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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적 내러티브와 역사/신비

content6462 2026. 1. 16. 09:25

성서의 생활세계와 영지주의

 

영지주의(Gnosticism)는 일반적으로 기독교의  초기 1-2세기 동안 기독교 내부와 주변에서 나타난 다양한 분파적 교리들을 포괄하는 집합적 명칭으로 자리 잡고 있다. “영지주의”라는 이름은 그리스어로 “지식”을 뜻하는 그노시스에서 유래한다. 구원을 획득하는 수단으로서, 혹은 구원 그 자체의 형태로서 ‘지식’을 강조하고, 이 지식을 자신의 명확한 교리 속에 보유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점은 역사적으로 나타난 영지주의 운동의 수많은 분파들 사이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특징이다. 실제로 자신들을 명시적으로 “영지자들”(the Knowing ones)이라고 부른 집단은 소수에 불과했다. 그러나 이미 이레나이우스는 자신의 저서 제목에서 “그노시스”(여기에 “거짓이라 불리는”이라는 수식어를 덧붙여)라는 이름을 사용하여, 이러한 강조점과 몇 가지 다른 특징을 공유하는 모든 분파들을 포괄하였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영지주의 학파들, 분파들, 종파들, 영지주의 문헌과 가르침, 영지주의 신화와 사변, 나아가 일반적인 영지주의 종교에 대해 말할 수 있다.

 

더우기 기독교 이전 헬레니즘 이후 드러나는 그리스 철학과 동방의 종교들과의 습합주의나  알렉산드리아 유대인 전통이나 또는 유대 영지주의 전통을 고려해볼 때 영지주의의 범위는 어떤 기준을 적용하느냐에 따라 더 좁게 혹은 더 넓게 설정될 수 있다. 영지주의 연구는 1945년 이집트의 상류 나그 하마디에서 발견된 기독교 영지주의 문헌들(대표적으로 도마복음)과 더불어 1947년 쿰란 근처에서 발견된 사해사본들 (기원전 250년-70년)에서 새로운 전기를 마련한다.  

 

종교사연구에서 영지주의는 종교들의 교류와 영향 그리고 습합을 분석하는 하나의 일반적인 틀을 제공해준다. 그러나 성서 텍스트 비평사로 들어올 때 영지주의 일반원리 (한스 요나스)는 지지받기가 어려워진다. 성서 본문의 전승사와 신앙고백은 특수한 성서의 생활세계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히브리적 사유와 역사 경험적 지평

 

<창세기>는 성서학계에서 바빌론 포로기 이후에 5세기 경에 편집된 것으로 인정된다. 일부 학자들은 언어적인 고찰을 통해 550년 이전 페르시아 시기로 추정하기도 한다. 히브리적 창조와 계약의 사유는 그리스적 무질서의 사유(코라)와는 다르다. 야훼의 창조 (사 40:26-28, 45:18)는 새 창조 (65:17)와 관련되며, 제2 이사야는 바벨론 포로기의 예언자였다. 창세기에서 말씀에 의한 창조는 바벨론으로부터 그리고 바벨론 안에서 이스라엘의 해방과 자유의 빛을 비추어 준다 (Marquardt, Eia, warn wir da, 308, 316-7). 

 

한스 요나스의 분석에 위하면, 중요한 발전은, 지역 문화의 실질적 내용이 이데올로기로 전환되는 과정에 있다. 성서에서 바빌론 유폐는 유대인들로 하여금 그들의 종교 가운데 팔레스타인 특수 조건을 넘어서는 보편적 타당성을 지닌 측면을 발전시키도록 강요했다. 이들의 순수한 신앙 고백은 자신들이 던져진 세계의 다른 종교적 원리들과 대립시키도록 만들었다. 이러한 입장은 제2 이사야에서 완전히 실현된 것을 보게 되는데, 그는 야훼 숭배를 팔레스타인적 제약으로부터 벗어난, 순수한 유일신교의 원리를 세계적 과제로 선포했다. 이러한 발전과 유사한 현상은 동방의 정치적 해체 속에서도 감지되며, 혹은 이후의 역사적 전개로부터 추론될 수 있다. 예컨대 페르시아에 의해 바빌론이 함락된 후, 구(舊)바빌론 종교는 더 이상 정치적 중심에 결부되고 통치 기능과 연결된 국가 제의를 상실하게 되었다. 종교가 정치적 기능으로부터 해방된 것은, 이스라엘이 경험한 영토적 뿌리 뽑힘에 비견될 만한 변혁이었다 (Gnostic Religion, 15).

