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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데거의 자연 낭만주의와 기술비판의 한계

content6462 2025. 12. 31. 00:53

하이데거와 근대과학기술

 

하이데거는 <존재와 시간>에서 인간현존재와 자연의 생을 급진적으로 분리시켰다. 자연의 생에는 선 자체가 없다. 하이데거는 양심의 침묵의 소리를 듣는 것이 존재의 무 앞에서 진정성을 의미한다 히틀러의 부름 앞에서 독일 현존재의 양심은 거절을 한 것이 아니라 존재의 목소리에 복종했다.주객도식의 극복은 파시즘으로 막을 내렸다.

 

하이데거에게서 윤리와 책임성은 존재들의 충만함에서 탈각된다. 인간은 존재의 목자로 고양되지만, 형제를 지키는 자는 아니다. 가인은 아벨을 살해하고 하나님앞에서 자기가 동생을 지키는 자가 아니라고 변명했다. 하이데거를 향환한성서의 고발이다

 

후기에 들어서 하이데거는 과학을 기술정도로 폄하한다. 1976년 하이데거가 죽기 2주 전 시카고에 소재한 DePaul 대학에서 하이데거 컨퍼런스가 열렸다. 하이데거가 보낸 축하 편지에서 그는 근대 자연과학은 근대기술의 토대이며 기술적 사고의 기본형식으로 말한다. 이것은 형이상학의 완성이다. 형이상학은 허무주의로 귀결이 된다. 과학기술에 대한 비판은 하이데거 특유의 존재물음에서 수행된다.

 

하아데거에게서 기술의 의미는 고대 그리스적인 예술에서만 정당성을 가지며, 이것은 자연적인 스스로 드러냄이며 포이에시스이다. 알레테이아는 근대 과학에 적용되지 않는다. 그러나 하이데거가 영지주의적 근대성 거절을 통해 전근대의 과학과 기술로 부터 근대과학을 이분화하는 시도는 상당한 비판을 당한다. 이미 고대 그리스에서 노예들을 통해 많은 건축과 기계들이 만들어졌고 상품과 해외교역은 상당한 정도로 이루어져 있었다. 근대 과학기술과 다를 바가 없다.

 

하이데거의 존재물음과 알레테이아는 아리스토텔레스적인 것을 탈취하고 페르메니데스의 이방여신의 계시와 모자이크해서 하이데거가 자의적으로 변종한 것이다. 하이데거의 영지주의적 근대비판에서 중요한 툭징은 신들의 사라짐에 있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올림푸스 신들과의 소통 가운데 살았지만 이런 신들은 그리스인들이 만든 것이다. 이들은 하이데거처럼 존재진리를 알레테이아를 통해 사건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이것은 하이데거의 "사건 형이상학"이며, 그리스의 사회경제적 현실과 맞지 않는다. 고대로마에서 기술을 통해 생태학의 파괴는 상당히 심각한 것이었다.

 

하이데거가 던지는 과학과 기술의 공속성에 관한 비판적 뮬음은 사회학적으로 그리고 계보학적으로 세밀하게 검토될 필요가 있다. 마찬가지로 하아데거의 영지주의 존재론과 반 과학적 태도나 반 근대성도 또한 비판적으로 다루어질 필요가 있다.

 

한스 요나스의 비판

 

이런 점에서 한스 요나스는 <생의 현상>에서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에서 드러나는 영지주의 세계관과 허무주의 그리고 창조의 선함에 대한 거절을 문제 삼는다. 현존재의 결단주의는 무엇을 찬성하거나 거절하는 윤리적 결단이 아니라 자기해소를 하는 것이다. 허무주의 뿌리는 자연에 대한 하이데거의 무비판적인 수용에 있으며, 인간은 더 이상 창조의 거룩한 질서안에 존재하지 않는다.

 

하이데거에게서 창조의 선함은 실종되며, 현존재는 여기에 무관심하며 인간성 전반에 대한 신뢰나 지속가능한 지구의 운명에도 관심이 없다. 윤리적 공허함이 출현하며, 창조의 선함의 객관적 실재에 대한 발견이 없다. 존재는 도덕적 의무에 대한 존재론적 경험에 무관심하다.

 

하이데거의 실존론적 영지주의와 파시즘과는 달리, 진정한 개인실존은 도덕성의 우위에 있지 않다. 물론 생물학적 사실들에 대한 실존적 해석은 자연의 생안에 도덕이 있다는 자연주의적 오류를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목적론적 존재의 생의 지향성은 자연의 세계안에서 현재한다.

 

이것은 하이데거가 <존재와 시간>에서 탈각해버린 생물학적 사실들과 유기체의 삶에 대한 현상학적 복권을 의미한다. 인간 현존재뿐 만 아니라 모든 유기체는 식물과 동물과 인간의 차이애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삶을 염려한다. 가치는 생 자체에 본질적이다. 모든 살아있는 것은 생애 필요한 자유의 몫을 나눈다. 자신의 생안에서 초월의 내적지평을 열망하고 개별적인 유기체는 살아있기 위해 환경의 서식처를 만든다.

