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임브리지와 런던에서 수학자와 물리학자로 알려진 화이트헤드가 미국의 하버드 대학으로 옮겼을 때 그는 철학자로 새로운 삶을 살게된다. 하버드 대학에 정착한 지 1년 후 그가 행한 유명한 강연은 <과학과 근대과학, 1926>에 잘 수록 되어있다. 그리고 1927/28년 기포드 강연은 그의 저명한 <과정과 실재, 1929>이며 오늘날 여전히 영향력이있는 우주론적 형이상학에 속한다. 1933년 <이념들의 모험>은 성숙기의 입장을 보인다. 이 세권의 저술들은 인간의 경험을 통해 사물의 본질을 이해하고 설명하는 화이트헤드의 노력을 담고있다. 이 세 가지 저술들은 독립적 성격을 갖지만 상보적이다 (Adventures of Ideas, vii).
범경험주의와 원자주의
<이념들의 모험>에서 회이트헤드는 인간의 인식이나 지식은 항상 감정과 목적을 악세서리 처럼 동반한다고 말한다. 이념의 일반성에는 단계가 존재한다. 역사에 일어나는 일반성은 인종의 상황과 문명의 단계에서 결정된다. 감정적 동반은 보다 우월한 일반성에 대한 감정애서 도출된다. 민족적 감정과 우월한 문명은 서로 엮여있다. 도덕적 요인은 경험에서 돌출된다. 이것은 로마제국의 문명과 흥망사에서 볼 수 있다. 문명의 흥망사에서 나타나는 대립은 이것을 추동해나가는 질서에 내재한 아나르케 (강요)와 더불어 때때로 폭력으로 특징된다. 사유와 다른 사유를 매개하는 것은 추상적인 진리가 아니라 아름다움이먀 이것은 도적적 아름다움일 수가 있다 (ibid., 12-14, 19).
화아트헤드의 관심은 모든 살아있는 유기체들의 판사이키즘 또는 범경험주의이다. 그리고 여기에 아름다움이 배경이 된다. 아름다움이 우주의 에로스에 대한 최종적인 만족을 제공한다. 플라톤의 종교는 영원한 아름다움의 형상에 관계되며, 그의 사회학은 자연적 본성과 신들에 대한 인간의 이해와 활동에 있다 (ibid., 19).
그리고 신은 세계를 산출하는 작용원인으로 파악된다. 신은 잠재태로서 원초적(primordial) 질서의 근거이며, 잠재적 관계들을 현실태가 되기 이전에 미리 구조화한다. 또한 신은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특별한 목적을 가지며 새로움의 근거가 된다. 신은 모든 개별적인 실체들의 자기창조에 관여하며 새로움과 구조를 부여한다. 생성은 현재 존재들의 합생으로 나타난다. 양자역학의 차원에서 현실존재들은 경험의 누적들이며 복잡성과 상호 보충성이다 (Process and Reality, 18). 이런 경험들이 다함께 연장의 지속성을 구성한다. 연장이 되어가지만 과정이 연장자체가 아니다. 지속성의 과정이 있지만 과정의 지속성은 없다. 문명의 이행기에는 아나키의 영역이 존재한다 (ibid , 35).
과정의 지속성이 없다면 화이트헤드에게 과정은 정적일 수 밖에 없다. 이것은 화이트헤드의 원자주의를 지적한다. 원자주의는 범재신론과 어떻게 연결 되는가? 매개되지 않는 형이상학적 이중구조로 나타날 뿐이다. 한편에서 보톰 업의 원자주의와, 다른한편 범재신론의 양극(dipolar)관계가 있다. 화이트헤드에게서 신은 원초적-결과적 본성을 갖는다. 원초성은 세계의 가능성을 내포하며 여전히 현실태를 결여한다. 결과적 본성은 소멸하는 개체들을 포용하고 받아들이는 사랑의 완성이다. 목적원인으로서 신은 현재의 계기를 잠재성을 통해 목표로 이끌어가지만, 그 영향은 강요적이거나 결정적이지가 않다. 세계는 신에 대해 반응하고 영향을 미친다.
