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오폴리틱 사회학
비오폴리틱 사회학은 후기 자본주의에서 나타나는 합리화와 전문화 과정에서 신체를 조절하는 노동 시스템에 주목한다. 이것은 사회계층 안에서 자본과 노동 그리고 신체와 인종문제가 어떻게 폭넓은 물질관계와 권력의 네트워크에서 지배되고 변형되는지를 검토한다. 이러한 비오폴리틱 사회학은 글로벌 제국의 변종의 지배방식에서 국가의 아올로기 기재가 어떻게 자본축적과 더불어 신신식민지 헤게모니로 작동하는 지에 주목한다.
비오폴리틱 사회학은 자본주의를 자본과 노동에 기초한 영국의 산업혁명에서 파악하지 않는다. 이러햔 유럽중심적 이해보다는, 오히려 자본주의가 이전에 세계체제로서 어떻게 기능했는 지를 검토한다. 자본주의는 신체를 제어하는 노동방식과 자본축적에 기초하며, 관료행정과 법적 정당성을 통해 기술 합리성을 신체의 규울과 사회의 콘트롤로 펼쳐나간다.
중심부의 자본축적은 해외시장에서 자유무역과 민족주의와 식민주의로 출현한다. 여기서 과학기술의 발전과 시장의 확대는 글로벌 자본주의를 지식과 권력의 네트워크로 묶고, 제국의 지배담론과 국제정치 거버넌스 그리고 헹정 메커니즘은 지구의 삶을 기술 자본화한다. 일차적으로 자본주의 역사적 단계에대한 비오폴리틱 접근은 해외 상업스스템에서 시작한다.
안더 프랭크: 종속이론에서 해외상업 시스템
안더 프랭크는 이전 종속이론에의 한계를 직시하고 자본축적의 사이콜 이론으로 세계체제로서 자본주의 문제를 개념화한다. 11-12세기에 중국의 송 왕조는 해외 시장과 무역에서 경제를 주도했다. 명 시대에 해외정복은 1403년부터 1434년까지 있었지만, 몽골의 침입을 견제하기위해 1411년 양자강의 대운하 사업을 일으켰다.
대운하 사업은 해외무역의 의존도를 낮추고 내륙경제로 진입했다. 명시대에 중국의 경제는 인구증가와 더불어 급속히 성장했다. 상해의 근처에 있는 양자강 하류지역에서 면화와 비단산업은 번창했고, 이 두 가지 산업은 농작물 생산과 더불어 중국의 경제를 매우 부유하게했다.
양자강의 유역을 따라 시장의 확대는 상당한 정도로 발전했고, 다른 남중국의 지역들에서도 수공업과 농업은 번창했다. 중국은 주변의 제후국들과의 공물관계를 해외상업 거래망과 연결했다. 상업의 팽창과 공물/무역의 네트워크는 동시에 발전했다.
이러한 상업/공물 시스템에서 중국은 중심부로서 서 아시아와 동 아시아를 포함하고, 인도와 이슬람 지역과 유럽과 연결되어 있었다. 이것은 자본주의 세계경제 시스템을 갖추고 있었다 (Frank, ReOrient, 114). 명 시대의 사화와 경제는 유럽에 앞 서 있었다.
중국과 페르시아의 해외교역에서 중국의 주요한 기술은 이슬람 국가들 특히 이슬람 스페인을 통해 유럽에 도달했다.스페인의 톨레도와 이슬람 학자들의 활동과 중요한 도서관들은 이미 1085년에 학문의 꽃을 피우고 있었다. 이후 코르도바는 선진적인 기술지식을 서유럽에 전수해주었다 (ibid., 187).
15세기 이전 중국의 기술진보는 조셉 니담의 기념비적인 고전 <중국에서 과학과 문명>에서 확인된다. 유럽의 르네상스 시대에 중국은 알렉산드리아의 과학보다 더 훨씬 더 기술진보와 경제에서 지배적인 위치를 점했다.
그런가하면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기에 메디치 가문과 은행업은 13세기 말 플로렌스에서 14세기초까지 근대적인 의미에서 금융과 재정이 무르익었다 (Arrighi, The Long Twentieth Century, 96).