 

자연의 생에서 인간의 마음과 이성의 출현은 다른 우기체들의 생으로부터 엄청난 분열을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생명세계를 통해 미리 특징되어인 것을 정교하게 발전시키는 것이다. 인식을 통해 존재를 반성하는 능력애서 인간은 자신이 자연에 의해 불려진 것을 이해하고 자연을 지키는 자가 된다. 자기초월의 폭넓은 지평은 인간존재에 독특한 불안이나 죄책이나 좌절의 느낌을 가져온다.

 

요나스가 모든 유기체들에게 존재의 범주로 파악하는 것은 근대의 사유를 뒤집는다. 윤리의 원리는 자아의 자율성이나 공동체의 필요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라 사물들의 자연에 의해 객관적으로 할당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자연과 윤리는 분리되는 것이 아니라 접합된다.

 

이것은 내가 보기에 환경사회학에서 논의되는 사회자연성(Socionature)에 근접하며 윤리적 통찰을 제공할 수 있다. 사회자연성 개념은 인간의 사회는 환경과 더불어 존재하며 부분적으로 사회는 자연적이며. 환경 또한 부분적으로 사회적이다. 이러한 변종의 접합개념은 문화로서의 생활세계와 자연의 생의 세계를 이분화하지 않는다. 모든 유기체들은 주관적으로 가치를 경험할 수 있다.

 

이것은 죽음을 피하고 자연안에 내재하는 선함과 생을 추구하는 가치를 말한다. 선함자체가 가치의 객관적 실재로 설정되며 여기서부터 존재를 방어하는 책임적 구속성이 돌출된다. 생의 선함은 이미 존재하는 목적에 상대적으로 관련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목적을 갖는 그 능력은 선 자체을 말한다. 생을 통해 존재는 자신에게 긍정을 표현한다.

 

이것은 존재론적인 격률이며, 인간만이 존재론적 진리를 인식한다. 존재안에 있는 생의 현전은 그 부재보다 절대적이며 무한한다. 존재는 삶을 통해 자신에게 긍정을 한다--이러한 존재론적인 공리를 통해 우리는 생활세계의 온전성 (생명세계를 포함한)을 방어하는 의무를 갖는다.

 

모든 살아있는 것들의 선함자체안에서 책임성의 일차적 목적 즉 정언병법은 인간에게 있다. 진화의 과정에서 인간은 욕망과 충족의 체계변화에서 도덕적인 책임의 존재로 고양되었고 자연적인 환경을 보호한다. 우리가 자연을 가치의 근원으로 파악하지 않고 인간의 이해관계를 위해 기술조작을 위해 투사하는 단순한 대상으로 간주해서는 안된다. 자연은 기술 지배화의 대상이 아니라 인간의 삶을 위한 가치의 근원이며, 생활세계의 영역에 속한다. 요나스는 후설의 세계의 수학화 테제를 세계의 기술화로 변형시킨다.

 

요냐스는 <책임의 정언명법>에서 기술시대의 윤리를 추구하며, 자연에 대한 윤리적 책임에 존재론적인 해명을 한다. 인간은 진화의 과정에서 독특한 자리를 갖는다. 개인의 진정한 실존은 열린 미래를 향해 가치를 창출할 수 있는 자유의 능력이 있다

 

요나스에게 창조는 선한 것이며 자연의 유기체의 존재들은 죽음을 회파하고 생명을 취하는 가치가 내재한다. 유기체의 존재들의 삶에서 요나스는 자율성과 원초적인 자유의 형식을 본다. 이러한 삶을 파괴하는 기술남용은 인간의 윤리적 책임성의 중심으로 들어오며, 기술지배의 시대에 윤리는 인간과 더불어 환경의 차원으로 전개된다.

 

더 나아가 요나스의 신학은 살아있는 모든 것들을 하나님의 창조로 본다. 물론 초월적인 신에 대한 종교적 믿음애 호소하지 않고도 자연안에서 윤리적인 차원을 돌출할 수있다. 그러나 종교적인 믿음을 통해 요나스는 자연의 의미를 하나님의 창조로 심화 시킨다. 신앙와 이성은 양립한다. 하나님은 세계의 자유를 위해 자신의 창조로부터 스스로 물러났고, 세계는 위기에 둘러싸인다. 하나님의 자기제한을 통해 인간은 자유의 능력을 행사하며 하나님을 위해 손상된 세계를 고친다.

 

인간은 지식과 자유를 통해 유례없는 기술의 시대에 힘을 가지며 지구의 생과 종들을 멸절시키벼리는 악을 행할 수도 있다. 도덕적 책임성은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안에서가 아니라 하나님을 위해 피조된 존재임을 각인한다.

 

요나스의 유대신학적 접근은 하나님의 자기제한성을 아유슈비츠의 악에 직면해서 반성한다. 그리고 근대의 과학은 자연에 대한 하나님의 개입을 배제한다. 우주과학은 빅뱅을 말하며 인간의 삶은 진화의 끝자락의 과정에서 출현했다. 유대교의 삶의 선함에 대한 이해와 인간의 특별한 존엄성은 요나스의 환경윤리에 토대가 된다, 여기애는 무신론자들까지도 자연의 생을 창조의 의미로 파악하고 공동으로 환경과 자연의 생에 대한 윤리적 책임에 헌신할 수가 있다

 

요나스의 철학적 생물학은 생물학적 존재들에 대한 실존적인 해석을 시도하며, 자연의 생을 위한 윤리적 책임에 대한 존재론적인 토대를 놓는다. 그리고 이것은 포스트 홀로코스트 상황애서 유대신학을 반영한다. 그의 촐학적 생물학은 환경 사회학을 위해 중요한 통찰을 제공할 수 있다 (Jonas, The Phenomenon of Life, Foreword).