 

페르시아 제국 아래에서의 예속과 정치적 무력화라는 운명은 바빌로니아 종교로 하여금 이후로는 오직 그 영적 내용만을 기반으로 서도록 강요하였다. 더 이상 지역 권력 체계의 제도들과 연결되어 그 권위의 위신을 누리지 못하게 되자, 그 종교는 본래 내재한 신학적 성격 자체로 되돌아갈 수밖에 없었고, 다른 종교 체계들 역시 비슷하게 떠밀려 나와 인간의 정신을 두고 경쟁하는 상황에서 스스로를 유지하기 위해서 그 신학적 성격을 명확히 정식화해야 했다. 이러한 정치적 뿌리 뽑힘은 영적 실질의 해방으로 이어졌다. 우리는 여기서 후대 고대 세계의 여러 정신사적 전개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하나의 역사적 법칙이 작동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바빌로니아 종교의 경우, 이러한 추상화 경향의 성공은 헬레니즘의 밝은 조명 아래 등장한 그 후기 형태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본래의 천문적(astral) 요소가 일방적으로 발전하면서, 옛 제의는 추상적 교리, 즉 합리적으로 체계화된 점성술로 변모하였다. 이 점성술은 그 사유 내용 자체의 매력, 그리고 그리스적 형식으로 제시된 덕분에 헬레니즘 시대의 사상 세계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었다.

 

비슷한 방식으로, 고(古) 페르시아의 마즈다교(Mazdaism)는 그 토착 이란적 기반으로부터 스스로를 분리해 나갔다. 수적으로 소수였던 지배 민족에 의해 시리아에서 인도에 이르는 여러 지역으로 전파되면서, 이 종교는 이미 페르시아 제국의 종교적 다원성 한가운데에서 일종의 세계주의적 상황에 놓여 있었다. 제국의 몰락과 함께 이 종교는 그동안 누려온 정치적 후원뿐 아니라 외래 지배에 따른 혐오감까지도 잃게 되었고, 그 이후로는 페르시아 본토 밖의 여러 지역에서 다른 신앙들과 더불어 디아스포라의 부담과 이점을 함께 나누게 되었다. 여기에서도, 명확한 형이상학적 원리가 추출되었고, 그것은 보편적, 지성적 의미를 지닌 체계로 발전하였다. 즉, 신학적 이원론의 체계를 말다. 이 이원론적 교리는 그 일반화된 내용에 있어서 헬레니즘 시대의 사상적 혼합(syncretism)을 이끄는 거대한 힘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페르시아 본토에서는 파르티아 왕국과 신(新)페르시아 왕국의 연이은 건국으로 이어진 민족적 반동이 준비되고 전개되는 과정에서, 옛 민속 종교의 내용을 체계화하고 교의화하도록 강요받는 종교적 복원 운동이 동반되었다. 이 과정은 어떤 면에서는 동시대의 탈무드 형성과 유사한 점을 지닌다. 이처럼 본토와 디아스포라 모두에서 변화하는 조건들은 유사한 결과를 낳았는데, 곧 전통 종교가 합리적 교설에 가까운 신학적 체계로 변모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측면은 민족적·지역적 신앙들이 국제적 사상 교류의 요소가 될 수 있도록 재구성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이러한 과정의 일반적 방향은 교의화였는데, 이는 전통의 몸체로부터 하나의 원리를 추출하여 그것을 일관된 교리로 전개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스적 영향은 이 과정에 동기를 부여하고 논리적 도구를 제공함으로써 어디에서나 이를 성숙의 단계로 이끌었다. 그러나 앞서 보았듯이, 헬레니즘의 도래 직전 이미 동방 자체가 중요한 사례들에서 이러한 흐름이 시작하고 있었다. 유대교의 일신론, 바빌로니아의 점성술, 그리고 이란의 이원론은 동방이 헬레니즘의 형성에 기여한 세 가지 주요한 영적 힘이었으며, 이후 헬레니즘의 전개 과정에 점점 더 큰 영향을 미쳤다 (Gnostic Religion, 16-17).