콘스탄티노플의 라틴 왕국의 황제 볼드윈 1세—플랑드르의 지배자—의 대관식은 소피아 성당에서 거행되었다. 베니스는 높은 관직이 아니라 이들의 상인제국을 확장하길 원했고 향신료 무역을 15세기까지 이어갔다.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의 상업 자본주의는 사미르 아민이 주장하는 것처럼 공물체제론으로 파악하기 어렵다.
베니스의 경쟁자인 제노아는 13세기 말 첫번째 상업무역의 해로를 북해를 거쳐 영국과 플랑드르와 그리고 스페인 이슬람과 연결했다. 이 시기에 제노아와 베니스는 유럽의 전역에 걸쳐 경제를 발전 시키고 중앙 아시아와 아프리카 경제에 영향을 미쳤다.
1258년 몽골은 바그다드를 파괴했고, 콘스탄티노플의 라틴왕국은 1261년 북해로 이어지는 베니스의 독점무역을 파괴했지만 1453년 오트만 제국의 침략으로 몰락했다. 제노아는 이 지역에서 헤게모니를 탈환하면서 몽고의 평화시기에 동방과의 교역에서 수익을 올렸다. 12 61년 마르크 폴로의 아버지와 삼촌이 베니스에게 몽골의 칸의 나라를 콘스탄티노플을 거쳐 첫번째 여행을 했다. 1273년 이들은 17살의 마르크 폴로를 동행했다.
이집트: 자본축적과 세계경제
프랭크는 세계경제에 대한 새로운 방향설정에서 13세기 카이로의 상업 자본주의를 분석하지 않았다. 이슬람의 경제발전에서 시장경제는 8세기 부터 12세기 사이에 해외무역과 상업자본으로 특징된다.
재닛 아부- 루고드는 <유럽 패권이전: 13세기 세계체제>에서 1250년-1350년 이탈리아 도시국가들 특히 제노아와 베니스의 해외교역을 분석하면서, 카이로와 중국 그리고 인도로 연결된 상업자본주의를 부각시켰다.
13세기 중세 도시 카이로의 자본주의를 분석하면서 그녀는 유럽중심주의 허상을 벗겨낸다. 카이로는 매우 수준높은 도시문명의 사스템을 가지고 있었다. 맘루크 술틴지배는 1250년부터 1260년 사이 이집트에 세워지고 살라딘의 후계 왕조인 아이유비드를 대신했다. 이후 오토만 제국에 멸망하기 전 16세기까지 지속했다.
맘루크는 군대에서 활동한 엘리트 노예출신들이었고, 행정과 군권을 장악하면서, 바리야가 이집트의 아이유비드의 술탄을 전복하고 맘루크 술탄체제를 세웠다 (1250). 이집트에서 노예들은 다양한 지역들에서 유입되었고 모든 사회 영역에서 넘쳐났다. 맘쿠크는 노예출신이지만 군인으로 교육받고 훈련된 그룹이었고 주요 행정 업무에서도 요직을 차지했다.
맘루크 사회는 노예무역을 개방하고, 10살에서 14살사이의 어린 노예들을 자유민으로 사면했다. 이후 엄격한 군사교육과 훈련을 거쳐 이들은 군대와 행정의 요직에서 활동했다. 말루크 술탄은 마지막 십자군 (1249-1250)을 격퇴시키고, 1년 후 몽골을 다마스커스에서 몰아냈다. 이집트는 인도와 중국으로 가는 해로를 거의 독점지배했다.
1261년 베니스가 지배하던 콘스탄티노플 라틴 왕국이 물락한 후 이집트는 제노아의 경제적 이해에 관심하고 교역을 시작했다. 카이로는 베니스와의 교역도 했다. 1291년 맘루크는 마자막 십자군 왕국의 수도인 아크르(Acre)를 점령하고 시리아를 탈환하면서 십자군 전쟁을 종결했다.
이후 이집트는 해상을 통한 동방무역에서 패권국으로 등장했다. 베니스의 항신료 독점무역은 이집트의 통과세와 관세정책에 부딪쳤다. 이집트는 15세기까지 해상무역의 주도권을 쥐었다. 카이로는 “세계 경제의 어머니”로 발전했고, 해로는 이집트를 거처 홍해로 바뀌었다.
이집트는 완강히 유럽의 상인들이 자신들의 영토를 지나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유럽의 상품이 인도와 중국으로 거래되는 것을 막았다. 이집트에는 향신료 무역을 독점한 강력한 이슬람 거상그룹 (karimi)이 존재했다.