범재신론: 종교 자연주의
화이트헤드의 신에 대한 개념은 잠재태로서 원초적 질서의 근거라면, 아리스토텔레스의 신개념은 잠재태가 아니라 순수 활동의 현실태이다. 신은 영원하고 살아있는 존재이며 첫 번째 원인자로서 세계를 움직이고 생산한다. 그러나 신은 세계를 산출하는 제일 원인으로서 작용원인이지만 인격적인 창조주는 아니다. 왜냐하면 신은 세계와 더불어 영원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화이트헤드와는 달리 세계가 신을 창조하는 자연주의적 범재신론과 다르다. 왜냐하면 아리스토텔레스의 신은 세계에 앞서 있으며, 지성의 관조에서 스스로 드러나며 인간은 신성의 삶에 참여한다.
<종교와 과학>에서 화이트헤드는 자신의 입장을 다음처럼 요약한다:
하나님이 영원하고 세계가 유동적이라면, 세계가 영원하고 하나님이 유동적이라는 것과 같다. 하나님이 한분이고 세계가 다수라면, 마찬가지로 세계가 하나이고 하나님이 다수라는 것과 같다. 세계가 하나님안에 내재 한다면 마찬가지로 하나님도 세계안에 내재한다. 하나님이 세계를 초월한다면 마찬가지로 세계도 하나님을 초월한다. 하나님이 세계를 창조 한다면 마찬가지로 세계도 하나님을 창조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일자이며 다수로 생각된다면, 역으로 세계도 다수이며 일자로 생각될 수 있다.
여기서 화이트헤드의 신의 원초적-결과적인 본성은 세계의 원초적-결과적인 본성과 직접적으로 접합된다. 하나님의 원초적 본성은 개별적인 현실 존재와 사건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조건한다. 모든 개별존재들이 가치들의 잠재성을 실현하도록 부드럽게 설득한다. 하나님은 세계의 시인이며 부드러운 인내심을 가지고 세계로 하여금 진리와 아름다움과 선함에 대한 비전으로 안내한다( Process and Reality, 346). 하나님은 위대한 동행자이며, 세계를 이해하는 동료 고난자이다. 화이트헤드의 신의 이중본성은 오히려 플라톤의 진선미 이데아로 채색된 갈릴리 예수의 복음에 가깝다 (ibid., 343).
이것은 지배자 카이사르, 잔인한 도덕주의자,또는 부동의 동자와는 상관이 없으며 사랑에 의해 조용히 작동되는 부드러움에 근거한다. 신의 창조는 지속적인 과정이며, 창조적 과정에 참여함으로써 세계는 신에 참여한다. 이러한 참여는 세계와 인간의 불멸성이며, 인간의 진정한 운명과 위대함은 우주 안에서 신과의 공동 창조에있다. 화이트헤드는 다윈의 적자 생존 원리를 비판하고 베르그송의 창조적 진화론에 근접한다.
생의 현상학; 역동적인 원인론
창발성의 차원에서 보면,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존재는 진리와 연결되며 영원한 동자는 진리로 스스로 드러나며 인간은 여기에 상응하고 참여한다. 이러한 탑 다운 방식의 진리와 존재론은 보텀 업 방식으로 자연의 유기체의 삶에서 나타난다. 예를들어 씨앗은 잠재태로서 디나미스와 활동의 에네르기아에서 본질적 형식을 작용원인인 환경문화와 함께 열매로 현실화한다. 자연은 본질상 경이로움과 아름다움으로 채워져있고 선한 열매를 통해 존재의 진리 알레테이아를 드러낸다. 이것은 자동적인 현상이 아니라 '피'지스가 현상인 '파'로 출현할 때 존재의 힘은 열린 환경에 실천적인 작용을 통해 새로운 존재의 열매를 산출한다.
일리야 프리고진의 언어로 표현해 본다면, 유기체는 자기 조직적이며 비가역적으로 진행된다. 존재의 실현과정에서 개연성이 존재하며 비평형상태에서 새로운 질서는 열린 환경과의 실천적 활동과 작용을 통해 존재를 완성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생의 현상학은 비평형상태에서 열린 환경과의 활동적 교류와 변화에서 새로운 존재론을 지지한다.