 

한스 요나스의 보편 종교사의 접근은 자나치게 실존주의 해석에 기초하며, 영지주의 사상을 통합적인 영적 세계관으로 제시하고 세계에 대한 실망과 영적해방을 추구하는 것으로 부각시킨다. 그러나 성서 텍스트 비평에서 주요관심은 영지주의의 통합적 세계관이 아니라, 이와는 반대로 이스라엘의 야훼 신앙의 특수한 경험과 고백을 고대 근동의 종교 문화에 비판적으로 관여하면서 성서의 내적인 역사와 내러티브를 검토하는데 있다. 이것은 요나스가 간과하는 전승사 비평과 삶의 자리에서 새롭게 갱신되며 나타나는 신앙고백과 해석에 관심을 둔다. 창조의 기사와 욥의 내러티브에서 고대근동의 영지주의나 습합은 찿아보기가 어렵다. 

 

창조는 야훼의 구원과 해방을 증거하며, 계약은 살아계신 야훼의 말씀을 창조의 세계로 펼쳐나간다. 생명의 충만함이 해방의 말씀을 통해 창조와 계약을 화해의 복음으로 이어간다. 이것은 하나님의 근원음성(원초기호)이 바벨론의 지배체제(상징계)를 해체하는 구원행위를 말한다. 태초에 해방의 말씀 행위가 있었다. 하나님의 창조가 선한 것이지만 그곳은 완벽한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리스도안에서 하나님의 화해가 선하고 세계를 위한 보편성을 갖지만 완벽하게 끝난 것은 아니다. 여전히 미래를 향해 나간다.  

 

욥기는 포스트 바빌론과 아람어 문화의 영향을 보이며 페르시아 시대 (540-330)에 기록되었다. 욥기에서 베헤못과 리바이어던의 출현은 (40:15, 41:1-34) 인간에겐 알려질 수 없는 하나님의 창조에서 절대적 자유를 지적한다. 리바이어던은  모든 높은 자를 내려다보며 모든 교만하는 자들에게 군림하는 왕이다 (욥 41: 34). 이러한 리바이어던은 바울에게서 공중의 권세를 가진 세력, 즉 하나님이 업는 권력을 의미하기도 한다. 욥의 내러티브에서 우주론적인 프래임과 악의 현실은 창조의 현실과 하나님의 해방과 구원의 사건과 엮어져있다. 악의 문제는 하나님만이 해결하신다. 그러나 의로운 자들이 당하는 고난이 역사와 사회안에서 존재한다. 

 

엘리후의 담론 (32-37)에서 하나님의 침묵은 그분의 부정의를 드러내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더 이상 신인동형론적으로 파악되지 않고 전적타자로 이해된다. 하나님 역시 욥이 의로운 자임을 알고 있었고 사탄에게 시험을 허락했다. 그러나 욥이 의로운 자로 고통을 당하는 것이 자신의 의로움으로 고양되고,  하나님을 불의하신 분으로 비방할 때 여기에 죄의 현실이 있음을 욥기는 밝힌다.

 

욥의 죄는 도덕적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믿음과 희망을 져버린 그의 교만에 있다. 구원만이 욥의 희망을 갱신할 수 있으며, 욥의 내러티브에는 메시아 기대가 스며있다. 나의 대속자 (고엘; 19:25)는 살아계시고 그가 땅에 서실 때, 우리를 노동과 고통에서부터 자유롭게 한다. 메시야를 통한 육체의 부활은 혁명이며,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볼 것이다 (19:26), 노동으로 인해 고통당한 나의 몸은 부활을 통해 구원을 성취한다. 욥에게서 메시야는 육체의 부활의 싸인이다 (Negri, Job, 72).