 

 

하이젠베르크: 불확정성의 원리

 

하이데거에 의하면 양자역학도 고전 물리학과 다를 바가 없다. 고전 물리학의 주객도식과 양자역학의 관계적 사유로 바뀐 것 밖에 없으며 보다 극심하게 몰아세우는 착취의 틀(Gestell)과 지배방식에 불과하다.

 

1945년 하이데거는 하이젠베르크를 처음 만났다. 1953년 <기술문제>를 다루면서 하이데거는 하이젠베르크의 양자역학을 언급하지만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의 철학적 의미를 충분히 다루지 않았다.

 

오히려 1930년대 아인슈타인-보어 논쟁을 보면서 양자세계의 입자와 파동의 불확실한 관계 또는 상보성 원리를 오류로 비판했다. 닐스 보어가 주객도식에 빠져 있다고 말한다. 닐스 보어는 칸트의 인식론에서 물자체를 알 수 없다는데 동감했고 하 이데거와는 정반대에 서 있다. 하이젠베르크의 뷸확정성의 원리도 인과율을 벗어날 수 없다고 하이데거는 비난했다.

 

1924년 하이젠베르크는 코펜하겐의 닐스 보어 연구소에서 원자의 구조를 연구했다. 1927년 하이젠베르크는 <존재와 시간>이 출간되던 해 양자역학에 대해 발표했다. 원자의 세계에서 전자의 위치/운동량은 정확하게 측정할 수가 없다. 위치가 정확하게 측정될 수록 운동량의 퍼짐은 커지게 된다. 반대로 운동량이 정확하게 측정될 수록 위치의 불확정도는 커지게 된다. 거시세계에서 움직이는 물체의 운동량은 속도와 이동거리를 가지고 정확하게 측정할 수 있다. 대포를 이용해 10 kg 포탄을 초속 300미터의 속도로 발사하면 몇분 후 어디에 떨어지는 알 수 있다,

 

고전 물리학에서 이것은 미래 예측의 결정론을 말한다. 하지만 미시세계에서 전자의 위치와 운동량은 예측 결정론을 빗나간다. 전자의 운동량을 측정하는 순간 위치가 변하기 때문에 위치를 정확히 측정하지 못한다. 또한 양자 역학에서 광자 (파동의 입자)나 또는 전자 (입자)는 파동의 특성을 보이기도 하고 입자의 특성을 보이기도 한다. 입자와 파동을 동시에 볼 수 없고, 이것은 상보성의 원리로 나타난다.

 

여기서 수학적 모델의 한계가 드러난다. 사실 하이젠베르크는 하이데거가 비판하는 고전 물리학을 넘어서 자연의 세계에서 인과율의 불가능성을 말했다. 자연의 관찰을 기초로 과학이 미래를 산출하고 예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이젠베르크는 잠재성의 개념을 돌출하고, 근대 물리학의 개연성은 자연의 세계에서 가능성의 범위를 포함하는 경향성으로 말한다. 이것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잠재태에 가까울 수 있다. 하이젠베르크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학에서 뉴톤의 결정론을 넘어서는 철학적 통찰을 배웠다.

 

파라메니데스와 헤라클레이토스

 

파라메네니데스는 새로운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보았다. 모든 것이 거기에 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의 시 알레테이아는 확고한 진리를 피력하고 이것을 이방의 여신 알레테이아에게 계시된 것으로 말했다. 그러나 헤라클레이토스는 변화와 생성의 변증법을 말한다. 새로윰이 존재한다. 영원한 진리는 없으며 존재도 변하지 않은채 거기에 있지 않다.

 

뉴톤의 물리학은 파르메니데스가 옳다고 본다. 뉴톤의 이론은 결정론적이며 시간은 가역적이다. 새로운 것은 발생하지 않는다. 세계는 기계처럼 운동법칙과 인과율에 따라 작동되고 미래는 예측가능하다.

 

철학의 영역에서 파르메네니데스는 하이데거에게 부동의 자리를 갖는다. 반면 헤라클레이토스는 로고스 진리 개념을 위해 탈취된다. 그러나 헤라클레이토스는 헤겔의 역사 변증법과 니체의 영원회귀에서 부동의 자리를 차지한다.

 

그러나 오늘날 세계의 복잡성에 대한 새로운 파라다임 변화가 일어나면서 우주는 진화한다. 다윈의 진화론이 진화하는 것이 아니라 우주가 팽창해지면서 어디론가 진행된다. 열역학 관점에서 보면 이것은 얄의 엔트로피의 증가로 인해 죽음으로 종결된다.

 

그러나 유기체의 자기조직화에서 자연의 창조성이 나타난다. 비평형의 무질서의 상태에서 자기를 조작하면서 새로운 존재가 충현한다. 이것은 소산구조를 말하는데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의미에서 디나미스와 에네르기아 그리고 환경문화의 작용인을 거처 나타나는 현실태를 말한다.

