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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 다시보기: 중세 봉건제 이행문제(2)

content6462 2026. 1. 12. 01:07

 

마르크스와 베버

 

베버는 자본주의를 합리적 유형과 정치 제국주의 유형으로 구분지어 논의한다. 그는 서구 자본주의 합리적 유형을 로마의 법의 전통과 프랑스 혁명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평민출신의 변호사들 그리고 상인들의 합리적 경영방식에서 보았다. 종교적인 차원에서 이러한 합리적 자본주의 에토스는 청교도의 세계내적 금욕주의와 노동윤리에서 보았지만, 이것은 쇠창살 우리에 갇혀버리는 포로 신세를 면치 못한다.

 

베버의 서구의 자본주의 이해에서 중요한 것은 로마 법의 합리적 전통이 프랑스 혁명의 시민법과 인권으로 이어지고, 다른 한편 중세도시에서 상인들의 합리적인 경영방식이다. 여기에 전문교육의 신장과 기술의 합리성을 통해 사회는 신분투쟁을 기초로 분업과 전문화 그리고 관료화로 나타난다. 계급투쟁은 시장과 노동현장에서 나타난다. 물론 고대 제국의 팽창이나 현대의 제국주의에서 발전하는 전리품 약탈 자본주의는 어디에서도 발견된다. 하지만 베버가 간과하는 부분은 상인자본과 고리대금의 부정적 사회적 기능이다.

 

반면에 마르크스는 고리대금업의 교란에서 심지어 노예 소유자와 영지의 지주들 조차도 고리 대금업자의 영향권을 벗어나지 못했다고 말한다. 마르크스는 베버와 달리 마틴 루터의 고리대금업 비판을 매우 높게 평가했다. 고리대금업은 전자본주의 사회적 질서에서 소유권을 파괴하는 혁명적인 역할을 하고, 소유권은 시민의 정치권과 관련되어있었다. 대중개인들은 고리대금업을 하는 귀족의 노예로 전락하고 정치적 자유를 상실했다. 여기서 채무를 갖는 시민의 반란과 혁명이 발생했다 (Capital 3: 734).

 

심지어 로마가 기독교를 국교로 받아들이면서 의로운 전쟁이론은, 고리대금을 금하는 토라의 규정과는 달리, 전쟁중에 고리대금업이 허락된다고 변했다. 이것은 십자군 전쟁에서 이어진다 (ubi jus belli, ibi jus usurae) (Braudel, ibid., 560).

 

고리 대금업 비판: 마르크스와 루소

 

마르크스의 고리대금업 비판은 그리스 도시국가나 심지어 로마제국에서 경제적 위기가 부자들의 신용하락과 사채놀이에 있었음을 입증한다. 주후 33년 로마제국은 토지투자정책으로 인해 심각한 경제위기를 경험했다. 티베리우스 황제는 3년간 무이자 정책을 통해 신용위기를 가까스레 막아냈다. 33년도 로마는 제국의 영토를 지중해 연안을 거처 스페인, 프랑스, 그리고 대부분 독일의 영토를 정복했다. 그리고 이집트와 리비아가 로마제국의 식민지가 되었다.

 

로마의 탁월한 역사학자아며 정치가였던 코넬리우스 탁시투스 (주후 56-120)는 고리대금업의 저주가 로마를 오래동안 괴롭힌 주범이며 사회적 갈등의 씨앗으로 말한다. 황제는 고리대급업자들로 하여금 대부분의 재산을 공익을 위해 이탈리아의 토지에 투자하라는 법령을 통과시켰다. 이들이 투자를 위해 채무자들에게 원금상환을 요구했을 떄, 빚을 갚기위해 대량으로 땅이 시장에 나오면서 토지가격이 급격히 하락했다.

 

투자대신 가격이 폭락할 때까지 부자들은 돈을 묶어두었다. 돈의 유통이 막히자 이자율은 고공행진을 하고 신용위기가 오면서 은행은 대규모로 파산을 했다. 빚을 갚지 못한 채무자들은 정치적 지위와 권리 그리고 시민으로서의 명예를 빼앗겼다 (Tacitus, The Annals, VI, 17).

 

고리대금업자들은 신용과 자본의 사회적 악영향에 대한 마르크스의 해석은 루소에게서 반향을 갖는다. <불평등 기원>에서 루소는 소유권에서 부터 정의의 첫 번째 문제가 시작 된다고 말한다. 모든 개인에게 적합한 몫을 주는 것은 정의의 기초인데 노동만이 이러한 몫을 결정한다. 노동을 통해 지속적인 소유가 창출되고 소유권으로 변형된다.

