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킹혼의 기묘한 비판
폴킹혼은 양자 물리학를 기초로 화이트헤드의 형이상학을 거절하고 이중적 측면의 일원론 (dual-aspect monism)을 제시한다. 폴킹혼은 오스트리아 출신 물리학자이자 취리히 대학의 교수였던 슈뢰딩거의 파동 방정식에서 양자역학의 상보성(닐스 보어)을 확인하고 비상대적으로 파악한다. 양자가 입자와 파동으로 존재하더라도 파동함수를 통해 입자의 파동성과 움직임과 입자성을 설명할 수 있다. 파동함수는 입자의 위치와 속도에 대헤 한 가지 정보만 알아도 완벽하게 결정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폴킹혼은 닐스 보어 보다는 슈뢰딩거의 방정식을 선호한 아인슈타인 입장에 서 있다. 양자의 원리 수를 n이라고 한다면, n=1이라는 가장 낮은 단계의 에너지 상태가 존재한다. 원자가 이러한 그라운드 상태에 있을 때 이것은 더 이상 에너지를 잃지 않으며 상당한 정도의 안정상태를 갖는다.
더우기 폴킹혼은 "활동적인 정보" 이론을 신토미스트 오스틴 파러의 일차원인과 이차원인의 틀에서 개념화 하려고 한다. 파러에 의하면 하나님의 에이전트의 활동은 전능한 방식으로 피조물의 에이전트 활동 "위에, 안에서 그리고 통해서" 피조물과 경쟁하지도 않고 강요 하지도 않은 체 작용한다 이것은 토마스 아퀴나스의 협력의 유비 다시 신과 세계의 협력활동으로 볼 수 있다. 일차 원인으로서 하나님은 2차 원인으로 세계의 활동과 자유와 창조성을 방해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안 바버는 신 토미스트 입장이 하나님이 자연과 역사에서 지속적인 역할을 고려할 수 없다고 본다. 아퀴나스에 의하면 하나님은 일차원인으로서 이차원인인 세계와 자연으로부터 영향을 받지 않는다 (Religion and Science, 181).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폴킹혼은 만유재신론륵 검토한다. 세계는 어떤 의미에서 하나님안에 존재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세계를 넘어선다. 세계는 하나님의 일부가 된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세계 안에서만 초월의 능력과 활동적인 정보를 가지고 탑다운 방식으로 영향을 미친다.
그러나 폴킹혼은 이안 바버의 만유 재신론을 거절한다. 과정신학에서 하나님은 모든 사건의 파지 단계에 참여하며 그 귀결을 유리한 방향으로 설득하고 매력있게 한다. 합생의 초기단계에서 나타나는 귀결은 현실적 사건 자체안에 있다. 과정 철학은 하나님의 역할과 물리적 과정에서 만들어지는 사건의 귀결을 질적으로 구분짖는다. 하나님은 세계에 영향을 미칠 때 강요가 아니라 설득을 하며 세계의 과정을 결정하지 않는다.
폴킹혼에 의하면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의 원리는 측정될 수 있는 것에 대한 인식론적인 발견이다. 이것은 양자의 비결정성에 대한 존재론적인 담론이다. 폴킹혼은 인식론이 존재론을 모델로 한다고 주장하며, 이것을 양자역학의 비결정적인 보편해석으로 특징짖는다. 그러나 슈뢰딩거의 방정식은 폴킹혼에게 불확정성의 원리보다 더 중요하게 작동한다.
더우기 폴킹혼은 고전적 카오스 이론을 수용하고 환경의 미묘한 요동에 대한 민감성을 고려한다. 부분들의 상호작용은 패턴을 구성하는 전체원리에 의해 보충될 수 있다. 여기서 활동적인 정보개념을 돌출된다. "활동적으로" 총체원리는 실제적으로 미래의 행동을 산출한다. 이러한 행동은 정보적인 차원에서 구조에 관련된다. 그런데 과연 총체원리가 미래의 행동을 산출 하는가? 고전적인 이론에서 카오스의 행동은 닫힌 공간에서 결정된다. 뉴톤의 운동법칙이 지배하는 영역에서 카오스적 행동은 규칙에 의해 산출되며 미래는 과거에 의해 완전히 결정된다.