 

그러나 현실태는 변화된 고차원적 존재이며 자연의 요동과 갈라치는 바평형의 상태에서 열린환경과 더불어 창조적으로 발생된 새로운 구조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파르메네니데스와 헤라클레이토스의 논쟁을 넘어서서 유기체의 자기조직화와 자연의 창조성에서 비평형상태의 에네르기아를 드러난다. 이것은 근대물리학 이후에 새롭게 만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이다.

 

분자 생물학에서 세포의 삶은 네트워크로 서로 매개와 촉매과정을 통해 스스로를 생산한다 (오토포이에시스). 여기서 잠재태에서 현실태로 출현하는 알레테이아는 세포 유기체의 전체나 시스템에서 오토 포이에시스에서 대해재해석될 수 있다.

 

그런가하면 질서와 무질서의 가장자리에서 새로운 생의 형식이 창조적으로 출현한다. 우주의 생자체는 창조성이며 무질서의 가장자리에서 새로운 생의 창조적 발생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디나미스와 에네르기아 그리고 엔텔레키아를 새롭게 고려할 수 있다.

 

잠재태가 기능과 목적/완성을 향한 과정에서 생의 새로운 원리는 창발성으로 재구성할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존재는 다양한 방식으로 즉 잠재태와 현실태에 이르는 과정에서 우시아(본질)은 우발적으로 파악된다. 본질은 우발적 질료와 같이 진화하며 현실태는 네트워크와 패턴안에서 앙상블로 나타난다. 상호 연관성과 매개작용이 유기체의 발전에서 자연의 생의 세계를 공생과 합력으로 이끌어간다.

 

불확정성의 원리에서 미래는 알려지거나 결정되지 않으며, 예측할 수 없는 새로움에 열려있다. 시간은 반복되지 않는 역사성으로 파악되며, 세계 또한 설령 이전상태로 복귀된다 해도 반복되지 않는다. 헤라클레이토스-니체의 영원회귀와 윤회의 형이상학은 불가능하다. 잠재적인 가능성 안에서 개별적인 다른 사건들이 현실화될 수 있다.

 

우연성과 잠재성이 자연세계의 객관성을 지적하며, 이것을 하이데거처럼 주객도식의 잔재가 아니라 새로운 존재의 출현이라는 사건을 지적한다. 더 이상 파르메니데스의 신화론에서 차용한 진리와 존재사건은 불확정의 원리와 비평형성의 소산구조그리고 자기 조직화에서 픽션임이 드러난다. 존재사건을 드러나게 하는 것은 자연환경이나 문화적 또는 사회적 에피스테메 또는 생활세계와의 부단한 엮여짐에 있다 진리는 하늘에서 떨어지지 않는다.

 

자연의 생의 특징으로 나터나는 창발성, 세포의 오토포이에시스 그리고 네트워크의 사고는 하이데거의 알레테이아의 형이상학이나 사방세계와는 거리가 멀다. 세계의 삶은 비결정적이며 신들과 자연과 하나가 되어 살아가는 존재의 열어밝힘의 환상은 어렵다.

 

뉴톤 물리학의 결정성은 거시세계에서만 국한된다. 그렇다면 몰아세우는 틀로서 기술지배와 착취는 불확정성의 원리에 의해 수정되어야 한다. 양자역학에서 기술을 하이데거처럼 그리스적인 의미에서 시와 예술작품에서 찾지 않는다.

 

아리스토텔레스: 기술과 노동해방

 

인간은 과학과 기술없이 살아갈 수 없다. 자연과학과 기술의 본래적 의미는 아리스토텔레스 시대에 예술이 아니라, 인간의 삶에 유용함과 혜택을 주는 것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기계는---영국의 이른 바 산업혁명처럼--노동자의 노동을 빼앗은 것이 아니라, 노동에 유용함을 주는 방식으로 사용되었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베짜는 도구가 스스로 작업 한다면, 기술장인에게 도제나 견습공이 필요없다. 이런 제도는 주인을 위한 노예나 다를 바가 없다. 키케로 시대의 그리스 시인 안티파터는 옥수수를 가는 물레방아를 칭송했다. 물레방아는 모든 생산 기계류의 기본양식이며 여성 노예들을 해방시키고, 황금시대를 회복했다 (Marx, Capital: 1, 532).

 

하이데거가 존재론적으로 알레테이아를 언급하고 기술의 본질을 정의하는 것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실주의적 태도와 다르다. 심지어 아리스토텔레스는 경제활동을 돈의 무제한 축적을 위한 크레마티스틱 (chrematistics) 으로부터 구별짖고, 진정한 경제활동은 선한 삶을 위한 사용가치에 있다고 보았다.

 

이것은 무제한 수익창출을 위한 크레마티스틱의 부와 축적 그리고 자산탐욕과 다르다. 화폐교환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상품의 교역이 축적과 탐욕으로 진행되는 것을 간파했다. 무제한적인 상품교역과 순환이 부의 근거가 되며, 돈은 이러한 교환의 시작이며 목적이다.

 

이러한 테크네는 목적을 향한 수단으로서 무제한적인 방식으로 목적에 접근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네가지 원인론에서 중요한 것은 좋은 삶을 위한 윤리적 태도이며, 목적의 빛 (좋은 삶의 실현)에서 수단은 비판적으로 다루어진다 (Aristole, Politics, I. 3. 4.).