 

소유권에 입각한 사물의 새로운 질서에서 경쟁과 라이벌이 생겨나고, 이해의 갈등으로 인해 타인을 희생시키면서수익을 얻어내는 숨겨진 욕망이 드러난다. 인간은 서로를 해롭게 한다. 부유한 자들은 지배의 만족을 모르고, 이웃들을 예속시키고 노예화한다. 이들은 마치 굶주린 늑대가 인간의 살을 먹은 후 모든 다른 음식을 거절하고 오직 인간만을 삼키려는 자들과 같다(The Second Discourse, 157).

 

루소에게서 소유권은 인간의 평등을 파괴하며, 더 나아가 이것은 사회를 부자들의 탐욕과 가난한 자들의 약탈 그리고 모든 인간들의 무제한적인 부를 향한 열정으로 치닷게한다. 끊임없는 갈등은 결국 투쟁과 살육 즉 공포스런 전쟁상태로 파국을 맞는다 (ibid).

 

마르크스는 부자들의 탐욕에 기초한 소유권을 고대사회에서 고리대금업과 상인자본에서 보았다. 돈이 상품이 되고 이자를 낳는 경제질서에서 돈자본은 고리대금을 통해 사회를 지옥으로 만들어버린다.

 

역사 사회학적 접합: 자본주의 재구성

 

마르크스는 중세도시에서 근대도시로의 이행에서 상업자본의 역할에 주목했다. 이것은 자연적인 농업경쟁와 중세도시의 길드와는 달리 자본가의 성격을 갖는다. 여기에는 세계시장의 확장과 상품유통의 증대, 아시아의 산물을 획득하려는 유럽열강들의 경쟁, 식민지 시스템 등이 봉건제의 장벽을 무너뜨렸다. 자본주의 생산양식을 출현시킨 것은 해외시장이었고 무역을 끊임없이 혁명화한 것은 산업이었다 (Capital 3: 451).

 

역사 사회학적 관점에서 보면 자본주의 뿌리는 일차적으로 정치적 권력관계와 상인자본과 고리대금업에 있었다. 전자본주의 사회구성을 교란시킨 것은 인간의 탐욕과 사익에 기초한 고리대금업이었다. 제국의 해외정복을 통해 자본은 공적영역으로 들어온다. 이것은 고대 자본주의 정치적 측면을 지적하는 데, 로마의 도시경제는 거대한 농촌경제와 노예노동과 더불어 해외교역과 상인층이 지배했다. 근대의 시장경제나 산업과 해외무역은 이미 로마의 후기 공화정과 제국의 시대에 발전했다.

 

마르크스에 앞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치학> 10장에서 아테네 도시국가의 고리 대금업과 화폐축적의 문제를 검토했다. 것은 경제의 본질과 목적에서 빗나가는 가장 비자연적인 형태이다. 시민이 정치주체로 설정되며 시민국가가 로마의 공화제와 병행된다. 이것은 산업 자본주의 이전에 고대국가에서 민주주의 경제적 정의가 해외시장의 관계와 제국주의 틀에서 자본주의적 성격이 출현했음를 보여준다. 아리스토텔레스의 관점에서 본다면 마르크스의 사적 유물론은 본질적인 것이 아니라 역사적인 전개에서 출현하는 우발적인 것이다. 건전한 경제활동과 자본주의 축적기술은 어느 역사와 문화에서도 병행되어 있었고 테크네의 차이와 사회구성에 따라 자본의 형식과 운동은 다양해진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로마가 봉건제로 이행하는 결정적 요인은 야만족의 칩입이전에 부역국가의 현물경제를 통한 직접적인 국가예산 충당과 황제 지배관료제 그리고 도시 시장경제의 하락에 있었다. 독립적으로 귀족들은 대농지와 빌라 농업경제와 농장에서 수익을 창출했다. 여기서 노예는 귀족들에 의해 자유민이 되고 농노의 신분으로 상승했다. 그러나 도시경제는 제국의 중심관료제와 부역국가정책 그리고 귀족들의 농촌거주와 오이코스 경제로 인해 파탄을 맞이했다. 문화벨트로서 시장의 기능은 그리스 도시국가들과는 달리 로마 제국의 도시들에서 사라졌다.

 

사적 전개에서 자본주의는 중세 중엽부터 상업의 발전과 해외교역에서 국가의 보호를 통해 진행되었다. 중상주의 시기에 스페인의 남미대륙에 대한 식민주의 정책은 대서양에서 아프리카와 남미의 대 농장를 연결하는 노예무역으로 막대한 부를 얻었다. 이른바 이후 영국의 산업혁명을 위한 본원적 축적의 기반은 식민지경제와 노예무역이었다.