이슬람의 황금의 시기 (8-9세기)에 이미 페르시아 만에 이르는 항로가 형성되어 있었다. 맘루크 술탄은 시리아와 팔레스티나를 지배하고, 카이로는 술탄 알 나시르 무하마드의 지배시기(1294-1340)에 정치와 경제와 문화적으로 정점에 달했다. 인구는 5십만명으로 추정된다.
이집트의 맘루크는 홍해를 통해 인도양으로 진입하려는 베니스의 팽창을 봉쇄했다. 세계체제의 다른 축은 콘스탄티노플에서 중앙 아시아 그리고 바그다드와 페르시아만을 통해 지중해와 인도양을 연결하는 해로였다. 여기서 알렉산드리아-카이로-홍해는 아라비아 해협과 인도양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이슬람은 고리대금을 금지했지만 처음부터 상업에 긍정적이고 계약사업을 발전시켰다.
코멘다 계약과 신뢰 합리성
코멘다 계약(The commenda contract)은 카라반 교역에서 행해지던 전통적인 방식이었고, 상업의 도덕적 의미와 사회적 기여를 강조했다. 코멘다 계약은 자본주의적 도구이며 자본은 교역과 산업생산에서 투자된다. 물론 자본주의는 경제활동과 시장, 상품 그리고 교환과 무역에서 규정되지만, 여기에 결부된 종교적인 태도 즉 경제윤리는 중요했다.
생산력은 생산수단의 효율화 즉 기술개선을 통해 상품을 대량생산했다. 노동의 분업과 더불어 효율적 기계생산과 유통과 시장판매에서 자본주의 경제가 설정된다. 자본과 노동을 기초로하는 코멘다 계약과 상업의 파트너십은 수익투자를 위해 중세 아랍의 사회에서 일반적으로 사용되었지만 무제한 투자는 금지되었다. 노동 파트너쉽은 분업과정에서 자본가와 노동자 그리고 상품판매자를 동일한 수준에서 고려하고 노동자가 궁핍화 되는 것을 막았다.
코멘다 계약과 신뢰합리성은 이슬람의 생활세계에 기초되며 문화적 진정성으로 경제활동과 자본주의 형성에서 핵심역할을 했다. 교역과 산업에대한 재정지원에서 신용 파트너쉽은 이슬람 세계에서 결정적이었다.
신용에 기초된 구매와 판매는 장거리 교역에서 매우 중요하며 이슬람에서 널리 유포된 상업적 실천에 속한다. 카이로와 알렉산드리아는 산업생산과 해외교역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했다. 이슬람의 거상 카리미 그룹에서 카림은 거대한 도매 상인을 의미했다.
사미르 아민과 세계경제
사마르 아민은 공납제를 기초로 중심부와 주변부로 배열되는 세계경제체제를 개념화했다. 아민의 세계체제의 틀에서 원시적 공산주의는 공동체 단계로, 공납제 단계 (전 자본주의형식)은 세계체제인 자본주의로 이행한다. 아민은 마르크스의 사적유물론에 입각한 역사단계 (아시아적 생산양식, 노예제, 볻건주의, 자본주의, 사회주의) 를 거절한다. 모든 공납제 사회들은 마르크스의 사적 유뮬론으로 해명될 수가 없다.
전자본주의적 사회안에서 형이상학적이며 종교적인 열망이 권력과 문화를 지배하며, 이러한 공납제 생산양식은 고대 이집트나 헬라문명, 동방 기독교, 이슬람, 서구 기독교문명에서도 나타난다 (Eurocentrism, 100.111).
이러한 세계경제의 틀에서 아민은 그리스 문명과 오리엔탈 문명을 구분짖는 에드워드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의 허구를 날카롭게 공격했다. 아민은 종교사학파의 입장에 근접한다. 모든 문명과 역사는 상호교류하고 지배적인 영향을 행사하거나 예속 당하기도 한다. 유럼중심주의를 정치경제학적으로 검토하지 않은 채 서구와 동양주의로 나누는 이항의 대립은 매우 해롭다. 더우기 이집트의 정치와 경제 그리고 문화에 대한 전문적인 이해는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에서 증발한다.
나는 아민의 <유럽 중심주의>를 수용하지만 사이드가 포스트콜로니얼 비판 문예비평에서 시도하는 고고학적 담론과 계보학적 비판 그리고 교차 텍스트와 헤게모니에 대한 세밀한 독해를 중요하게 간주한다. 이러한 세밀한 독해는 역사 사회학적으로 자본주의 문제를 해명한다.
