인을 향한 사랑의 욕구를 갖는다. 물질의 세계에는 형상이 들어와있고 생과 선함으로 채워져있다. 신에대한 지성의 관조는 신을 향한 지적 사랑이며 선한 삶을 향한 열망에 기초한다. 관조는 사유하는 대상과 접촉하고 본질을 받아들이면서 일치한다.

 

사유 (노에시스)는 부동의 동자에 접촉하고 즐거움을 향유한다. 그러나 신은 인간의 사유보다 더 좋은 상태에 있다. 삶은 신에게 속한다. 사유의 활동은 삶이며 신은 바로 본질적 활동이다. 신의 독립적 활동은 가장 선하고 영원한 삶이며 영원히 지속된다 (1072b 24-30).

 

아리스트텔레스의 형이상학은 존재론이며 경험적인 분석을 통해 보톰 업 방식으로 제일원인이자 실체인 부동의 동자에 접근한다. 신은 영원하며 천체의 공간운동에서 툳히 원운동에서 원인이 되며 필연적이며 선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사유가 자신을 사유한다면 사유의 사유를 말하는데 (<니코마코스 윤리> XII 91074b 27-35), 이 지점에서 사유의 사유는 부동의 동자로서 신이 아니라 자기 자신만을 사유한다. 이른바 나르시스적 신 개념이 돌출된다. 나는 자기 자신만을 사유할 뿐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신 개념은 아퀴나스의 신개념과 다를 수 있다. 아퀴나스의 신은 부동의 동자이지만 유출을 통한 창조주로 변형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신에 대한 난점과 당혹감은 헤겔의 <대논리학>에서도 나타난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지성이 불멸한다면 제일원인 신에 참여한다. 그러나 인간은 여전히 신에비해 인간은 질료와 형상을 가진 저급한 실체이다. 마르크스적인 의미에서 프로메테우스적인 반란은 찾아보기가 어렵다.

 

어째튼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에서 세계와 생을 긍정하는 태도가 나타나며, 세계를 데무르고스라는 저급한 신에 의한 창조된 것으로 거절하는 영지주의 신개념과는 다르다. 오히려 세계는 모든 것들이 다르지만 하나의 목적과 관련하여 함께 질서지어지고 공유한다.

 

현존재는 선함을 향한 운동과 변화 가운데 있고 스피노자적으로 선한 열망의 코나투스적 존재이다. 선함과 공공선은 죽음충동을 향한 현존재와는 다르다. 존재사건이 알레테이아로 열어밝혀질때, 진리는 목적론적 완성 즉 존재의 선함과 이분화 되지 않는다.

 

그러나 하이데거에게 현실태는 미지의 여신의 계시/알레테이아에서 오며 현존재는 복종하고 계시의 음성을 들어야 한다. 이것이 하이데거가 말하는 신적인 역운과 인간적인 역운이 만나고 상응하는 지점이다.

 

존재망각인가 아니면 선함의 망각인가

 

아리스토텔레스가 과연 존재를 망각했나? 아리스토텔레스는 신의 영웡성과 진리 그리고 선함에 대한 물음에서 진리와 선함을 이분화하 하지 않았고 물질의 세계를 영지주의자 처럼 무로 거절하지 않았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하이데거의 존재론과는 다르다. 하이데거에게서 미지의 여신의 계시에 복종하는 것이 형이상학을 극복하고 존재망각을 넘어서는 건가? 존재물음은 신체를 가진 현존재의 삶에서 그리고 역사 사회적 그리고 문화적 현실태의 배경에서 수행될 필요가 있다.

 

하이데거는 헤라클레이토스의 아포리즘을 자신의 존재론에 착상했다: "비법은 만물을 하나로 통합시켜 말할 수있도록 하라. 이것을 위해 내가 아니라 로고스의 음성을 듣는데 있다." 헤라클레이토스의 생성의 변증법과 로고스의 대립의 일치는 실종되고, 하이데거는 로고스의 발화를 파르메니데스의 고정불변의 영원의 세계에 예속시켰다. 헤라클레이토스의 로고스는 현존재를 향해 말을 하고 현존재는 복종 해야하는 관계로 변형된다.

 

로고스는 진리의 알레테이아로 드러난다. 이것이 기발한 하이데거의 탈취와 모자이크 존재론이다. 형이상학은 극복된 것 이 아니라 존재론적으로 영지주의화가 되었고, 이방여신의 섬기는 목동의 역할로 변질되었다. 그러나 헤라클레이토스의 변화의 흐름과 대립의 일치는 헤겔의 변증법에 가깝지, 하이데거의 존재론과는 다르다.

 

로고스는 세계의 질서(우주)에 편만 하지만, 동시에 초월한다. 우주자체의 영원한 움직임과 변화에도 불구하고, 신적인 마음 (로고스)은 영원히 존재한다. 여기에는 존재론적 상응관계가 아니라 사회학적으로 볼 때 대립과 통일 그리고 변화에 대한 인식론적인 통찰이 있다.

 

"나의 말이 아니라 로고스에게 경청하라." 변화와 대립의 일치를 가능하게 하는 로고스는 신(제우스)을 의미한다 (Brann, The Logos of Heraclitus). 헬라클레이토스의 로고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수사학>에서 말하는 합리적 담론이나 논증 또는 아포판시스와 다르다 (1407 b11 -18).

 

그것은 말과 음성을 넘어서 신적인 지성을 가리키며, 우주의 변화와 대립의 일치를 조화롭게 하는 숨겨진 원리로 나타난다. 대한민국의 시민은 제우스의 음성에 경청하며 살아야하는 현존재인가? 하이데거의 이방종교 제의인가? 그러나 헤라클레이토스의 신적 로고스를 우주적 이성의 편만성으로 변형시킨 것은 스토아 철학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