 

물론 마르크스는 <자본 1> 에서 이러한 식민지 자본주의 와 자본축적의 기독교적 성격을 날카롭게 비판했다. 그리고 본원적 축적은 <자본 3>의 16장에서 돈 자본과 신용제도가 해외시장과 교역에서 처음으로 발전되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자본과 해외시장의 접합을 세계체제의 틀에서 충분히 발전시키지 못했다. 그는 정치와 경제의 접합으로 자본주의 성격을 생산력과 시장에서의 가격경쟁과 노동착취 그리고 과도생산에서 자본주의를 일반화시켰다. 그에게 시민사회와 공론장을 위한 시장의 문화적 기능과 공공선 거버넌스의 중요성은 실종된다. 경제는 본질적인 것이 아니라 인간의 윤리적 실천과 권력의 지배방식 그리고 테크네 즉 기술 합리성에 의해 결정적인 영향을 받는다.

 

이 지점에서 나는 자본주의를 역사 사회학적으로 재구성한다. 베버는 자본주의를 합리적 경제활동과 정치적 자본축적으로 분류했다. 이러한 유형론적 분류는 마르크스에게서 전 자본주의와 자본주의를 구분하는 생산양식의 구분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마르크스의 생산양식은 자본의 다양한 기능과 여기에 기초된 사회 구성내지 계층론을 통해 구체적으로 경험적 자료들을 통해 재구성될 필요가 있다.

 

역사적으로 볼때 시장의 계보학은 그리스 도시국가에서 문화 벨트의 정치적 기능을 가지며, 자본주의는 해외시장과 세계체제 안에서 기원을 갖는다. 상업자본은 해외시장과 국가권력 그리고 전쟁을 통해 뻗어나갔다. 이것은 이미 고대 그리스 도시국가들이나 로마의 후기 공화제에서 잘 드러난다. 자본과 노동을 매개하는 것은 해외시장과 무역 그리고 제국팽창의 전쟁이다. 역사적 자본축적은 자본의 다양한 기능이 정치권력과 더불어 역사적인 사이클로 나타난다.

 

아테네의 고전적 민주정은 전쟁과 고삐풀린 제국주의 팽창을 억제했지만 오히려 선동민주정에서 페리클레스는 독재와 포퓰리즘을 통해 전쟁과 제국주의 팽창을 극대화시켰다. 자본축적의 사이클은 역사적 전개과정에서 해외시장과 패권다툼 그리고 사회의 이행과 기술진보를 기초로 인식론적 파열로 등장한다.

 

그러나 자본주의 용어는 1850년 루이 블랑에 의해 사용되었는데 누군가가 타인을 배제하고 자본을 점유하는 것을 의미했다. 이 용어는 1867년까지 마르크스에게 알려져 있지 않았다. 베르너 좀바르트는 <근대 자본주의, 1902> 에서 본격적으로 자본주의 문제를 학계의 논의로 전개했다. 자본주의는 국가권력의 산물이었다 (Braudel, ibid., 237, 549).

 

그러나 타인을 배제하고 자본의 점유 즉 자본주의는 근대의 산업시대가 아니라 고대 그리스 도시국들과 로마 공화제와 제국의 시대에 정치와 경제활동이 접합되면서 나타난다. 도시경제와 시장기능의 하락에서 신분계층에 변화가 오고 다른 사회로 이행이 시작된다. 그러나 제국팽창에서 출현하는 전리품 자본주의는 세계체 안에서 역사 사이클로 반족되면서 출현한다.

 

초기 중세에서 중기 중세로 진입하면서 도시경제의 활성화와 길드를 통한 상인신분의 상승이 일어났다. 10세기 후반부터 시작된 십자군 전쟁은 해외교류와 무역을 통해 중세의 경제를 세계체제의 규모로 확대시켰다. 중세기의 자본축적과 경제 사이클은 도시의 시장을 활성하면서 르네상스의 유리한 환경을 제공하고 콜럼부스 대륙발견이후 중상주의 정책과 식민지 전리품 경제와 노예무역은 정치적으로 접합되었다.

 

이러한 자본축적의 사이클은 초기 근대의 산업혁명에서 기술발전과 자연과학의 진보로 대규모의 수준에서 식민지 전리품과 제국주의로 출현하고 1차 세계대전에서 막을 내렸다. 이러한 자본의 사이클은 냉전시기를 거치면서 후기 근대에서 구소련의 붕괴와 핵의 위협으로 나타나고 원자력 에네지와 리버럴 세계질서의 생산양식으로 등장한다. 이러한 역사사회학적 관점은 사적 유물론의 한계를 비판적으로 갱신한다

 

사적 유물론과 중세 봉건제 이행문제

 

그레코-로마문명 (주전 5-4세기: 그리스 도시국가; 주전 2세기ㅡ주후 2세기: 로마제국)은 지중해 연안에 위치한 해안도시와 식민주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노예의 생산양식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로마제국의 자본주의에서 대외적인 국제교역과 노예노동은 대영지에서 나타났다. 농업노예는 '말하는 도구'로 간주되고 고가의 상품품목이었다.