살라딘의 유산과 맘루크 술탄정부
살라딘은 이집트에 아이유브 왕조를 설립했고, 1187년 십자군으로부터 예루살렘을 탈환했다. 그는 수니파 이슬람을 강화했고, 단테는 그를 미덕을 갖춘 이교도로 평가했고, 리처드 1세는 그를 위대한 왕으로 존중하고 교류하기도 했다.
살라딘은 카리미스를 지원했는데 이들의 세금은 국고재정에 큰 도움이 되었다. 이들은 향신료 무역을 독점했고 대규모의 수익으로 인해 4년치 세금을 미리 지불할 정도였다. 카이로와 알렉산드리아에는 유명한 카리미의 물류창고가 있었다.
말루크 술탄은 살라딘의 정책과 수니파 이슬람을 강화하고 신비주의 수피즘을 유지했다. 이들은 이슬람 법학자들의 존중했지만 한발리 법의 전통을 대변하는 이븐 타이미야의 가르침은 거절했다. 한발리의 가르침은 엄격한 도덕적 태도와 <쿠란>과 예언자 모하메드의 가르침과 삶의 실천적 모범을 담은 <수나>에 문자적 해석을 취했다.
그러나 말루크 술탄정부는 이전의 살라딘의 술탄정부처럼 9세기 알샤피이 법적 전통을 추종했다. 이 법룰학파는 경전 <쿠란>과 모하메드의 실천적 모범인 <수나>를 신적권위로 받아들였지만, 계명 <하디쓰>에 대해 인간적인 사고와 합리적 생각을 허락했다. <쿠란>과 <하디쓰> 의 귀절들이 분명하지 않을 경우 이들은 유비론적 추론과 법학자들의 합의를 적절하게 받아들였다.
맘루크 정부는 <우마르 조약>을 준수하고 기됵교인과 유대인 공동체에 신분보호자격을 허락했다. 비 이슬람으로서 이들은 세금을 지불하고 예배의 장소를 세우는 것을 허락받았다. <우마르 조약>은 9세기 우마이야 칼리프 우마르 2세로부터 기인하는데, 경전의 종교인 유대인과 기독교인에게 신분을 보장하는 보호조약이다.
맘루크 술탄들은 십자군과 몽골의 칩입을 막하내면서 경제발전에 큰기여를 했다. 13-14세기 맘루크의 알 나시르 무아메드 술탄 시기에 거상들은 200여명이 존재했고 이들의 물류창고는 인도양에서 향신료 무역으로 인해 이집트 경제에 중심역할을 했다.
국가경제는 말루크의 엘리트 가문과 술탄 중심의 위계질서 제도, 그리고 자유시장 경제로 구성되었다. 카이로에 중앙정부 관료제가 설립되고, 행정기구(히스바)를 설치했다. 4명의 고위관리들은 재정장관의 역할을 하면서, 시장에서의 가격과 교역 그리고 상품의 질을 관리했다.
국가와 상인자본의 융합은 이집트의 독점자본주의를 특징 짖는다. 제조업은 공장보다는 작업장에서 이루어졌고 노동자들이 생산수단을 가지고 상품을 만들어냈다. 대공장들 (마트바크스)은 술탄이나 권력자들에게 속했고 노동자들이 고용되었다. 설탕 정제사업, 제지 그리고 직물산업이 융성했다. 직물기술은 상당한 정도로 발전되었고 면과 아마포는 특수 품목이었다. 아마섬유는 이집트의 주요 산업을 위한 농작물이었고 해외무역의 주요 품목이었다.
경제 합리성과 문화적 실천
이집트 시장에는 유럽에서 수입한 옷감으로 넘쳐났다. 키리미스 그룹의 상인 자본과 국가관료들의 투자와 독점산업은 자본주의 생산방식 특히 이집트의 직물산업에서 나타난다. 그러나 사회복지를 위한 정책은 자선모금(자카)과 이슬람의 법에 의해 자유방임적 자본주의로 진행되지는 않았다.