 

기독교의 역사에서 육체의 부활은 플라톤의 영혼불멸성으로 대처되었다. 기독교의 구원은 몸과 물질적인 삶에서 유리된 영혼으로 축소되었다. 그러나 창세기에서 말씀으로부터 창조는 우주적인 악으로부터 해방과 구원을 포함하며, 창조는 일회적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부활에서 정점에 달한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말씀행위로서 살아있는 음성이며, 인격안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Dei loquentis in persona--칼빈). 이것은 인격적인 변화와 역사적인 경험을 담는다. 바울은 고전 15장에서 육체의 부활을 다시 소개한다.

 

히브리 성서에서 야훼의 말씀행위는 토라에 기초되며 모세의 시내산에서 하나님과의 신비한 체험을 배제하지 않는다. 모세의 인격적 체험은 이전 불타는 떨기나무에서 거룩의 체험과 연관되며, 야훼는 상징으로 해소되는 것이 아니라 앞서가는 분으로 계시된다. 그리고 이것은 출애굽이라는 역사적 사건을 동반한다.

 

틸리히가 상징은 실재에 참여한다고 말할때, 그의 존재론적 표현은 상징은 실재를 쫒아간다로 수정 되어야한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고 이스라엘 백성을 치유한 사건은 요한복음에서 예수의 십자가를 상징하는 사건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모세의 뱀의 형상은 요시아왕 시대에 제거된다. 언약궤의 상징이나 레위기의 제사문서에는 야훼에 대한 상징적 표현을 경건의 차원에서 허락된다. 그리고 예배에서 시와 찬양과 악기가 나타난다. 하나님은 창조주 하나님이며, 창조는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무대(킬빈)가 된다.

 

성령과 종말론적 봄(visio)

 

바울의 변화교리 (성령을 통해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변화)나 삼층천의 신비는 에스겔의 마카베라 신비주의 전통에 서 있다. 이것은 또한 에스겔의 묵시적 부할의 비전에 바울의 죽은 자들의 부활과 새로운 삶에 연결된다. 바울에게서 하나님의 지혜(고전 2: 5. 7)는 비밀에 감추어져 있으며, 이것은 기독교 형식의 영지와는 달리 종말론적으로 구성한다. 이것은 낡은 세계의 지배와 조건에 있고 알 수 없지만, 하나님은 영원 전부터 미래의 영광을 위해 결정했다 (고전 2: 7). 하나님의 신비의 지혜는 하나님의 심연에 기초되며 (고전 2:10), 장차 올 세계(올람 하바)에서 열리는 소피아이다. 이러한 바울의 하나님의 지혜의 신학은 흔히 오늘날 도마복음등을 통해 히브리 성서의 야훼의 창조를 제거하고 몸의 중요성을 변질시키는 영지주의와는 상관이 없다.

 

오늘날 영지주의 연구를 살펴보면 1세기 기독교 이전의 전통으로 소급하고 유대적인 영지전통과 헬레니즘적 이방의 영지주의를 확대 해나간다. 그리고 아람어로 기록된 기원후 2-3세기 만데안 자료들 (Mandaean sources; 16세기 중엽 발견), 특히 세례요한의 책은 예수가 아니라 세례요한을 예언자로 존중하고 아담으로 연결짓는다. 이러한 연구는 헬레니즘 영향권의 외부에 있던 동방 종교의 영지주의나 새로운 다른 자료들에 주목한다. 초기 만데안 종교개념들은 사해사본에서도 나타나며, 기원전 2세기부터 1세기 까지 영향을 미친 에세네 파와 연결되어있는 것을 보여주기도 한다.

 

우리가 영지의 특수동기를 일반적으로 이원론적이며 반-우주적 정신으로 파악하지 않는다면, 마니종교도 영지주의적으로 분류될 수가 있다. 만데안주의는 영혼불멸과 종말론적 믿음을 가지며, 영지주의적이지만, 유일신론에 기초하며 이란과 이락크에서 기인하는데, 계보학적으로 보면 아담에서부터 세례요한까지 이어진다.