 

이것은 자연의 삶에도 적용된다. 과학적 한계에도 불구하고 아리스토텔레스의 환경론적 접근은 그의 생물학의 분류에 중요하다. 환경은 복합적인 작용인이며 자연의 잠재태와 현실태에서 드러나는 기능과 설계 그리고 목적을 중요하게 고려한다. 동식물의 삶은 자체상 내적인 가치를 갖는다. 유기체의 삶은 데카르트처럼 부분적인 영역으로 환원되고 인간의 지배에 놓이지 않는다. 인식과 존재는 실천적 지혜와 중용해 기초하며 자연성과 사회성의 완성을 위해 서로 합력하고 공생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관점에서 보면 기술의 본질은 공공선을 위한 유용성이며 경제질서에 관련된다. 알레티이아와 신중한 실천적 지혜 (프로네시스)는 하이데거-가다머의 전통처럼 해석학과 진리의 문제로 환원되지 않는다. 오히려 인식론적 태도와 삶을 배려하는 지혜가 알레테이아와 네 가지 원인론에 기초한 목적론과 분리되지 않는다.

 

방법은 진리와 더불어 있지, 진리가 존재론적으로 인식론적 방법을 앞서가지 않는다. 아리스토텔레스에개 문화적인 것은 인간의 삶에서 출현한 것이며, 인식과 진리는 이러한 문화의 생활세계에 관련된다. 그의 환경론적 사유는 근대의 자연과학과 가술지배적 사유에서 밀려나갔지만 양자역학에서 비판적으로 갱신될 수 있다.

 

현대 테크놀로지 문제

 

오늘날 기술문제는 자본주의와 자연과학에서 드러나는 연계를 검토하고, 경제와 자연과학을 독점하고 지배하는 국가권력의 테크놀로지를 검토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사회전반에 나타나는 문화 계층화에서 수익창출을 둘러싼 탐욕의 구조로 질서화된다.

 

기술과 자본의 결합은 생산력과 생산양식을 변혁하면서 사회를 전문화하고 분화시키면서 관료지배로 묶어버린다. 기술 합리성은 물질적 이해관계와 권력의 지배방식에 엮어진다. 기술 합리성을 가치 합리성으로 전환시키는 것은 정치 경제적 개혁을 필요로 한다.

 

마르쿠제는 <일차원적 인간> 6장에서 고대 그리스 시대의 기술이해와 근대의 기술 합리성을 연결하는 것은 인간의 지배방식에 있다고 본. 그러나 다른 한편 기술 진보는 자연을 변형하고 지배방식의 토대를 점차적으로 변경시켰다. 기계의 유용성을 통해 노예는 노동의 괴로움으로부터 해방되고, 농노는 장원제도에서 독립하여 길드를 형성하기 시작했다. 기술진보에서 객관적인 사회의 질서는 경제법이나 시장의 교역과 확대에 의존했다.

 

이러한 객관적인 사물의 질서는 지배방식의 귀결로 나타나지만 자연과 인간에 대한 착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보다 고차적인 합리성을 담고있다. 기술혜택은 보다 큰 규모로 사회전반에 나타났다. 기존의 사회에서 허위의식은 기술기재와 지배방식의 작동에서 이데올로기로 기능하며, 자연의 파괴와 인간의 삶을 억압한다.

 

변증법적 사유에서 부정적인 것은 긍정적인 것안에 있으며, 비인간적인 것은 인간화에 있으며, 노예화는 해방안에 있다. 이것은 현실세계의 역사 사회적 논리에 속한다. 모든 사물에 대한 기술적 총체성에서 여전히 합리화는 이중적 의미를 갖는다. 한편에서 자연의 파괴와 인간에 대한 착취와 지배가 있지만, 다른 한편 삶의 질의 향상이 있다.

 

기술지배의 시대에 중요한 것은 하이데거처럼 고대 그리스의 전 테크놀로지 문명을 향해 인류가 존재론적으로 돌아가야할 본향으로 이상화 하는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새로운 합리성을 세계의 수학화에 반하여 실천적으로 구축하는 것이다. 세계의 수학화에서 발생하는 진리와 선함의 분리 그리고 과학과 윤리의 이분화를 막아야한다. 과학의 주체는 윤리적이거나 미학적 또는 정치적 주체를 대신할 수 없다.

 

로고스와 에로스의 결합은 플라톤에게 이성의 우위로, 또한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신과 세계의 관계는 유비론적으로 관조를 통해 파악된다. 여기서 로고스와 에로스의 존재론적 연결은 자의적인 것이다. 이후의 발전에서 과학적 합리성은 물리학이나 화학 또는 생물학의 영역에서 가치 중립적으로 파악된다.

 

그러나 인간의 삶에서 가치들은 도덕이나 종교나 영적인 영역에서 사회를 응집하는 보다 높은 의미를 갖는다. 선함과 아름다움 그리고 평화와 정의가 존재론적 조건이나 과학의 합리적 조건에서 돌출되지 않는다면. 존재론이나 과학 합리성은 보편적 타당성을 가질 수 없다.