그러나 오늘날 비평형 열역학 이론에서 총제원리는 결정론적이 아니라 엔트로피의 증가에서 새로운 존재의 질서와 구조로 출현한다. 이것은 열린환경과 복잡성의 시스템에서 나타나는 생의 새로운 출현과 비결정성을 말한다. 여기서 카오스 시스템은 탑 다운 방식으로 나타나며 구성분들을 분석하고 짜맞춘다고 해서 (보텀 업) 이해될 수 없다
그러나 폴킹혼에 의하면 고전적인 카오스 이론의 결정론적인 입장은 진정한 물리적인 실재에 대해 밑으로 내려가는 발생적 접근을 갖는다. 구성분들은 환경과 유리된 채로 다루어질 수 있지만 여전히 의존되기 때문에 폴킹혼은 이것을 상황주의로 번역한다.
고차적인 질서개념은 구성분으로 환원되지 않고 과정에서 자율적이다. 또한 전체는 부분들의 합계보다 더 크다. 왜냐하면 전체는 부분들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위에서부터 밑으로 영향을 주는 원인 (탑 다운 방식)과 더불어 부분에서부터 전체로 영향을 주는 원인 즉 보텀 업 방식이 상황주의로 였어져있다. 그러나 닫혀진 환경에서 이러한 상황주의는 지극히 미미하게 작동된다.
그러나 폴킹혼은 탑 다운 방식에 의한 활동적 정보는 구성분들 간의 상호작용의 보톰 업 방식에 보충될 수 있다고 강조한다. 이것은 이중적 측면에서 일원론적으로 전체와 부분의 상호보충적 작용을 의미한다. 폴킹혼은 하나님 행동을 동일한 방식으로 자연과 역사에 적용한다. 폴킹혼은 양자이론의 비결정성과 존재론적 개방성을 고전적 카오스 시스템에 접합한다. 그리고 슈뢰딩거 방정식을 통해 비상대성 이론적으로 양자역학에 접근한다. 아인슈타인-슈뢰딩거의 영향이 고전적 카오스 이론에 접근하는 폴킹혼에게서 잘 나타난다.
그러나 미래의 행동은 비상대성적으로 파악되기 보다는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의 원리가 더 타당하다. 사실, 활동적 정보이론은 폴킹혼의 변종이론이다. 고전적 카오스 이론이 과연 양자역학의 비결정성에서 슈뢰딩거 방정식울 통해 착상될 수 있는 가? 하나님이 창조의 세계와의 작용을 상황주의 변종으로 해명이 될 수 있는 지 아무도 예측할 수 없다 (Polkinghorne, Scientists as Theologians, 81). 왜 폴킹혼은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을 양자역학에 도입한 폴 디랙의 양자 장론을 무시한 체 넘어가는가?
양자 장론이 간과되면서 더우기 폴킹혼의 문제는 카오스 이론을 비평형 열역학 법칙에서 고려하지 않는 데 있다. 소산구조는 탑 다운 방식으로 새로운 존재로 출현한다. 비평형 상태에서 즉 무질서의 상태에서 새로운 생은 출현하며 이것은 이전의 구성분들과는 다른 복잡성으로 나타난다. 폴킹혼의 상황주의는 유기체의 탑다운 방식과 비평형의 상태에서 생의 출현구조를 양자의 보톰 업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착각한데서 드러난다.
그런가하면 복잡성의 시스템에서 세포의 유기체에서 개별 기관들은 집단적으로 분자의 자가 촉매 과정을 통해 유기체를 위해 작용하고 존재한다. 이것은 세포의 오토포에이시스를 말한다. 생명권에서 분자들의 집단적 자가 촉매 과정을 통해 새로운 생의 창조성을 드러낸다. 자기 조직화에서 부분들은 네트워크 안에서 자율적으로 활동하지만 실제로 진화하는 것은 유기체와 환경과의 공동 진화에 있다. 이것은 폴킹혼의 양자의 활동에 기초한 보톱 업 방식으로 환원되지 않는다.
내가 언급하는 유기체의 시스템적 사고는 세포 생물학이나 비평형 열역학 이론 또는 고생물학의 캄브리아기 대폭발에서 나타나는 버기스 셰일의 화석기록에서 수 백만년에 걸친 중지와 평형상태에서 입증된다. 그리고 새로운 종의 갑작스런 출현과 다양성의 확장은 폴킹혼의 변종이론의 한계를 넘어선다. 과연 이러한 새로운 과학의 입장이 아더 피코크처럼 하나님은 우주의 경계의 조건으로만 간주 되어야 하는가? (ibid., 40). 피코크는 자유의지 변론가이며 샤르댕의 영지주의 진화론에 가깝다.