 

그러나 영지주의가 아니라 삶의 고난에 대한 경험과 사실주의적 표현 그리고 하니님의 의로우심에 대한 깊은 이해가 욥의 내러티브를 엮는다. 이런 점에서 안토니오 네그르의 욥의 해석은 성서비평학에 중요햔 반향을 가질 수가 있다. 안토니오 네그리는 그의 욥 해석에서 하나님을 본 욥의 경험에 주목했다. 나는 주께 대하여 귀로 들었지만, 이제는 눈으로 주를 봅니다 (42:5). 나는 당신을 보았고 당신을 체험했다. 하나님을 봄은 도덕적이고나 지성적인 경험이 아니다. 욥은 하나님의 은총을 말하며 메시야를 예견하는 예언을 말한다. 이러한 종말론적인 봄에서 하나님은 말씀 사건안에서 스스로를 의로운 분으로 드러내신다. 그리고 욥은 이러한 하나님의 은총에 참여자가 된다.  이러한 욥의 구조는 바울에게도 담겨져있다. 안토니오 니그리는 그의 욥 해석에서 바울이 욥의 경험을 인용하는 것에 주목한다. 이것은 그의 신학적인 면모를 보여준다. 하나님의 지혜에 관해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 하나님은 선포(케리그마)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는 것을 기뻐하셨다 (고전 1:21). 십자가에서 고난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지혜로 해석되며, 욥의 고난에 하나님이 함께 하셨다. 

 

네그리의 욥의 해석

 

네그리의 해석에서 중요한 것은 르네 지르드의 욥의 해석 즉 속죄양이론에 대한 비판에 있다. 르네 지라드의 사회 심리학적 해석은 히브리적 사유의 속죄양의 전통에서 욥의 성공을 모방하고 결국 시기한 군중들에 의해 고난을 당한 것으로 본다. 그러나 네그리가 보기에 지라드는 메시야적 존재론을 피해간다. 오히려 욥이 세 친구들은 율법학자들이고 욥을 심의하려고 찾아왔다. 이것은 하나님의 의로움을 위해 열린 욥의 재판과정을 의미할 수 있다. 하나님의 분배정의 교리가 나타나고, 하나님은 업적에 따라 처벌과 보상을 하며 의로운 자를 처벌하지 않으신다 (욥 4:7-11). 이것은 업적에 입각한 신인동형론적인 의인론이다 (Negri, Job, 30-1).    

 

네그리에 의하면 사회주의는 경제의 분배정의와 인간의 행동과 사회적 보상을 위한 옹호이지만, 욥은 이러한 사회주의를 구현하는 구소련의 스타카노프의 유형을 넘어선다. 두번째 친구 빌다의 구원론 (욥 8:1-7)은 하나님의 은총에만 근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초월적 은혜와 인간의 행동에 의해 매개되며 신인동형론적 성격을 갖는다. 그리스적 개념 Deus ex machina (기계장치와 같은 하나님)에서 의로운 하나님의 개입이 항상 요구되며 인간의 정의를 진실하게 만든다 (ibid., 36, 39). 욥의 세번째 친구 소발은 (11:4-16) 하나님을 향한 순종과 헌신과 찬미라는 신비주의 담론을 부각시킨다. 그러나 이것은 종교를 권력과 부의 도구로 변형시킨다. 

 

네그리는 욥의 대속자 (고엘,19:25)에 주목한다. 이것은 야훼의 심판의 날의 가능성 즉 종말론적 야훼의 복수를 넘어선다. 욥은 지옥의 심연에서 즉 육체의 외부에서 살아계신 하나님을 고통과 믿음안에서 볼 것이다. 이것은 노동의 착취에서 육체의 부활을 지적한다 (Negri, Job, 47).

 

바울과 하나님의 신비

 

바울에게서 예수의 십자가는 단지 역사적 사건이 아니라 종말론적 사건이며 하나님의 봄으로 표현된다 (고전 13:12). 이것은 모세의 경험에서도 나타나며 (출 33:20), 모세는 입을 맞대고 하나님과 대화를 하고 하나님의 얼굴을 보았다 (민 12:8). 하나남과의 대화에서 하나님에 대한 봄이 나타난다. 바울에게서 성령의 능력은 시작이되며 주님은 영이시다. 주님의 영이 있는 곳에 자유가 있다. 이것은 현재에서 일어나는 종말론적인 사건이다. 우리는 주님의 영광으로 변해갈 것이다 (고후 3: 17ㅡ18).