 

대규모의 노예들이 라티푼디움에서 한 노동은 유례가 없을 정도였다. 대토지 귀족들은 중간 크기의 많은 빌라 영지를 소유했고 목축과 포도주와 올리브를 재배했다. 농업노예들은 공화국 말기부터 제국의 초엽에 대토지 소유자들에게 큰 수익을 얻게했다 (Anderson, Passages from Antiquity to Feudalism, 59, 61, 74).

 

주후 3세기 이후 도시중심과 농촌주변부는 경제적으로 그리고 정치적 관계에서 역전되기 시작했다. 부역국가를 통해 자급경제가 양립하면서 귀족들은 도시부역을 위한 책임을 회피하고 농촌에서 정치 경제적 세력을 구축했다. 평화의 시기에 노예 공급노동이 침체되면서 경제생활은 도시의 시장에 교란과 위기를 초래하고 도시교역과 산업은 쇠퇴하기 시작했다.

 

반면에 귀족 지주들은 식민지역 농부들에게 법적권한을 가지고, 독립적인 소농들을 흡수했다. 5세기에 귀족지주들의 세력은 정점에 달했고, 노예를 영지에서 자유롭게 노동하도록 방면했다. 농노의 신분 변화가 일어났다. 이제 지주들은 정치, 경제, 사회의 지배자로 군림했다. 이것이 중세 봉건사회의 새로운 상황을 설명한다. 이러한 사회학적 해명에서 마르크스가 지적한 자본의 부패한 기능 (고리대금업)은 사회적 관계에서 중요하게 고려될 수 있다.

 

이러한 사회학적 접합이론에서 봉건제도가 로마 제국시대에 노예혁명에 의해 출현했다는 스탈린의 사적 유물론과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노예는 농노의 신분으로 통합되고 계급투쟁은 고리대금업자와 채무자들간에서 일어났다. 로마의 후기 공화정이나 제국에서 프로렐타리아트는 계급투쟁이나 혁명을 한 것이 아니라 국가보조를 받으며 아이둘을 돌보는 일을 했다.

 

스탈린의 사적 유물론에서 세계사는 기계적으로 노예제, 봉건제, 그리고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로 진행된다. 이행과정에 대한 생산양식과 자본축적 문제 그리고 해외시장과 상부구조의 역할에 대한 사회과학적 해명이 거의 없다.

 

그러나 마르크스에게서 상인자본과 고리대금의 역할은 전 자본주의 사회구성에서 매우 중요하다. 봉건제에서 자본주의로 이행해서 상업자본과 무역은 중상주의 시기에 본원적 축적과 식민주의에서 출현한다. 생산자는 상인과 자본가되며, 이것은 중세기 중엽의 자연적인 농업경제와 길드의 수공업자들 그리고 중세 도시산업과는 다르다. 이런 역사적 이행에서 대규모 산업은 기술진보에서 나타나며 상인은 생산을 콘트롤하며 실제적인 자본가가 된다(Capital 3: 452-3).

 

상인이 소규모의 산업을 통해 노동자를 고용하고 생산을 할 때 자본주의가 출현하는데 이것은 경제활동을 의미한다. 마르크스에게서 신분상승은 누가 생산을 담당하고 자본축적을 상업과 산업에서 기술진보와 해외시장과 함께 정치적 차원(민주주의와 제국주의)에서 전개되는 지에 연관된다.

 

이러한 자본축적의 사이클은 역사적인 전개과정에서 일직선이 이니라 시스템적으로 다차적 관계들의 총체로 나타난다. 마찬가지로 생산력과 사회적 관계의 변화에서 고리대금과 상인자본이 출현하며, 중세기 이행에서 자본축적 문제가 해외정복과 시장에 관련하여 노동력을 담당한 농노신분이 출현한다.

 

사회구성 또는 구조안에 관계들의 총체가 정치, 경제, 법적, 생산계층의 변화와 더불어 접합 (농노와 식민지역 농부 그리고 게르만족의 칩입과 유산)되면서 역사적인 빌라영지들은 장원제도의 토대를 형성한다. 이러한 역사사회적인 상호작용에서 고대 로마제국은 봉건제로 이행한다 (Anderson, ibid., 126). 이러한 역사 사회학적 해명은 노예혁명을 통해 고대 사회가 봉건제 사회로 이행했다는 도식화 일반론이 허구임을 폭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