이와는 달리 비평형 열열학이나 복잡성 이론 또는 집단적 세포의 자가 촉매작용은 우주의 본질이 창조성임을 말한다. 이것은 샤르댕의 영지주의 진화론 보다는 오히려 지속적 창조와 하나님의 세계 내재성 (안식)과 주권적 자유에서 파악될 수 있다.
여전히 폴킹혼에게서 원자주의와 보텀 업 방식은 그의 비판적 합리론을 특징지으며, 아인슈타인의 한계에 머물러 있다. 화이트헤드가 원자이론을 맥스웰의 전자기파에 착상하고 모든 존재하는 것들의 관계성을 부각시킨다면, 폴킹혼은 아인슈타인-슈뢰딩거의 틀에서 하나님의 순수 정보원인과 성령의 활동을 강조하고 몰트만의 케노시스 창조론을 착상시킨다.
그러나 복잡계의 과학에서 보면 "활동적인 정보"는 유기체에 의해 부분들에게 수동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거꾸로 부분들은 유기체를 위해 그리고 유기체에 의해 존재한다. 유기체는 열린 환경과 더불어 새로운 생의 질서를 창조해나가지, 구성분의 보텀 업 방식에 의해 결정되지 않는다. 문제는 생태학적 구성 (오이코스)이 생의 문제를 드러내주고 해명한다. 여전히 양자의 세계와 새포의 분자세계 사이에 불연속성이 존재한다.
더우기 폴킹혼은 자신의 활동적 정보이론을 양자의 파장과 입자에 작용시키고 파장은 입자의 운동에 영향을 주는 주도적 역할을 한다고 말한다. 여기서 그는 에너지와 정보의 상호작용을 보기도 한다. 슈뢰딩거의 비상대성 방정식은 활동적 정보이론을 지지하는데 사용된다.
에너지-질량-정보 연결을 통해 폴킹혼은 하나님을 순수 정보원인으로 까지 해석한다. 그리고 성령의 보편적 사역의 틀에서 하나님의 케노시스를 진화의 과정에 적용한다. 하나님은 진화의 과정에서 고난에만 참여하는가? 그렇지 않다면 지성적으로 설계한 안트로피 원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폴킹혼에게서 유신론과 창조에서의 하나님의 자기 제한성 (신풀라톤주의 침줌)이 있고, 다른 한편 하나님의 지성적 마음이 세계를 안트로피 원리나 세포의 환원할 수 없는 복잡성을 설계한다. 윌리암 페일의 고전적 자연신학과 지적설계론이 여실히 드러난다. 과연 비판적 살재론은 지적 설계론을 지지하는가? 바버와 피코크는 거절한다. 그러나 폴킹혼은 지지한다. 오늘날 과학신학은 지적 설게론과 같은 형이상학과는 상관이 없다. 최첨단 과학의 연구와 성과를 통해 생의 출현이론을 이해하고 심지어 다윈의 진화론에 작별를 고 한다. 생이란 지속적인 창조와 생명의 네트워크에서 생태계를 구성하고 확장시켜나간다. 생의 복잡성과 새로운 출현 그리고 네트워크에서 드러나는 세포 활동의 오토포이에시스에서 고전적인 물리학이나 환원주의 방식은 설 자리가 없어진다.
어째튼 폴킹혼에게서 하나님은 순수한 활동적 정보의 형식에서 성령의 활동으로 나타난다. 신의 활동에서 상호작용이 부각되며 하나님의 간섭은 배제된다. 하나님은 세계를 창조를 했지만 상호작용을 하며 지배하지 않는다. 이것은 하나님의 자기 제한적인 케노시스의 활동이며, 하나님은 다른 방식으로 창조의 고난의 참여한다 (ibid., 56).
창조가 하나님의 자기 제한적인 케노시스의 활동 (몰트만)이라면, 그리고 하나님의 창조의 고난에 참여한다면, 과정철학의 양극적 유신론과 크게 다를 바가 없다. 하나님의 행위는 세계의 과정에서 우연성과 필연성의 상호작용에서 반성된다. 진화는 수 많은 맹목적인 좁은 길과 종의 소멸, 악과 고통과 소비를 포함한다. 그러나 미래는 과거나 과정 안에 포함되지 않는다 (ibid., 41, 45. 48).