베버가 말한 종교의 사회 경제적 구성은 여기서 잘 드러난다. 이슬람은 칼빈주의와는 달리 상인 자본주의와 국가정책의 연합이 되고 노인들과 고아와 과부들을 위한 사회복지제도가 시행되었다. 이슬람 경영방식은 노동자들을 지나친 착취로 몰아가지 않았다. 이것을 배버는 칼빈주의 귀족윤리와는 달리 이슬람안에 있는 예언자적 심정윤리로 부각시켰다.
그러나 베버의 한계는 아슬람의 경제 합리성을 코멘다 계약에서 파악하지 못했다. 상업신용은 경제활동의 도덕성을 포함하며 문화적 실천에 속한다. 문화적 삶의 양식은 이슬람의 생활세계에 속하며 두터운 기술을 요구하지 이슬람의 예정론으로 평가되기 어렵다. 이슬람 경제원리는 합리적인 부의 창출에 있지만 종교윤리와 더불어 있다. 이것은 무제한 축적이라는 서구의 자유방임주의와는 다르다. 신용계약을 기초로 노동자의 궁핍화를 자선과 사회기금을 통해 보호하는 사회 안전망과 도덕적 차원을 갖는다.
이것은 마르크스가 산업 자본주의에서 분석한 자본축적과 노동착취와 다르며 (기형적 유형) 또한 베버가 국가개입을 배제한 합리적 수익창출이라는 자본주의 이념형과도 다르다. 이슬람의 경제활동은 국가개입과 신용합리성 그리고 문화적 실천을 기초로 한 새로운 유형의 자본주의이며 여기서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사회적 안전망이 쳐졌다. 경제활동은 신용과 절제와 중용에 입각한 문화 합리성에 속한다.
그러나 나는 아민과는 달리 카이로의 경제를 공납제가 아니라 해외시장과 자본축적에 기초한 초기 상업 자본주의로 자리매김한다. 이것은 순화론적 시스템으로 가동되며 정치와 경제와 문화와 종교는 사회구성을 중층적으로 결정한다.
독점 관료자본: 경쟁의 부재와 판데믹의 위기
유럽의 옷감을 위한 특별 상설시장 (바자)이 카이로에 설치되고, 터키의 타페트와 인도의 비단과 면이 도매로 거래가 되었다. 직물생산과 교역의 증가는 이집트의 직물과 면원료와 섬유수출과 시장을 증대시켰다. 유럽에서 직모산업은 훗날 증기엔진 개발로 산업혁명으로 이어지는 경제영역이었다.
정부관리들은 국가 주요사업에 투자를 하고 거상들이나 부르주와 산업가들에 비해 세금공제로 인해 혜택을 누리고 농업분야에 투자를 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독점자본주의는 비경쟁으로 인해 기술개발이 낙후해지고 상품을 강매하는 문제로 등장하기도 했다. 그러나 흑사병 판데믹으로 인해 노동력에 결정적인 타격을 입었다.
흑사병과 세계경제의 변화
1347년 베니스 항구에 정박한 배들에서 쥐들이 유럽으로 전해지면서, 흑사병이 전세계로 덮쳤다. 18개월 이내에 베니스 인구의 절반이상이 죽었다. 판데믹의 위기 시대에 개인주의적으로 조직된 제노아 경제는 공공재산을 상인들의 삶의 안전망을 위해 창출할 수가 없었다. 반면 공동체적으로 조직된 베니스 경제는 상인들에게 보험과 공공보조와 상품을 제공할 수가 있었다.
흑사병과 더불어 정부관리들의 독점사업과 불평등한 세금제도와 기술개발의 낙후는 카이로 산업을 15세기 해외시장에서 유럽과의 경쟁에서 뒤쳐지게 했다. 이집트의 쇠퇴에는 몽골의 침입이 원인이 되기도 했다.
그리고 전쟁 ...
징기스칸의 후예 티무르 (Tamerlane, 1336-1405)는 기술장인들을 중앙 아시아로 이주시켰고 이것은 시리아 면직산업에 치명적인 타격을 주었다. 15세기 초 시리아나 이집트는 면원료를 유럽에 수출하고 베니스 상인들은 제조품으로 두배의 수익을 올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14 53년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면서 오토만의 지배가 부상했다. 16세기 초 오토만 제국은 터키와 중동 북아프리카, 발칸 그리고 유럽의 다른 지역들을 지배했다. 사파비드는 이란과 서아시아의 무갈과 다불어 동 서양을 지배한 가장 활력적인 문명이었다.