 

수학의 한계

 

수학의 구조에서 자연의 실재는 내재적인 목적에서 분리되며 진리는 선함에서 그리고 과학은 윤리로부터 분리된다. 자연과학은 목적론적 원인을 설명할 수 가 없다. 과학적 주체는 관찰과 측량과 산출을 하지만 윤리적이거나 미학 또는 정치적 영약에서 과학적 지배에 대한 비판적 대행자의 역할을 할 수 없다. 그러나 인간은 자연과학적 방법과는 다른 가치의 세계에서 살아간다.

 

과학적 이성은 물자체를 남김없이 과학적으로 파악할 수 없다. 마르쿠제는 하이젠베르크에 동의한다. 수학적으로 정초되는 것은 적은 부분에서 만 객관적 사실일 수 있다. 대부분은 가능성에 대한 조망이다 (Marcuse, One dimensional Man, 88).

 

수학화된 자연이 이데아적 실재 (형상)로 현상한다는 태도(피타고라스- 플라톤)는 문제로 남는다. 하이젠베르크에 의하면, 수학적으로 확인된 것은 객관적 사실에 대한 조그만 부분에 불과하다. 가능태에 대한 숙고는 보다 더 큰 부분에 속한다.

 

원자의 세계에서 사건, 관계, 투사 그리고 가능태는 주체의 관찰과 측량에 의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입자와 파장의 사건이나 관계자체의 구조에 의해서 과학적 주체에게 객관적으로 의미가 있다. 물질자체는 관찰하는 이성과는 독립적으로 즉 수학의 모델로 남김없이 사유되지 않는다. 과학적 이성이 객관적인 자연을 수학적으로 표현한다.

 

이것은 아리스토텔레스에게도 공명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의 수의 이데아론을 비판하고 이것이 헤라클레이토스의 영향으로 부터 온다고 보았다. 헤라클레이토스의 생성과 변화의 세계관에서 감각대상들은 어떤 지속성을 갖지 않는다. 모든 것이 참이고 오류일 수 있다.

 

양자역학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철학

 

양자역학에서 두 입자의 측정문제는먼 곳에 떼어놓고 실험할 때 서로 얽히며 영향을 준다. 아인슈타인의 EPR 실험과는 달리 양자의 상태에서 서로 분리된 먼 거리의 두 입자는 서로 얽어져 있다. 더 이상 뉴톤의 운동법칙은 양자 즉 질료의 세계에서 타당하지가 않다. 이것은 아인슈타인의 국소성 (locality) 원리를 부정한다. 여기에는 두 입자를 매개하는 숨은 변수(데이비드 봄)가 존재하지 않는다.

 

아리스토텔레스적으로 표현하면 질료는 형상과 얽어져 실체를 구성한다. 양자가 서로 분리되어 측정이 된다고 해도 형상은 떨어져있는 질료의 본질이된다. 질료는 본성적이 아니라 우발적으로 존재하며 결함이 없는 형상을 질료는 열망한다 (< 자연학>1. 9). 질료와 형상의 관계는 서로 분리되지 않으며. 이것은 양자의 얽힘과 측정문제에서 입증되고 벨의 부등식에서 숨은 변수이론은ㅡ뷴리된 두 입자를 매개하는 ㅡ거절된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소크라테스는 플라톤주의와 달리 보편자들을 개별자들과 분리 시키지 않았다. 개별자들에 대한 경험적 분석과 귀납적 논변과 더불어 보편적 정의가 소크라테스에게 결정적이다. 질료안에 형상이 있다. 수학과 기술은 세계를 보편화하거나 환원시킬 수가 없다. 질료과 형상의 실체에서 형상은 자연이며 주어에 속하며 우발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질료는 우발적으로 형상의 자연을 열망하며 디나미스와 에네르기아를 통해실체를 완성 시켜나간다.

 

뉴톤의 f=ma는 양자의 측정에서 형상의 자연을 향한 질료의 활동과 힘을 표현하지 못한다. 실체(종합적 총체)가 분리된 개별 질료에 상호관련왼다. 입자와 파동의 상호 보충성은 형상에 연관되며 실체를 구성한다.

 

양자역학에서 과학적 주체를 위해 의미있는 객관성은 물질의 세계에서 나타나는 관계나 투사 또는 사건이지 주체의 관찰과 측정에 있지 않다. 현대 물리학의 명제는 주체의 관찰 없이도 수학적으로 정식화될 수 있다. 주체는 자연의 세계에 일부로서 관여하지, 더 이상 수학의 방정식을 통해 양자의 세계를 객관적으로 지배할 수 없다.

 

물자체는 인간의 마음과 독립해 존재하며 수학의 공식으로 환원되지 않는다. 그것은 인간의 경험을 선결정하며 자연의 변형과 방향을 투사하며 전체를 조작한다. 인간존재는 자연의 도구성으로 이행한다. 데카르트의 인식(res cogtans)과 연장된 사물(res extensa)의 이분화는 더 이상 타당하지 않다. 오히려 현대 물리학에서 연장사물이 인간의 인식주체의 판단에 영향을 미치고 방향을 부여한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수학은 수학적 대상들을 사유안에서 인식한다. 중요한 것은 눈앞에 보이는 감각적 사각형이지 무한퇴행을 통해 그 너머에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사각형의 이데아가 아니다. 플라톤주의에 의하면 "수들은 분리되어있는 실체들이며 사물들의 원인들이다" (<형이상학> 1080a 13-14).