 

프리델 마르크바르트에 의하면 이러한 변화의 교리는 현재적 종말론과 미래적 종말론이 포개져 있음을 말한다. 성서적 종말론의 두 가지 형식은 서로 분리되지 않는다 (Eine Eschatologie III: 424; 492). 이러한 현재화된 종말론적 체험은 인격적이며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그리스도가 나타나실 때 그를 참 모습대로 보기 때문에 그와 같이 될 것이다 (요일 3:2). 마음이 깨끗한 사람은 복이있다. 그가 하나님을 볼 것이다 (마태 5:8).

 

이러한 인식론적 조건은 하나님이 주시는 미래의 은총의 선물이다. 인식론적인 종말의 차원에서 하나님은 하나님을 통해서 알려진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히브리어의 야다이며, 이것은 성적인 의미와 역사적이며 영적인 차원을 갖는다. 믿음은 야훼에 대한 지식과 같이 있으며 (호 6:3) 맏음안에 종말론적인 봄은 인간존재의 신성화가 아니라 인식론적 차원을 부각한다 (고전 13:22).

 

이러한 바울의 입장은 영지주의에서 강조되는 하나님의 지혜와는 다르다. 영지주의에서 “지식(knowledge)”은 단순히 어떤 사물들에 대한 이론적 정보가 아니라, 인간 존재의 조건을 변형시키며 구원(salvation)을 실현하는 기능을 수행한다. 영지(gnosis)의 궁극적 “대상(object)”은 하나님이며, 영지의 사건이 영혼 안에서 일어날 때, 그것은 인식자를 변화시켜 그를 신적 존재에 참여하는 자로 만든다 (이는 단순히 신적 본질에 동화되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따라서 발렌티누스파와 같은 보다 급진적인 체계에서는 “지식”이 단지 구원의 도구일 뿐 아니라, 구원의 목표—즉 궁극적 완성—를 소유되는 형식이 된다. 이러한 경우, 지식과 영혼이 인식 대상에 도달하는 행위는 일치한다고 주장되는데, 이는 모든 진정한 신비주의가 공유하는 주장이다.

 

물론 이러한 주장은 그리스적 테오리아(theoria) 에도 나타나지만, 그 의미는 전혀 다르다. 그리스적인 의미에서 테오리아에서 지식의 대상은 보편자이며, 인식 관계는 “시각적(optical)”이다. 즉, 객관적 형상에 대한 시각적 관계의 유비로서, 그 관계 속에서도 인식자는 영향을 받지 않은 채 남아 있다. 반면 영지주의적 “지식”은 개별적인 것에 관한데(초월적 신은 여전히 하나의 개별자이기 때문이다), 인식의 관계는 상호적이다. 즉, 인식자는 동시에 인식되며, “인식되는 자”의 능동적 자기-계시(self-divulgence)가 개입한다.
그리스적 테오리아에서는 마음이 자신이 바라보는(사유하는) 형상들로 “형성(informed)”된다. 그러나 여기서 주체는, 참으로 상황의 최고 주체이며, 엄밀히 말해 결코 단순한 객체가 될 수 없는 실재와의 합일을 통해, “영혼”에서 “영(spirit)”으로 “변형”된다 (Gnostic Religion, 35).

 

그러나 요나스의 영지주의 해석과는 달리 그리스의 태오리아는 특히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키안 윤리>에서 실천적 행동과는 구별되는 인간활동의 지고의 형식을 말한다.  인간의 지성적 삶은 신성의 관조에 참여하며 완전한 행복에 이르게 한다. 이것은 시각적인 것과 다르며 영혼에서 영으로 변형되지도 않는다. 물론 이것은 이후 기독교의 신비주의에서 특히 동방교회애서 "하나님을 봄"이나 하나님과의 합일로 직접적 경험 (헤시키아즘)으로 표현되지만, 토마스 아퀴나스에게서 믿음의 차원이 배제되지 않는다. 바울에게서 하나님의 봄은 부분적이며, 믿음과 사랑과 소망의 차원과 연결되며, 성령의 역사에 기초한다. 그런 점에서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성령의 첫번째 은사는 지식과 지혜로 언급하며 당대 영지주의와 습합된 이방종교의 체험과 날카로운 거리를 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