폴킹혼에 의하면 하나님은 지진을 일으키며 박테리아를 증대하고 질병을 유발한다. 자연과 유기체는 본성에 맞게 진화의 과정에서 자유롭게 활동한다. 이것은 "자유로운 과정 변론"이며, 피코크의 "자유 의지의 변론"과는 다르다. 하나님은 암의 성장과 살인자의 행위 둘 다 허락한다. 자연은 조화롭게 조율된 자연 환경에서 적합하게 작동한다 (ibid., 50). 그렇다면 쇼아에서 히틀러에게 투쟁한 사람들은 악을 허락한 하나님에게 저항한 것인가? 오히려 이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기초로 급진적인 악에 투쟁하며 새로운 생의 질서를 보여준 사람둘이 아닌가? 바르트가 언급한 것처럼 창조는 선한 것이지만 여전히 그림자와 슬픔이 있다. 하나님의 안식은 생태계의 삶에 임재하며 피조물들의 삶에 동행하여 협력한다. 진화의 과정에서 드러나는 투쟁과 소멸과 오류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생을 향해 빛을 비추어주며 동행하신다. 이들의 삶은 종말의 빛에서 새하늘과 새땅안에서 회복될 것이 약속이 된다.
폴킹혼은 한편에서 모든 악을 하나님의 허락하심으로 돌린다. 다른 한편 자연의 존재들은 조화롭게 조율된 생명 환경에서 살아간다. 하나님의 권능(안트로픽 원리)과 악의 허락하심 그리고 케노시스적 고난의 연대가 폴킹혼의 활동적 정보 이론의 내용이 된다. 이것은 폴킹혼의 형이상학의 역설이라기보다는 개념적 명료함의 결여로 보인다.
인간 생명원리는 하나님의 디자인이 되며, 이제 전통적인 자연신학의 완벽한 기계공의 하나님은 우주를 생을 위해 매우 좋게 조율해 준 건축가로 나타난다 (ibid.,51). 전통적인 자연신학 (윌리엄 페일리)에 기초해 폴킹혼은 만유재신론을 종말론적인 방식으로 수용한다. 진화의 세계는 우주적 그리스도에 의해 보편적인 화해로 통전된다 (골 1.20). 그런데 성서의 보편 화해가 종말론적 만유 재신론을 지지하는 이론으로 사용될 수 있을 까? 하나님은 세계의 부분이 되고 세계 전체는 과연 하나님의 생명 안에서 새크라멘탈 차원을 갖는가? (ibid., 55).
그러나 바울은 폴킹혼과 종말론에서 여전히 다르다. "그리스도는 모든 통치와 모든 권위와 모든 권력을 퍠하시고 그 나라를 하나님 아버지께 넘겨드릴 것입니다." "...아들까지도 모든 것을 자기에게 굴복시킨 분에게 굴복하실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만유의 주님이 되실 것입니다." (고전 15: 24.28). 바울의 종말론에서 만유의 하나님은 이스라엘 하나님의 신비를 말한다. 폴킹혼처럼 만유재신론을 말하지 않는다. 그리고 피조물들은 메시야의 순종에서 이스라엘 하나님의 최종의 안식 (메누자)이 드러나는 것을 볼 것이고 이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
오늘날 공공신학에서 시도하는 과학신학은 한편에서 성서에 대한 깊은 주석과 다른 한편에서 최첨단의 자연과학의 성과를 짜집기식으로 맞추어 공명을 찾아내는 시도를 거절한다. 오히려 두 세계의 다름은 인정되고 존중된다.그럼에도불구하고 공공 신학자는 하나님의 창조행위를 그리스도의 화해의 은혜로 고백하기 때문에 하나님과 창조사이에 상관성의 유비 (analogia of correlation)가 있음을 보려고한다. 우주와 자연의 세계에는 지진과 그림자가 존재하지만 여전히 하나님의 영광을 비추어주는 무대로서 하나님을 가르키는 역할을 한다. 그렇다고 해서 이러한 유비를 지적설계론이나 창조과학이란 이름으로 자연과학의 독립성과 비판작 이성과 창조적 연구에 찬 물을 끼얹어서는 안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