 

이와는 달리 아리스토텔레스는 수학은 감각적 대상들과 독립하여 존재하는 아데아가 아니라 일상적으로 관찰하는 대상들을 다룬다고 본다. 이러한 대상들을 수와 양의 관점에서 수학은 고찰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수학이 실체를 다루는 학문으로서 중요하게 고려했다. 수학과 관련된 기술 합리성 역시 목적의 선함의 빛에서 고려된다.

 

가술진보와 사회구성

 

마르크스에 의하면, 가내 수공업은 봉건제 사회를 제공하지만 중기공업은 산업사회를 출현시킨다. 사회적 생산양식은 역사적 발전단계를 의미하며 과학 기술의 진보는 사회 혁명의 추동력이 된다. 기술이 물질적 생산과 재생산의 보편적 형식이 된다. 사회적 관계의 총체를 사물화하고 상품을 물신으로 숭배하게 하는 근거는 생산관계를 합리화하고 전문화하고 법적으로 관료화하는 행정관리에 있다. 기계를 도구화하는 성격은 권력의 지배방식과 사회구성의 계층화에 근거된다. 과학적 담론과 정치적 담론 그리고 일상의 담론은 서로 분리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학혁명의 구조에서 파라다임의 변화가 일어나듯이 사회의 이행에서도 인식론적 단절과 파열이 일어난다. 사회의 이행에서 중요한 것은 정치주체로서 시민의 삶을 위한 공공선 거버넌스이며 시민사회와 생활세계를 기술지배와 관리행정 그리고 지배담론으로 부터 방어하는데 있다. 과학이 기술로 전환하는 것은 자연의 세계를 조작하고 지배하는데서 시작되지만, 가치중립성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과학의 목적은 삶과 진리 그리고 가치 합리성에 대한 봉사에 있다.

 

노동양식의 합리성과 분업이 공공선과 민주주의 방식으로 배열될 때 병리현상이 아니라 오히려 사회적 연대를 상화한다 (뒤르캠). 사회전방의 영역에서 기술혜택은 자연의 지속적인 삶과 생태계의 보호 그리고 사회정의와 밀려나간 자들의 안전망을 위해 새롭게 분배 되어야한다.

 

하이데거처럼 반근대적 자연 낭만주의나 시적인 것을 통해 근대기술의 위협을 극복하는 것은 환상일 수가 있다. 노동분업과 합리화를 통해 사회와 문명은 죽음충동이 아니라 생의 원리로 채워질 수 있다.

 

플라톤의 <심포지움)에서 인간은 에로스적 존재이지만 감정과 이성을 가진 존재이다. 삶의 의지는 단지 존재의 의지로 환원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지식과 선과 미 그리고 종교적 영역에서 소통과 인정 그리고 새로운 삶의 창조성과 변혁으로 나타난다. 에로스적 생이 문화전반에 스며들면서 사랑이 세계를 구원한다.

 

테크놀로지의 목적은 생을 긍정하는 가치를 창출하고 유전공학의 발전에서 생명의학에 분배정의를 통해 자연과 인간의 삶에 공명을 가져올 수 있다. 문제는 기술 합리성을 어떻게 콘트롤하고 자본주의 물화현상에 저항하고 공공선 거버넌스로 가져가는 하는 데 있다.

 

세계의 수학화(후설)와 생활세계의 식민지화에 저항하는 선한 삶의 열망은 다차적인 삶의 형식에서 책임적 비판과 해방의 기획으로 출현한다. 형이상학이나 인식론 또는 기술 합리성이 허무주의를 야기하지 않는다. 혜택과 분배정의와 생태계의 권리에 기초한 새로운 사회조직과 구성에서 우리는 과학기술의 사회적 콘트롤과 지배를 에로스적인 생의 원리와 자유 그리고 해방으로 가져갈 수 있다. 허무주의를 야기하는 것은 오히려 인간의 탐욕과 권력지배의 그믈망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기술지배가 물화현상을 야기한다고 해도 과학과 기술 합리성의 가치를 하이데거처럼 가치폄하 할 이유가 없다.

 

하이데거: 슈피겔 인터뷰

 

1966년 하이데거는 슈피겔 인터뷰에서 자신의 나치전력을 왜곡하고 아전 인수격으로 해석했다. 민주주의와 근대성에 대한 극한의 혐오감을 표시했다. 하이데거는 유대인 멸절정책을 공개적으로 지지발언을 하지 않았지만, 그는 홀로코스트 (쇼야)에서 자행된 살해정치에 대해 철저히 침묵했다.

 

하이데거는 기술의 진보가 인간의 삶을 황폐시킨다고 비판하지만, 인간성에 재난을 가져온 집단적 폭력과 살해정치에는 침묵했다. 그에게 인간주의에 대한 헌신은 형이상학으로 가차없이 비난된다. 윤리적 책임은 그의 존재론에 없다. 존재의 진리가 열리는 세계의 “신성화”를 위해 하이데거는 기술의 수단과 목적 그리고 기술적인 존재방식을 제거했다. 이러한 원초적인 세계에서만 오직 존재/하나님이 진리로 드러난다 (Heidegger’s interview in Spiegel, 1966, 9-23, “Only a God Can Save Us”; 인터뷰는 1976년 슈피겔에서 개재되었다).