이러한 측면은 후설의 생활세계에 생명계를 접합시킨다. 후설은 생물학에서 원초적인 생의 모습을 보았고 현상학적으로 발전시키길 원했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과제를 완수하지 못했다. 그러나 나는 아리스토텔레스를 현상학적으로 재구성하고 유기체의 자기 조직화와 자연의 창발성을 통해 그의 알레테이아 개념을 두텁게 기술한다.
자연의 생에는 스피노자의 코나투스처럼 선함을 향한 열망이 존재하고 죽음을 피하고 삶에 가치를 두는 존재들의 지향성이 있다. 이것은 잠재태에서 현실태로 나가는 역동성을 표현하는 존재들의 원초적인 자율성이나 자유로 언급할 수가 있다. 물론 이러한 자유가 폭력이나 사고를 통해 결핍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잠재태에서 현실태를 향한 길에는 자유와 생을 취하는 가치와 선함이 내재한다. 이것을 통해 자연의 생의 현상은 스스로 드러나는 알레테이아로 현상한다. 생의 현상학에서 후설은 신체상호성과 공감 윤리를 발전시키고 스피노자를 수용했다.이것은 생태학의 윤리로 전개될 수가 있다.
그러나 한스 요나스는 유대적인 배경과 존재론을 통해 책임성의 윤리를 기술문제에 적응시키고 환경파괴에 관련되는 정치와 경제 그리고 기술남용을 윤리적으로 문제삼았다. 물론 한스 요나스는 유대 신학적으로 하나님의 자기제한을 통해 존재들의 자유를 반성하고, 자유를 기초로 파괴된 환경을 고칠 것을 재한한다. 하나님의 자기제한과 피조물의 자유가 역설적으로 결합된다. 기술문제를 미래 세대와 환경의 온전함을 위하여 윤리적 책임성으로 발전시킨 것은 중요하다.
그러나 화이트헤드에게서 잠재성으로 하나님은 현실태의 결핍을 가지며 미래는 알려지지 않는다. 그의 하나님은 미래를 몰라 고민한다. 인간의 도움을 필요로 한다. 하나님이 영원히 실현되지 않은 잠재적 가능성들이라면, 인간이 하나님의 가능성과 미래를 완성한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미래의 가능성을 인간에게 준다면 인간은 하나님에게 현실태를 부여한다.
미래를 모르는 하나님이 어땋게 인간에게 미래의 가능성을 줄 수가 있을 까? 그리고 인간은 어떻게 하나님에게 현실태를 부여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신과 인간은 세계와 더불어 공동 창조자가 되어야한다. 이것은 에코 페미니스트와 과정철학이 만나는 지점이기도 하다. 그러나 한스 요나스는 하나님의 자기제한과 피조물의 자유에서 공동 창조자가 아니라, 기술의 남용으로 인해 파괴된 생태계를 회복하는 윤리적 책임성으로 나간다
화이트헤드의 과정철학에서 양자역학의 비결정성을 어떻게 해석할건가? 그리고 우주의 엔트로피의 증가와 화살의 시간으로 인해 과정의 종언은 어떻게 해명하는 가? 삶의 창발성은 끊없는 과정에서 활력주의 처럼 출현하는 가? 아니면 생태계의 문화환경에서 분자의 촉매작용을 통해 다원적인 방식으로 출현하는 가?
그의 범재신론은 생명출현의 네트워크와 시스템적 사유를 과학적 존재론으로 해명하기에 지나치게 형이상학적이다. 모두가 경험과 느낌을 갖는다면 경험과 느낌의 다름과 삶의 양식을 화이트헤드는 어떻게 구분 짖는가? 화이트헤드의 독창성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하나님을 창조한다는 범재신론적 주장에서 나는 신비감을 느끼기보다는 오히려 포이엘바하의 무신론의 지평이 열려있음을 느낀다. 인간의 경험에 기초해 신과 세계를 알 수 있다는 것이 과학의 합리성을 거절하는 지점에서 신과 세계의 공동창조라는 범신론적 만유 재신론 또는 자연신비주의로 막을 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