 

하이데거는 기술문제를 다루면서 근대과학과 기술을 몰아세우는 틀로 비판하고 자연을 파괴하고 모든 것들을 유용성과 조작을 위해 사용하며 재고품이나 부픔으로 비축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것은 그리스의 본래적인 의미에서 테크노롤지와는 다르다. 근대 물리학과 수학은 자연으로 부터 기계와 전력 에네지를 뽑아내며 몰아세기 틀의 선구자가 된다 (ibid., 327).

 

하이데거는 근대과학의 극단적인 위험으부터 벗어나기위해 테크놀로지 자체가 악마적인 것이 아님을 말한다. 그것은 피할 수없는 숙명이라기보다는 필연적인 역운일 수 있으며, 오히려 그 본질은 신비한 것이며 얘술작품 특히 시적인 것에서 찾을 수 있다. "그러나 위험이 있는 곳에 구원의 힘이 있다" (횔더린).

 

하이데거는 횔더린의 구원의 힘에 주목하고 그리스적인 의미에서 테크네의 본질에서 찾는다. 비록 테크놀로지의 본질이 상당한 정도로 애매하지만, 진리는 별자리와 같다. 우리는 근대과학의 위험을 보지만, 구원의 힘의 성장을 같이 본다.

 

그리스인들은 알레테이아의 역운에서 진리와 구원의 힘을 경험했다. 이들은 예술의 테크네에서 알레테이아의 지고한 빛을 경혐했다. 예술은 신들의 임재를 조명했고, 신적인 역운과 인간의 역운의 대화를 드러냈다. 포에시스/테크네 안에서 구원의 힘은 성장하며, "시적으로 인간은 대지에 거주한다" (횔더린) (ibid., 340).

 

히이데거는 플라톤의 <파에드로스>에서 순수하게 빛나면서 드러나는 것을 말한다. 이것을 하이데거는 시적인 것이 진리를 드러내는 것으로 해석한다. 시적인 것이 모든 예술의 아름다움에 스며들며, 모든 본질적인 드러냄을 아름다움으로 채운다. 테크놀로지의 본질은 기술적이 아니라 시적이며, 신들의 세계가 출현하며 인간의 역운은 여기에 엮어진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알레테이아는 자연과 형이상학에 걸쳐 나타나며 예술이나 시에 국한되지 않는다 <형이상학>IX 8에서 현실태가 잠재태에 앞서 부각되며 영원한 부동의 동자는 질료가 없는 본질적인 활동성이며 현실태이다. 영원한 것들은 감각적안 것들에 비해 본질상 앞서있다. 영원한 것들은 예를들어 땅과 불처럼 변화에 관여되는 것 들에 의해 모방된다. 이러한 모방은 참여를 의미하며 플라톤적인 이데아의 모방보다는 ㅡ이데아는 질료와 더불어있다ㅡ영원한 것들의 임재 즉 알레테이아로 볼 수 있다. 이러한 알레테아는 진리사건로서 현실태의 선함으로서 모든 영역들에서 출현한다.

 

하이데거의 하나님은 세계의 고난에 무관심하다. 오직 존재의 진리를 신비하게 열었다가 닫는 무한한 반복의 전기 콘센트에 불과하다. 그는 그레코-영지주의 신의 사제가 되었다. 그의 존재론은 미지의 신의 도래를 위한 이방종교의 교리서이다. 이러한 교리서에는 최소한의 선함 즉 윤리는 존재의 진리와 무관하다. 결국, 글로벌 기술의 관점에서 하이데거는 근대의 농업과 식량산업을 홀로코스트의 가스방이나 집단살해와 크게 다를 바가 없다고 말한다 (Young, Heidegger, Philosphy, Nazism).

 

과연 하이데거 처럼 근대과학은 몰아세우는 틀로서 착취적이며, 이것이 근대의 농업과 식량산업과 집단 살해의 가스 방과 전혀 차이가 없는 것일까? 하루 삼십만명의 유대인을 테크놀로지 조작으로 죽인 나치의 범죄와 근대의 농업과 삭량산업이 같은 건가?

 

하이데거의 기술관의 문제는 지배계급 과학기술을 통해 자연를 지배할 때, 이것이 사회학적으로 정치권력에 연결되며 문화전반에 걸쳐 하위계층의 예속화로 이어지는 것을 해명하지 못한데 있다. 기술 합리성의 도구적 성격은 규제가 되지 않을 경우 후기 자본주의 사회안에서 파시즘의 전체주의로 귀결될 수 밖에 없다.

 

하이데거의 반과학적 태도는 칸트의 인식론의 중요성이 양자역학에서 나타나고 칸트가 인과율에 사로잡히지 않는데서 온다. 하이데거는 칸트의 지성의 표상을 자신의 알레테아아의 진리사건으로 대신했지만 양자역학에서 출현하는 칸트적 공명에 상당한 당혹감을 느꼈을 것이다.

 

하이데거의 탈취와 모자이크 방식의 해석학은 자신의 존재론적 사유에 속하지 않으면 무차별하게 일반화 시킨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존재와 인식론은 윤리에 기초하며 신중한 지혜와 실천을 부각시킨다. 기술과 기계는 고대 그리스의 도시국가의 공공선과 행복을 위해 고려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과학과 기술의 문제를 하이데거처럼 존재자체의 빛에서 묻지 않았고 오히려 사회 윤리적으로 고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